주영하 |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사색당쟁 버리고 화합하라” 영·정조의 탕평음식 유래설

요사이 한정식당에 나오는 음식 중에서 탕평채(蕩平菜)만큼 정치적 의미를 지니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없을 듯하다. 칼럼리스트 이규태(1933~2006)는 탕평채를 두고 “노란 창포묵에 붉은 돼지고기, 파란 미나리, 검은 김을 초장에 찍어먹는 3월의 시식(時食)이다. 노랗고 붉고 파랗고 검은 사색 당쟁을 탕평코자 정조는 도처에 탕평비를 세우고 이렇게 음식까지 만들어 먹게함으로써 파당을 화합토록 했던 것이다”(조선일보 1987년 3월17일자)라고 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빗대어 “지금 야당의 속사정으로 미루어 손가락을 생각말고 손바닥을 생각할 때며 탕평채를 푸짐하게 버무려 서로 나누어 먹을 바로 지금 지금이 그 철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적었다. 그런데 문제는 정조 임금이 탕평채를 먹도록 했다는 기록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0) 탕평채

1940년 6월에 조선식찬연구소의 홍선표가 출판한 <조선요리학>이란 책에서는 탕평채의 연원을 영조 임금에게 둔다. “예전에는 우리 조선에도 묵을 그대로 기름에 부쳐 먹을 줄은 알았지마는 묵에 숙주나물이나 그 외 나물을 섞어 먹을 줄을 몰랐던 것이나 200여 년 전 영조 때 노소론을 폐지하자는 잔치에 묵에 다른 나물을 섞어 탕평채라 하였든 것이 초나물에 시작이라 하는 것이다.” 홍선표는 탕평채를 식초 맛이 나는 초나물로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홍선표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이에 비해 조선후기 학자 조재삼(1808~1866)은 1855년(철종 6년)에 완성한 책 <송남잡지>에서 탕평채의 연유를 다른 곳에 두었다. “탕평채: 청포에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서 이것을 만들기 때문에 곧 나물의 골동(骨董)이다. 송인명이 젊은 시절에 가게를 지나가다가 탕평채 파는 소리를 듣고 사색을 섞어 등용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래서 탕평사업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송인명(1689~1746)은 1719년(숙종 45년) 증광문과에서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있을 때 당시 세자로 있던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영조가 임금으로 즉위한 이듬해인 1725년에 동부승지가 되어 붕당의 금지를 왕에게 건의하였다. 특히 1731년 이조판서가 된 송인명은 노론과 소론을 막론하고 온건한 인물들을 두루 등용하여 당론을 조정하였다. 1740년 좌의정이 된 송인명은 당쟁을 억누르면서 탕평책을 강하게 추진하였다. 이러니 송인명은 탕평사업의 주동 인물이었다. 아마도 그런 사정으로 인해서 <송남잡지>에서 ‘탕평채’란 음식을 언급하면서 송인명의 사연을 곁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송인명이 세상을 떠나고 3년 후에 태어난 유득공(1749~1807)은 당시 한양의 풍속을 적은 <경도잡지>에서 “탕평채라는 것은 녹두유와 돼지고기, 미나리 싹을 실같이 썰어 초장을 뿌려서 만든다. 매우 시원하여 봄날 밤에 먹으면 좋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약 50년 뒤에 나온 <동국세시기>의 3월편에서 홍석모(1781~1857)는 “녹두포를 만들어 잘게 썰고 돼지고기와 미나리 싹, 김을 버무려 초장을 뿌린다. 매우 시원하여 봄날 저녁에 먹으면 좋다. 그 이름을 탕평채라 부른다”고 적었다. 그런데 <경도잡지>보다는 늦고 <동국세시기>보다는 앞서서 집필된 김매순(1776~1840)의 <열양세시기>(1819)에서는 탕평채에 대한 언급이 없다. 더욱이 탕평채를 언급한 두 가지 세시기에서도 이것이 ‘탕평사업’과 관련된 것이라고 밝혀두지도 않았다.

