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작가 “전기 쓰다 세 번 죽을 고비…지금 삶은 덤이죠”

박주연 기자

<간송 전형필> 시작으로

지금까지 총 8편 출간

국내 전기문학 지평 열어

이충렬씨는 “전기는 자료와의 싸움”이라며 “자료가 풍성해야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자료가 많아야 독자들이 흥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 인물을 복원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되게 즐겁다”고 했다.  / 김창길 기자

이충렬씨는 “전기는 자료와의 싸움”이라며 “자료가 풍성해야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자료가 많아야 독자들이 흥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 인물을 복원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되게 즐겁다”고 했다. / 김창길 기자

이충렬씨(68)는 ‘전기문학’의 불모지와 다름없던 국내 현실에서 ‘오아시스’ 같은 인물이다. 8만부가 판매되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된 <간송 전형필>을 2010년 출간한 이래, 삶이 아름다웠던 인물들을 엄선해 치밀한 취재와 맛깔스러운 스토리텔링으로 생애를 온전히 엮어냈다.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2012),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2013), <아, 김수환 추기경>(2016), <국제법학자, 그 사람 백충현>(2017), <아름다운 사람 권정생>(2018), <천년의 화가 김홍도>(2019), <신부 이태석>(2021)이 간송의 뒤를 이었다. 오는 7월에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신부이자 순교 성인인 김대건 신부의 전기를 펴낸다.

그는 45년의 세월을 이민자로 살았다. 글쓰기는 고단한 이민자의 삶에 위안이 됐다. 지난 3월 29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의 봄햇살은 따뜻했다. 이충렬씨는 깔끔한 정장에 중절모를 쓴 채 나타났다. 그는 시종 환한 얼굴로 전기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냈다.

이충렬씨가 전기를 썼던 미국 애리조나주 노길레스의 잡화점 / 이충렬씨 제공

이충렬씨가 전기를 썼던 미국 애리조나주 노길레스의 잡화점 / 이충렬씨 제공

<김대건 신부>(가제) 집필 끝…교열 보는 중
‘옆구리신공’으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발견

-<김대건 신부>(가제) 집필은 끝났습니까.

“집필은 끝났고, 현재 1교(교열)를 보고 있어요.”

-왜 김대건 신부의 일대기를 쓸 생각을 했나요.

“김수환 추기경님에 대한 전기를 쓰면서 김 추기경님의 조부님이 천주교 순교자임을 알게 됐어요. 순교자 이야기를 다뤄볼까 해서 서울대교구 소속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신부님과 연구이사님을 찾아가 상의했죠.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정본 전기로 만들어보라고 추천하더라고요.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 자료가 참 적어요. 일대기 공백을 어떻게 메울지, 200년 전 한국 천주교사를 어떻게 공부할지 고민하면서 한국교회사연구소가 소장한 자료를 샅샅이 뒤졌어요.”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많이 발굴했습니까.

“어린 시절의 공백은 물론이고, 신부님이 마카오에서 8년간 어떤 교재로 공부했는지, 어떻게 라틴어를 익혔는지, 또 어떻게 신부가 됐는지에 대한 자료를 다 발견했어요. 김대건 신부님은 열다섯 살 때 마카오에 가서 8년간 신학교를 다녔고, 신의주를 통해 귀국했다가 다시 상해로 가서 주교님과 신부님 한분을 모시고 들어옵니다. 그 과정의 세부 이야기를 마카오의 스승 신부님들의 자료 등을 보면서 알아냈어요. 어렴풋하게나마 뭘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한두줄씩 나오거든요. 이런 걸, 옆구리신공이라고 합니다(웃음).”

-옆구리신공이오.

“우회로를 통해 알아낸다는 거죠(웃음). 친구, 동창, 스승, 후배들의 기록을 뒤져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한줄이라도 찾아내는 겁니다. 그걸 취합한 후 꿰어맞추는 거죠. 그다음에 200년 전 교우촌(천주교인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박해 시기에 산간벽지에 조성한 천주교공동체)에서 몰래 생활했는데 당시 생활상과 언어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박해는 어떻게 피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다행히 1800년대 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윤의병(바오로) 신부가 쓴 소설 <은화>로부터 도움을 받았습니다.”

전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화하기 전에 작가의 역사가 궁금했다. 작품은 결국 작가를 담는 그릇이니까. 이충렬씨는 이민자였다. 아버지가 중소기업을 운영해 어린 시절에는 부유하게 살았다. 1976년 아버지의 사업체가 무너지면서 온 가족이 파라과이로 농업이민을 떠났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단국대 국문학과 3학년 재학 때였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문학을 꿈꿨다. 가톨릭계인 동성중·고 시절 청계천 헌책방을 들락거리며 문학에 빠졌다.

-청계천 헌책방에서는 주로 어떤 책을 사 봤습니까.

