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최초의 여성 작곡가” “오페라의 기원 창작” 100% 동의할 순 없어도 100% 부정할 자도 없다

문학수 선임기자

성인 힐데가르트

영화 <위대한 계시>에서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페르소나인 바르바라 주코바가 힐데가르트 수녀 역(왼쪽)을 맡았다. 그의 비서이자 속기사였던 폴마르 신부 역에는 하이노 페르흐가 출연했다.

영화 <위대한 계시>에서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페르소나인 바르바라 주코바가 힐데가르트 수녀 역(왼쪽)을 맡았다. 그의 비서이자 속기사였던 폴마르 신부 역에는 하이노 페르흐가 출연했다.

12세기의 어느 위대한 수녀

일고여덟 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어딘가로 가고 있다. 소녀는 아버지에게 안겨 말을 탔고 어머니는 또 다른 말 위에 앉았다. 일가족이 어딘가로 이동 중이다. 차림새로 보건대 귀족 가문이다. 아버지와 딸, 그리고 어머니를 몇 명의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다. 일행 가운데 아무도 웃거나 말하지 않는다. 엄숙하고 경건한,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 모를 두려움이 느껴지는 침묵 속에서 중세의 현악기 비엘이 연주하는 선율만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영화 <위대한 계시>의 첫 장면이다. 고개를 넘자 울창한 숲 너머로 고풍스러운 수도원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의 원제는 ‘Vision - Aus dem Leben der Hildegard von Bingen’이다. 독일어 ‘Vision’은 ‘환상’ ‘환영’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겠으나 종교적 의미를 부각해 ‘계시’로 번역한 듯하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삶으로부터’라는 부제는 왠지 묵직한 느낌과 더불어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독일의 감독 마르가레테 폰 트로타(1942~ )가 2009년 만든 영화다. 한국에서 다소 생소한 그는 배우로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고, 1970년대 ‘뉴 저먼 시네마’의 흐름 속에서 감독으로 입문했다. 첫 연출작은 남편이었던 폴커 슐뢴도르프(1939~ )와 함께 만든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로 기록돼 있다. 영화 애호가들은 슐뢴도르프의 이름을 듣는 순간 <양철북>이 금세 떠오를 텐데, ‘감독 부부’는 20년간 같이 살다가 1991년 이혼했다.

트로타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테마가 있다. ‘좌파’와 ‘여성주의’가 그것이다. 이 두 개의 테마가 한데 녹아든 대표작으로는 <로자 룩셈부르크>(1986)가 있다. 트로타는 이 영화에서 “동지는 여성들을 위해 일하시오”라는 지도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혁명의 핵심사업으로 뛰어드는 ‘붉은 로자’를 그려낸다. 이렇듯이 ‘진보적인 여성’에 천착해온 트로타의 영화 중에서 비교적 최근작으로는 <한나 아렌트>(2012)가 있다. 제목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한나 아렌트>는 일종의 ‘평전(評傳) 영화’인데, 앞서 거론한 <위대한 계시>도 마찬가지다. ‘힐데가르트 폰 빙엔의 삶으로부터’라는 부제가 설명하듯 이 영화는 12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어느 위대한 수녀’에 관한 이야기다. 힐데가르트는 자신의 이력이나 감정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아 여전히 많은 부분이 안개에 가려져 있지만, 다행스럽게도 베네딕토회의 수도승 테오데리히 폰 에흐터나흐(Theoderich von Echternach)가 <힐데가르트의 생애>(1185)라는 평전을 남겨 오늘까지 전해진다. 영화 <계시>는 평전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스크린으로 옮겼다.

물론 약간의 허구도 엿보인다. 수도원에 딸린 작은 수녀원에서 살아야 하는 소녀는 작별을 고하는 어머니에게 “나를 혼자 두지 말아요”라고 외친다. 다행히도 자애로운 수녀 유타(1091~1136)를 스승으로 만나 수녀원 생활의 고단함을 견뎌낸다. 소녀를 위로해준 사람은 또 있었다. 스승과 이름이 같은 유타, 힐데가르트와 같은 운명을 지닌 동갑내기 친구였다. 우리로 치자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의 두 소녀는 아련하게 들려오는 본당 수사들의 성가를 들으면서 딱딱한 침대 위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그렇게 서로를 의지했던 둘의 우정이 흔들린 것은 30년이 흘러서다. 스승이 선종하면서 수녀원장 자리를 힐데가르트에게 맡기겠다고 유언한다. 하지만 전체 수녀들의 투표가 남아 있다. <힐데가르트의 생애>는 이 과정에서 수녀들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고 기록했으나, 영화는 약간의 심술을 부린다. 투표가 끝나고 봉인된 함을 열자 ‘찬성의 흰 구슬’이 가득한 가운데 딱 하나의 검은 구슬이 눈에 띈다. 유타의 구슬이었다.

