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성적 연예인을 ‘상식 문제아’로 희화화…그 웃음 소비 온당한가

위근우 칼럼니스트

추석연휴 ‘옥탑방의 문제아들’…김숙·송은이를 ‘불평등 캐릭터’로 섭외한 KBS

추석연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출연자들이 퀴즈를 푸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출연자 김숙·송은이는 최근 탁월한 기획자이자 예능 MC로 각광받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에선 ‘뇌극빈자’로 표현된다.  KBS 화면 갈무리

추석연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방영된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출연자들이 퀴즈를 푸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출연자 김숙·송은이는 최근 탁월한 기획자이자 예능 MC로 각광받고 있지만, 이 프로그램에선 ‘뇌극빈자’로 표현된다. KBS 화면 갈무리

상식적 추론으로 답 찾는 퀴즈쇼
5명 출연…문제 모두 풀어야 퇴근

한쪽선 ‘김·송 교양 수준 추앙’ 속
다른 쪽선 ‘뇌극빈자 캐릭터’ 요구

방송국의 분열적 행태 이해 안돼
위화감을 진정 느끼지 못했을까

지난 추석, 여전한 성불평등을 보여준 건 여성들을 갈아넣어 만든 차례상만은 아니었다. 연례행사처럼 지상파 3사는 추석연휴를 맞아 예능 파일럿 프로그램을 선보였고, 이들 중 상당수는 또 여전한 성비 불균형 문제를 드러냈다. 정규 편성이 확정된 SBS <빅픽처 패밀리>는 연예계 사랑꾼이라 불리는 애처가 네 명이 통영에서 일주일 동안 일반인들을 위한 사진을 찍어주는 형식이었다. 무례함을 유머 코드로 사용하는 다수의 남성 방송인들과 비교해 차인표, 류수영 등의 상냥한 모습을 보는 것은 상대적으로 마음 편한 일이지만, 왜 그들이 사진을 찍는지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으며, 그들이 애처가라는 캐릭터로 정규 예능 멤버가 될 동안 결국 그들의 아내를 포함한 여성의 자리는 TV에서 볼 수 없다. 우연이겠지만 <빅픽처 패밀리>가 정규 편성되면서 <백년손님 자기야>는 종영되었으며 최고의 여성 MC 중 하나인 김원희도 방송 한 편을 잃었다. MBC <독수공방>도 마찬가지다. <빅픽처 패밀리>에도 출연한 박찬호를 비롯해 네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 멤버 이수현으로 이뤄진 성비는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모두들 공방의 동등한 일원인 와중에 가장 어린 멤버인 이수현만 김충재에게 수련받는 동생 포지션으로 소비된 것도 나쁜 의미로 전형적이다. 이는 유부남 넷에 굳이 어린 걸그룹 멤버 김세정을 끼워 넣은 <빅픽처 패밀리>도 마찬가지다. 이 두 프로그램에 비해 KBS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성비도 남성 셋에 여성 둘로 그나마 가장 낫고 무엇보다 현재 가장 핫한 듀오인 김숙과 송은이가 출연했다는 점에서 나머지 둘과 확연히 구분된다. 하지만 정작 이 듀오를 활용하는 방식에 있어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앞의 두 프로그램의 명백한 성비 불균형과는 또 다른 은밀한 방식으로 불평등을 반복한다.

<옥탑방의 문제아들>의 형식은 단순하다. 출연자 다섯 명이 밤에 옥탑방에 모여 정해진 숫자의 문제를 다 풀면 퇴근할 수 있다. 문제 난이도는 KBS <1대100> 유의 일반 퀴즈쇼 수준으로 쉽게 맞힐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머리를 맞대 상식적인 추론을 하면 어떻게든 답을 구할 수는 있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꽤 재밌는 편이다. 하지만 제작진은 굳이 여기에 불필요한 콘셉트를 덧붙인다. 공식 소개를 보자. “상식이라곤 1도 없을 것 같은 일명 상식 문제아들이 10문제를 풀어야만 퇴근할 수 있는 옥탑방에 갇혀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지식토크쇼 프로그램.” 다시 말해 그냥 퀴즈쇼가 아니라 평균 이하의 상식을 지닌 문제아들이 답을 쉬이 맞히지 못하는 모습을 예능 요소로 삼겠다는 기획 의도다. 근래 가장 비슷한 예로는 MBC <무한도전> ‘바보전쟁’ 특집에서 ‘뇌순남, 뇌순녀’라는 이름으로 솔비, 홍진경, 심형탁 등을 모아 퀴즈쇼를 벌인 바 있다. 일반 퀴즈쇼가 답을 맞히거나 맞히지 못하는 과정의 긴장감에 방점이 찍힌다면, 이런 기획에선 오답과 이를 통한 출연자 희화화가 재미의 요소가 된다. 누군가의 무지를 희화화하는 ‘지식토크쇼’라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의심스러운 기획이다. 심지어 여기에 김숙과 송은이가 섭외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단순히 김숙과 송은이가 상식 문제아라는 이름으로 섭외되는 게 부당하다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물론 현재 가장 주목받는 기획자이자 교양 있는 예능 MC인 송은이와 이미 온스타일 <뜨거운 사이다>와 KBS Joy <연애의 참견>에서 패널로서 날카로운 통찰력을 자랑한 김숙을 ‘브레인으로 위장한 뇌빈자’, ‘자타공인 뇌극빈자’ 따위의 표현으로 수식하는 건 모욕적인(그들이 모욕감을 느꼈느냐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동시에 시대착오적이다. 당장 자사 프로그램인 <대화의 희열>에서 소위 지식인 남성이라 할 유희열, 김중혁 등이 첫회 게스트인 김숙이 일으킨 문화 변동의 여파에 대해 ‘숙이점’이라는 말로 조금은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상찬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팟캐스트에서 혐오 발언을 쏟아냈던 장동민이 tvN <더 지니어스> 우승 타이틀로 여전히 ‘갓동민’, ‘개그계 뇌섹남’으로 불리지만 <대화의 희열>에서 타인을 희화화했던 개그 방식에 대해 자성하고 좀 더 올바른 방향을 고민하는 김숙의 태도야말로 다분히 지성적이다. 한쪽에선 그를 지적이고 진지한 인터뷰이로 추앙하면서 다른 한쪽에선 ‘뇌극빈자’ 캐릭터를 요구하는 KBS 예능국의 행태는 분열적이다. 시대의 변화를 아직도 감지하지 못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여성 예능의 새 지평을 탐구하는 지적인 듀오를 기껏 섭외해 흔한 ‘무식한 개그맨 캐릭터’로 소비하면서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진정 무지한 건 누구인가?