심지어 <경도잡지>에서는 김이 들어가지 않아 그 재료도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사색을 상징하는 네 가지의 재료가 지닌 탕평채의 의미를 확인하기 어렵다. <송남잡지>에서는 이미 탕평채란 음식을 한양의 가게에서 팔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만약 조재삼의 기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송인명의 탕평사업은 탕평채란 음식이름에서 얻은 것이지 결코 영조나 정조의 탕평책으로 인해서 탕평채란 음식이 생겨났다고 보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오히려 여러 가지 재료를 골고루 섞었다는 의미에서 탕평채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더 많다. 실제로 ‘탕평’이란 말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글에서 자주 나온다. 사색당파가 심각한 정치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던 조선 중기 이전에 탕평이란 말은 주로 ‘난을 평정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영·정조 시기에 와서 비로소 사색당파와 관련된 글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의 ‘탕탕평평(蕩蕩平平)’의 ‘탕평’이 등장하였다.

조리서 중에서 음식 이름으로 ‘탕평채’를 언급한 책은 한글로 쓰인 <규곤요람·음식록>과 <시의전서·음식방문>이다. <규곤요람·음식록>은 아직까지 필자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책의 표지에 ‘건양 원연’과 ‘병신 오월’이라 적힌 것으로 보아 고종이 황제로 등극한 원년인 1896년에 집필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는 판면의 위인 천두에 음식이름을 한자로 적어 두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탕평채를 ‘탄평채묵(炭平采默)’이라고 적었다. 아마도 탕평채의 다른 이름인 탄평채(坦平菜)를 소리만 차용하여 이렇게 적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글로는 ‘녹두묵탄평채’라고 적었다. 그 조리법을 요사이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녹말묵을 잘게 치고 육회를 잘게 쳐서 채여 볶고 미나리 살짝 데치고 하여 비비고 마늘과 파를 갖은 고명에 미나리 썰고 한데 무치고 초 치고 담아 놓고 하여 비빈 것을 냉겨자를 위에 다 뿌리고 잣가루 고춧가루를 뿌리나니라.”

비슷한 시기에 한글로 적은 <시의전서·음식방문>에서도 그 이름은 ‘탄평채’로 나온다. “묵 가늘게 치고 숙주 미나리 데쳐서 잘라 양념하여 숙주와 같이 무치고 정육 다져 볶아 넣고 숙육은 채쳐 넣고 김 부쉬 넣고 깨소금 고춧가루 기름 초 합하여 지렁(간장)에 함담(짜고 싱거움) 맞추어 묵과 한데 무쳐 담고 위에 김을 부쉬 얹고 깨소금 고춧가루를 뿌리라.” <규곤요람·음식록>과 <시의전서·음식방문>의 탕평채 조리법은 그 재료는 비슷하지만, 맛을 내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규곤요람·음식록>에서는 겨자와 식초로 소스를 삼았다면, <시의전서·음식방문>에서는 참기름과 간장, 그리고 식초로 맛을 냈다.

1924년에 이용기가 펴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는 ‘묵청포(탕평채 청포)’라고 적었다. 그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초나물같이 다하여 놓고 흰 묵이나 노랑묵을 껍풀 벗기고 홀쭉하고 길이는 치 닷분(한 치 다섯 푼, 약 4.5㎝)이나 하게 척척 쳐서 넣고 김을 원장(통)째 비비며 티를 뜯어서 맨니로 구어 부스질러 넣고 모다 한데 까불러 먹나니라. 초가 으뜸이니 많이 칠 것이니라 맛살이나 조갯살을 잠간 데쳐서 넣으면 조흐니라.” 초나물 조리법은 묵청포 바로 앞에 적어 두었다. “숙주와 미나리를 데쳐 짜 놓고 장과 초와 기름과 깨소금 고춧가루 치고 파 데쳐 넣고 물숙을 넣어 먹나니 양지머리에 차돌백이나 제육을 써러 넣으면 조흐니라 움파를 많이 데쳐 넣는 것이 조흐니라.” 결국 이용기가 소개한 묵청포는 초나물에 청포묵을 넣고 김을 부숴 넣는 조리법이라 할 수 있다. <조선요리학>을 쓴 홍선표 역시 초나물에 묵을 넣은 음식을 탕평채라고 불렀다.