힐데가르트가가 남긴 3편의 저작

힐데가르트 폰 빙엔은 누구인가. 영화 <위대한 계시>가 그리고 있듯이 베르머스하임(Bermersheim)의 귀족 가문에서 1098년 태어난 그는 여덟 살에 수녀원에 들어섰다. 오늘의 시선에서 보자면 어린 아동의 수도자 지원은 곤혹스럽고 극단적이다. 열다섯 살에 서원을 하면 평생을 신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에 대한 각오는 수도원에 첫발을 내디딜 때부터 이미 확고해야 했다. 말하자면 부모형제와의 이별이었으며 삶의 근거와 방향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그 상황을 일종의 ‘유폐된 삶’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중세의 풍습과 시선은 달랐다. 적어도 당시의 수도원은 지체 있는 가문의 자식들에게만 허락되는 학교였다. 농부나 수공업자의 자식들은 아예 갈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듯이 수도원과 그에 딸린 수녀원이 세속으로부터 완전히 은폐된 공간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물론 과도기였다. 비슷한 시기에 교육의 중심은 주교좌 대성당의 부설학교로 이동하고 있었으며, 이른바 ‘최초의 대학’들도 하나둘씩 생겨나고 있었다.

수도원에 딸린 작은 은수처에서 힐데가르트가 받았던 교육을 수준 높은 것이었다고 말하긴 어렵다. 다양한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던 대성당 부설학교의 지적 풍토에 비하면 낙후한 가르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오늘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렇다. 힐데가르트가 스승 유타에게 받았던 교육은 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것이었다. 노래 부르기와 수공예도 배웠다. 힐데가르트는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지적인 면모’와 거리가 있었다. 당시 신학과 철학의 주류였던 스콜라학파의 이성적이고 논증적인 태도에는 거의 적대적이었다. 스승의 뒤를 이어 수녀원장의 직분에까지 오른 그는 읽을 수는 있었으되 쓰기에는 서툴렀다. 아예 못 쓰지는 않았으나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은 구사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보니 이 지점에서 우리는 그가 남긴 세 편의 저작들이 어떻게 쓰였는지 다소 의아해질 수밖에 없다. 중세의 영성가였던 힐데가르트는 <쉬비아스>(Scivias, 길을 알라), <책임있는 인간>(Liber Vitae Meritorum), <세계와 인간>(Liber Divinorum Operum) 등의 저작을 남겼는데, 이 모두가 신의 계시를 글로 옮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 힐데가르트는 신과 교감하는 신비를 빈번히 체험했다. 환시를 보았고 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을 말로 표현했고 누군가 받아 적었다. 앞서 언급한 영화에서도 그렇다. 폴마르(Volmar) 신부가 구술을 받아 적는다. 실존 인물이었던 그는 힐데가르트의 ‘비서’ 혹은 ‘속기사’로 불린다.

힐데가르트의 영성을 대변하는 세 편의 저작을 가톨릭에서는 매우 귀하게 여긴다. 특히 환경과 생태를 중시하는 그룹에서는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이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짧은 지면에서 그 내용을 일일이 소개하긴 어렵다. ‘비전 3부작’으로도 불리는 이 세 편 중에서 <세계와 인간>(정홍규 신부 옮김, 분도출판사, 2011)이 한국어로 번역돼 있는데, 이용훈 주교(천주교 수원교구장)는 책의 추천사에서 “전체적인 단일성 안에서 인간과 우주와 하느님이 유기적 관계에 있음”을 설파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비신자의 입장에서 독해하자면, 복종과 징벌의 관계를 뛰어넘어 대화하는 관계임을 밝히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세’라는 시대적 제약 속에서 인간의 가치에 주목했다는 맥락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울러 주교께서 표현하신 ‘우주’를 ‘자연’으로 바꿔 읽는다 해도 크게 혼나지는 않을 성싶다. 어떤 이들은 힐데가르트의 ‘신비 체험’ 자체에만 주목하면서 샤먼, 혹은 시빌라(Sibylla, 무녀 혹은 예언자)에 빗대기도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설파한 내용과 메시지일 것이다. 그는 신과 인간, 자연을 별개로 나누지 않았다. 영혼과 몸을 둘로 쪼개지 않았다.

음악극 ‘오르도 비르투툼’의 재조명

중세의 음악극 <오르도 비르투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율과 화성을 구사한다. 오페라(혹은 오라토리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세의 음악극 <오르도 비르투툼>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율과 화성을 구사한다. 오페라(혹은 오라토리오)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앞서 언급한 영화는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기도 한다. ‘음악가 힐데가르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아서다. 페니미스트를 자임하는 트로타 감독은 가톨릭 교회의 강고한 가부장적 분위기 속에서 힐데가르트가 어떻게 싸웠고 승리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관점도 물론 틀리지 않는다. 그 지점은 분명히, 오늘날 우리가 그의 생애를 반추하면서 감명받을 수밖에 없는 포인트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그를 협애한 울타리에 가두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힐데가르트의 81년 생애는 훨씬 많은 것을 포괄하면서 신앙과 철학, 그리고 예술이 한 인간의 지성 속에서 어떻게 통합적으로 실현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 바탕에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이 깔려 있음은 물론이다.