하지만 이것은 무식을 통한 웃음이 남성 연예인들에게만 허용된 일종의 권력형 개그였다는 한국 예능의 맥락을 따져볼 때 더더욱 기만적이다. 사실 예능인의 무지를 희화화하는 예능은 질리도록 봐왔다. <무한도전>에서 하하는 받아쓰기 시험을 봤으며, KBS <해피선데이> ‘1박2일’에서 이수근은 답이 ‘마이동풍’인 문제에 대해 ‘마이 아파’라고 답했다. 웃겼고, 웃었으며, 그 관대함 속에서 무지는 차라리 과시적인 요소가 되었다. 그리고 무식 자랑이 웃음의 요소로 소비되는 것이 온당하냐는 당연한 질문을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안중근 사진을 알아보지 못한 AOA 설현과 지민이 기자들 앞에서 눈물의 사과를 했던 것을 기억한다. 무식을 드러내고 스스로를 희화화하며 일종의 캐릭터로 소화하고 인기를 누려도 되는 것은 남성들에게만 허용된 것이었다. 당장 <옥탑방의 문제아들>의 다른 두 멤버 김용만과 정형돈을 보라. 올해 MBN 교양 예능 <책잇아웃-책장을 보고 싶어>에 MC로 섭외됐던 그들은 적벽대전은 누구의 싸움이냐는 질문에 “왜 싸워 사이좋게 지내야지”(정형돈)라고 답하거나, 페이소스가 뭐냐는 질문에 “소스 이름이겠지”(김용만)라고 답하면서도 하등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북클럽을 운영하며 <옥탑방의 문제아들>에서도 소설과 작가 이름을 바로 연결해 맞히던 송은이와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최소한의 교양을 준비할 의욕도 책임감도 없이 무식 자랑을 벌이던 그들이 쉽게 교양 예능 MC를 맡는 것이 한국 예능의 현주소이며 성불평등의 기울기를 증명한다.

[위근우의 리플레이]지성적 연예인을 ‘상식 문제아’로 희화화…그 웃음 소비 온당한가

최근 tvN <신서유기> 시즌 5에서 새 멤버 블락비 피오는 박혁거세가 세운 나라 이름을 “중국”이라 답해 논란이 됐다(눈물의 기자회견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동안 남자들끼리 낄낄대며 무식을 과시하고 독점하다가 이 지경까지 왔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여성에게 훨씬 엄혹한 세상에서 살얼음판을 디디듯 지금껏 커리어를 이어와 현재 가장 잘나가는 듀오가 된 여성 연예인들을 불러와 너희도 우리와 같은 부류라며 무식 배틀의 일원으로 삼으려 한다. 그래서 <옥탑방의 문제아들>은 그럭저럭 치우치지 않은 성비와 김숙·송은이 콤비의 섭외에도 불구하고 결코 <빅픽처 패밀리>나 <독수공방>보다 올바르거나 평등한 예능이라고 보기 어렵다. 단순히 여성을 스테레오타입으로 소비하는 것을 넘어, 그동안 시대의 흐름 앞에서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며 가장 동시대적 예능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여성 듀오의 지성을 후려치고 희화화하는 것은 동등한 대우가 아닌 남성 중심 예능에 맞춘 하향평준일 뿐이다. 그게 이번 추석, 공영방송 KBS가 한 짓이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