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딱정벌레, 말파리 이름에 히틀러, 비욘세가 왜 나와

이혜인 기자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

스티븐 허드 지음·조은영 옮김|김영사|328쪽|1만7800원

퀴비에의 가젤.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조르주 퀴비에의 이름을 땄다. 하지만 퀴비에는 인종차별적 견해를 옹호한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Emily S. Damstra

퀴비에의 가젤. 과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조르주 퀴비에의 이름을 땄다. 하지만 퀴비에는 인종차별적 견해를 옹호한 과학자로도 유명하다. ⓒEmily S. Damstra

Magnolia grandiflora라는 학명을 가진 태산목. 피에르 마뇰의 이름을 땄다. ⓒEmily S. Damstra

Magnolia grandiflora라는 학명을 가진 태산목. 피에르 마뇰의 이름을 땄다. ⓒEmily S. Damstra

히틀러의 딱정벌레, 데이비드 보위의 거미, 루시우스 말포이의 말벌…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유명인사들이 키운 애완 곤충을 의미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답은 ‘곤충의 이름’이다. 각기 다른 생물종에는 세계에서 공통으로 사용하는 공식적인 이름, ‘학명’이 있다. 히틀러의 딱정벌레라는 뜻의 ‘아놉탈무스 히틀러리(Anophthalmus hitleri)’는 새로운 딱정벌레종을 발견한 오스트리아의 곤충학자 오스카어 샤이벨이 지은 이름이다. 샤이벨은 실제로 히틀러를 숭배했다. 아놉탈무스 히틀러리를 발표하는 논문에 “아돌프 히틀러 수상을 숭배하며 이 이름을 바칩니다”라는 구절을 적은 것을 보면 말이다.

과학의 세계가 건조하고 가치 중립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선입견이다. 히틀러의 딱정벌레에서 볼 수 있듯이 학명에는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과학자의 주관적 견해가 묻어 있다. 어떤 과학자들은 새로운 종에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나 사랑하는 연인의 이름을 붙였다. 또 어떤 과학자들은 자신이 싫어하는 과학자를 모욕하기 위해 학명으로 ‘디스전’을 벌이기도 했다. <생물의 이름에는 이야기가 있다>는 책의 부제처럼 ‘생각보다 인간적인 학명의 세계’를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인 스티븐 허드는 캐나다 뉴브런즈윅대학교 생물학과 교수로, 학명에 녹아 있는 과학사의 감동적이거나 불명예스러운 이야기를 맛깔나게 전한다.

생물에 이름을 붙이고 체계적인 목록을 작성하려는 시도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근대 학자들은 종의 특징을 설명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다보니 학명이 두세 줄을 넘어가는 경우도 흔했는데, 부르기도 불편했을뿐더러 신종이 추가될수록 이름이 복잡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정리한 것은 18세기 스웨덴의 저명한 식물학자 칼 폰 린네다. 그는 종의 이름을 오로지 식별을 위한 일종의 라벨로 기능하도록 정의했다. 그가 고안한 이명법(二名法)에 따르면 모든 종은 각각 한 단어로 된 속(屬·진화적으로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종이 모인 집단)과 종(種)이 조합된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인간의 학명인 ‘호모 사피엔스’는 호모속에 속하는 사피엔스종이라는 의미다.

게리 라슨의 이(Strigiphilus garylarsoni)라는 학명을 가진 이. 만화가 게리 라슨의 이름을 땄다. 출처/위키피디아 (cc by 4.0)

게리 라슨의 이(Strigiphilus garylarsoni)라는 학명을 가진 이. 만화가 게리 라슨의 이름을 땄다. 출처/위키피디아 (cc by 4.0)

데이비드 보위의 거미(Heteropoda davidbowie)라는 이름을 가진 거미.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이름을 땄다. 출처/CC BY-SA 4.0

데이비드 보위의 거미(Heteropoda davidbowie)라는 이름을 가진 거미. 가수 데이비드 보위의 이름을 땄다. 출처/CC BY-SA 4.0

저자는 “린네가 발명한 이명법은 학명이 종을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과학자들에게 더욱 창조적인 세계의 문을 열어주었다”고 설명한다. 새로운 종 또는 속의 이름은 과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최소한의 근거와 함께 문헌으로 출판돼야 하며, 현대식 라틴 알파벳으로 쓰일 것 등 몇 개의 규약들만 충족하면 최초 발견자들이 자유롭게 지을 수 있다. 현재까지 기재된 종 수는 약 150만종이다.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는 못하지만 중복으로 지어진 학명까지 고려하면 대략 300만개의 학명이 존재한다.