힐데가르트는 영혼만을 지순한 것으로 보았던 시대에 육신의 중요성을 설파한 ‘몸의 철학자’였다. 광장에서 설교하던 민중의 성직자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수녀원을 찾아오는 이들을 돌봐주던 의사였다. 그는 수녀들을 이끌고 들판에 나가 약초를 채집하거나 직접 재배해 치료에 활용했다. 라인강의 물고기들을 관찰했다.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비전 3부작’을 비롯한 자신의 저서에 수많은 삽화를 그려넣었던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탁월한 음악가였다. 그는 적어도 일흔일곱 편의 음악을 남겼다. 전해지는 것만 그렇다. 그 모든 음악의 가사를 직접 쓰고 곡을 붙였다.

그중에서도 오늘날 뜨겁게 조명받는 작품은 음악극 <오르도 비르투툼>(Ordo Virtutum)이다. 라틴어 ‘오르도’(Ordo)는 ‘순서, 질서, 열(列)’의 뜻이고 ‘비르투툼’(Virtutum)은 ‘선함, 미덕, 뛰어남’ 등으로 옮길 수 있다. 그래서 이 음악극의 제목을 ‘성덕의 열’ ‘덕들의 원무(圓舞)’ 등으로 번역한다. 한데 어감이 쉽게 와닿지는 않는다. 비신자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이 글귀에서 ‘비르투툼’을 덕(德)이라는 추상명사의 복수형보다는 ‘신을 좇는 무리’로 해석하면 좀 더 뚜렷해진다. 실제로 공연을 본다면(약 70분. 구글에서 동영상을 검색해 볼 수 있다) 의미가 더욱 명료해진다. 이 알레고리적 음악극은 간단히 말해 덕과 악덕(惡德)의 대결, 종국에는 덕이 승리한다는 내용을 담은 ‘도덕극’(선악의 싸움을 표현한 교훈극)이다. 남성 1인(신부)이 ‘악덕’을 연기하고 여러 여성들(수녀들)이 ‘덕’의 역할을 맡는다.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매우 단순하다. ‘덕’은 성스럽고 겸손한 모습으로, ‘악덕’은 새된 소리를 꽥꽥 내지르는 비열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이 음악극을 그렇고 그런 옛날 작품으로만 치부한다면 오산이다. 감히 말하건대 <오르도 비르투툼>은 지금 들어도 황홀하다. 세련된 장식음들로 성악의 매력을 아낌없이 발산하는가 하면, 당시의 그레고리오 성가에 비해 훨씬 넓은 음역을 오가면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창출한다. 감정의 표현도 과감하다. 멜로디를 동어반복하는 소절도 거의 없다. 중세 성가의 규칙이었던, 병행하는 선율의 완벽한 대칭마저도 거리낌없이 내던지고 과감한 화성을 구사한다. 중세에 이토록 생동감 넘치는 음악을 썼다는 사실이 경이롭다. 어쩌면 힐데가르트가 엄격한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서구의 음악사(音樂史)는 ‘힐데가르트’라는 이름을 외면했다. 어쩌면 의도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권위 있는 음악사 서술로 손꼽히는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는 ‘중세의 작곡가 힐데가르트’를 약 1.5페이지 분량으로 소개한다. <오르도 비르투툼>에 대해 “82개의 노래로 구성된 종교적 음악극”이라며 “예언자들, 덕들, 행복한 영혼, 불행한 영혼, 참회하는 영혼 같은 비유적 배역들이 등장하는 일종의 도덕극”이라고 설명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재조명되면서, “(힐데가르트는) 교회 단성 음악 분야에서 가장 많은 음반이 만들어지고 가장 많이 알려진 작곡가가 되었다”고 부연한다.

물론 더 나아가는 평자들도 있다. 예컨대 독일의 음악저술가 에바 바이스바일러(1951~ )는 힐데가르트를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 설명하지만 학술적으로 엄밀하다고 보긴 어렵다. <오르도 비르투툼>을 “오페라의 효시”로 바라보는 일각의 시선도 과장스럽긴 매한가지다. 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 중세의 음악극이 ‘오페라(혹은 오라토리오)의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오르도 비르투툼>은 400년 세월이 흐른 뒤, 이탈리아 작곡가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의 음악극 <영혼과 육체의 표상>(Rappresentatione di Anima e di Corpo)으로 리바이벌된다. 수녀이자 의사, 그리고 작곡가였던 힐데가르트는 1179년 선종했고, 2012년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①“최초의 여성 작곡가” “오페라의 기원 창작” 100% 동의할 순 없어도 100% 부정할 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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