탕평채가 초나물과 다른 이유는 청포묵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청포묵은 매우 오래된 음식으로 여겨진다. 다른 말로 녹두유 혹은 녹두포 혹은 녹두청포 혹은 청포로 불렀다. 1866년(고종 3년)에 작성된 <각사당각묘소제향신정식등록>에는 삼량을 들여서 청포와 떡을 시중에서 사왔다고 했다. 이미 <송남잡지>에서도 탕평채를 가게에서 판다고 했듯이 청포묵을 전문으로 만들어 파는 사람이 당시에도 있었던 듯하다.

<하재일기>란 책에도 그러한 기록이 나온다. 이 책은 1890년경부터 사옹원의 공인(貢人) 일을 하였던 지규식이 그의 생활을 한문으로 기록한 일기이다. 일기에는 1891년부터 1911년까지 거의 20년이 넘는 기간에 매일같이 물건을 사서 궁궐에 납품한 일, 그리고 사옹원 분원에서 생긴 일 따위가 적혀 있다. 그 중에서 1892년 음력 3월22일 일기에 청포가 나온다. “아침에 안개가 끼었다 갬. 5냥은 정육값, 9전은 청포값, 4전 또 3전은 담뱃값이다. 서울 주인 노파에게 아침을 대접하였다.”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우천 근처에 살았던 지규식은 서울에 가면 숙식을 하는 집의 주인 노파가 그 전날 그의 집에 왔기에 아침 식사로 정육과 청포로 탕평채를 만들어 대접했던 모양이다.

1930년대가 되면 탕평채는 ‘꼭알아둘 이달 료리법’(동아일보 1931년 4월24일자)으로까지 일반에게 소개되었다. 이미 1920년대 중반부터 충청북도 진천에는 골목마다 메밀묵을 판매하는 식당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메밀로 만드는 메밀묵에도 고기가 들어가서 탕평채를 흉내 내었다. 다만 국수처럼 길게 썰어 고기장국에 말아 내기에 술안주로 안성맞춤이라고 했다.(<별건곤> 24호, 1929년 12월1일자) 경성에는 겨울밤에 메밀묵을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 있었을 정도였다. 탕평채 역시 식민지 시기에 각종 조리서에 등장할 정도로 대표적인 손님 접대음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주영하의 음식 100년](20) 탕평채

하지만 한정식을 판매하는 음식점에서 탕평채가 빠지면 안 되는 메뉴가 된 때는 대략 1970년대 이후로 여겨진다. 봄에 입맛을 돋워주는 경기도의 토속음식으로 부각(경향신문 1971년 3월18일)되더니, 급기야 손님상의 중심 메뉴가 되었다. “손님상을 차릴 때 큼직한 접시 중심 위치에 묵 썬 것을 소복이 담고 그 주위에 갖은 채소 고기볶음 등을 색맞추어 구절판 담듯 담고, 양념장을 곁들여 내놓으면 손님이 묵과 채소를 덜어서 양념장에 무쳐가며 들도록 하면 다채롭겠다.”(동아일보 1971년 3월29일자, 윤서석) 비록 탕평채는 오래된 음식이지만, 그 면모는 시대마다 변신을 거듭해왔다. 1970년대 중반 경제발전이 속도를 내면서 서울 강북의 한정식 요정에는 날마다 정치가·경제인·고위공무원들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 그 와중에 탕평채는 교자상 위에서 한국음식을 상징하는 위상을 잡았다. 그것도 영조와 정조의 이름을 안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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