학명은 종의 외형·특성을 따거나, 서식처를 의미하는 경우가 흔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자신이 새로 발견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다른 이의 이름을 가져오는 방법을 택했다. 2011년 새로 발견된 말파리의 이름에는 미국의 유명 팝가수 비욘세의 이름을 따서 ‘스캅티아 비욘세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몇몇 과학자는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 등장인물의 이름을 가져왔다. 소설 속에서 해리포터를 괴롭히는 동급생인 루시우스 말포이의 이름을 딴 말벌 ‘루시우스 말포이이’, 호그와트 기숙학교의 선생님인 세베루스 스네이프의 이름을 딴 갑각류 ‘해리플락스 세베루스’ 등이다. 유명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원작소설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의 등장인물 이름을 딴 심해벌레와 말벌도 있다. 유명인의 이름을 빌린 학명은 “종의 발견과 계통분류학을 시답잖은 장난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비판과 “무엇이든 분류학에 대중의 관심이 쏠리게 하려는 시도”라는 엇갈린 평을 받는다.

내가 발견한 것이니까 내 이름을 붙이면 안 될까. 그런 사람이 없진 않지만, 자기 이름으로 명명하는 것은 학계에서 심한 결례로 여겨진다고 한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신이 발견한 신종에 다른 과학자의 이름을 붙여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곤 한다. <종의 기원>을 쓴 영국 생물학자 찰스 다윈의 이름을 따온 학명이 가장 많다. 다윈을 기념하는 이름은 363종, 26속으로 추정된다. 17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여성 과학자 마리아 지뷜라 메리안의 이름도 나방, 도마뱀, 거미 등 각종 동식물의 이름 속에 녹아 있다. 당시 학자 대부분이 알에서 성체로, 다시 알로 태어나는 곤충의 변태 과정 대신 곤충의 자연발생설을 믿었다. 메리안은 알과 애벌레를 수집해 먹이식물 위에서 키우며 발달 과정 전체를 관찰하고 단계별 그림을 남겨 많은 과학자가 발상의 전환을 하도록 도왔다. “명명은 명명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존경 행위”다.

동료를 존경하고 기린 과학자만 있겠는가. 동료를 깎아내리고 비난하기 위해 학명을 지은 과학자들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명명법을 고안한 린네도 그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분류 체계에 신랄한 비판을 가한 요한 지게스베크라는 프로이센 식물학자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작고 끈적거리며 유난히 꽃이 작은 잡초에 ‘지게스베키아 오리엔탈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두 사람은 평생 원수처럼 지냈다고 한다. 엘사 바르부리와 오르바르 이스베리라는 무척추동물 고생물학자들은 못생긴 외형을 가진 삼엽충과 홍합에 서로의 이름을 붙이면서 치열한 디스전을 펼쳤다.

책은 그저 재미있는 일화들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학명 속에 숨어 있는 과학계의 젠더 불평등도 짚는다. 수많은 종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 박물학자와 탐험가들을 위해 명명됐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좋은 가문이라는 배경 특권을 지닌 백인 남성이었다. 대형 식물 속인 알로에속의 학명 관련 논문을 보면 사람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총 278종 중 87%가 서양의 백인 남성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저자는 “틀림없이 이것은 여성이 과학에 몸담을 기회가 오랫동안 배제되었고 많은 학명이 이러한 배제가 유난히 엄격했던 수십년 또는 수백년 전에 지어졌다는 사실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이 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도 학명에 새겨져 있다. 찰스 폴 알렉스 알렉산더는 전 세계 각다귀의 3분의 2 이상을 조사하고 이름 붙인 20세기의 박물학자다. 그의 아내 메이블 마르게리트 알렉산더는 남편의 모든 연구 현장에 함께하며 수집된 각다귀를 정리하고, 목록을 작성했다. 알렉스는 14종에 아내의 이름인 메이블 혹은 별칭인 마르가리타를 붙였다. “이 독특한 종은 사랑하는 아내이자 평생 각다귀과 연구를 함께한 협력자를 기념하기 위해 명명했다”는 헌사를 바치기도 했다. 알렉스의 제자인 크리스 톰프슨은 이 부부가 사망한 후 발견한 꽃등에에 ‘메이블의 꽃등에’라는 의미의 ‘케파 마르가리타’라는 이름을 붙였다.

저자가 길고 긴 학명 이야기를 쓴 이유는 재미와 감동을 전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저자는 “지구의 생물다양성은 신약 발견, 화학 살충제를 쓰지 않는 작물 재배, 그 밖에 많은 것들의 열쇠를 쥐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 생물다양성은 알려진 것이 없다”며 아쉬움을 표한다. “종 발견은 우주 탐사나 생물 의학 연구처럼 매력적인 과학으로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 또한 신종 발견은 공공의 자금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 분야로 여겨져야 한다”는 메시지도 귀기울일 만하다.

딱정벌레, 말파리 이름에 히틀러, 비욘세가 왜 나와[책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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