“<삼국유사>, <삼국사기> 등 우리의 고전역사와 <한국단편문학전집>, <한국전후문학전집>과 카뮈, 사르트르 등 프랑스 실존주의 문학을 주로 읽었어요. 동네 사랑방처럼 우리 집에 와서 책을 읽거나 빌려간 친구들이 많았습니다(웃음).”

-가족이 향한 곳이 왜 남미지역이었나요.

“원래 계획은 미국이었는데,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파라과이로 가게 된 거예요. 그곳에선 희망이 없었어요. 이후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를 거쳐 1980년 3월에야 미국에 갈 수 있었어요.”

-고생이 많았겠군요.

“제가 2남2녀 중 맏이인데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에서는 유대인의 하청을 받아 6명의 가족이 오바로크와 미싱을 하며 겨우 먹고살았어요. 가내수공업이었죠. 에콰도르에서는 식당도 하고 신발도 만들었고요. 그렇게 힘들게 박박 긁어모은 돈으로 한사람당 1000달러씩 주고 관광비자를 받아 미국에 갔습니다. 캘리포니아주 LA에 정착했어요.”

-관광비자로 입국해 눌러앉은 건가요.

“2년간 불법체류자로 살았어요. 닭가공공장에도 다니고, 봉제공장에도 다녔어요. 아버지와 저, 남동생은 밤마다 남의 사무실과 병원 청소도 했고요. 저는 중매로 1981년에 결혼도 했어요. 영주권은 1982년 1월에 나왔습니다. 가족 모두가 허드렛일을 하며 악착같이 모은 돈으로 LA에서 1시간 떨어진 샌버나디노의 흑인 동네에서 식료품 가게를 열었죠.”

-집안사정상 문학은 사치였겠어요.

“가게에 침입한 강도가 제 머리에 총구를 겨눈 게 두 번이에요. 그런 일을 당하면 세상 살기가 싫어집니다. 자괴감과 함께 모국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지죠. 스스로를 지탱하기 위해 1980년 중반부터 교포 잡지에 가끔 글을 썼어요. 신문사 사람들과 문인들을 만나면서 좀 위안이 됐어요. 그러다 1992년 LA에서 4·29 흑인 폭동이 일어나 피해를 입고 식료품점을 정리했더니 수중에 5000달러가 남더군요. 그 돈으로 1993년 애리조나주로 이사해 멕시코 국경 작은 도시 노갈레스에서 잡화점을 열었습니다.”

그는 1994년 ‘실천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가깝고도 먼 길’로 등단했다. 주인공은 인민군 출신으로 휴전협정 때 중립국을 선택해 인도를 거쳐 아르헨티나에 정착한다.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의 길을 열어준다. 그는 고심 끝에 방북하지만, 동생이 자신의 형은 6·25전쟁 때 전사했다며 돌아온 형의 존재를 부정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허물어진다. 이충렬씨는 “아르헨티나에서 만난 중립국행 포로의 이야기에 방북 때 실제로 본 이산가족 이야기를 더해 작품을 썼다”고 말했다.

-방북은 언제 어떻게 이뤄진 건가요.

“1991년 월북 예술가의 흔적을 취재하고 싶어 방북했어요. 김기림, 백석, 이태준, 한설야, 박태원, 홍명희… 이런 분들이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궁금했거든요. 10일간 체류했는데 조선작가동맹에서 두 사람이 나와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홍명희 선생의 손자 홍석중씨는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눴고요. 당시 취재한 내용은 한겨레신문에 4차례에 걸쳐 기고했습니다. 이후 한겨레 통신원으로 1994년 김일성 사후의 북한과 1995년 대홍수 이후의 식량난 실상을 취재하기 위해 두차례 더 방북했어요.”

-전기작가는 어쩌다 된 겁니까.

“글을 써야 하는데 외국에 살다 보니 한국 실정에 어두웠어요. 그러면 시공간 제약을 덜 받는 역사소설을 써보자 생각했죠. 남인에서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를, 서인에서는 우암 송시열 계열인 겸재 정선을 같이 등장시키면 흥미롭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교 시절 우리 집에서 역사서를 열심히 읽다가 서강대 사학과에 진학하고, 이후 미술사학자가 된 친구 이원복(전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이야기했죠. 나를 간송미술관에 데리고 가더군요. 겸재 작품이 많다고요. 1995년 무렵이었습니다.”


이충렬씨는 2010년 <간송 전형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8편의 전기문학을 출간했다. 오는 7월에는 <김대건 신부>(가제)를 펴낸다. 전기물 외에 간송 집필 앞뒤로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2008)과 <한국 근대의 풍경>(2011)도 발간했다.  / 김창길 기자

이충렬씨는 2010년 <간송 전형필>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8편의 전기문학을 출간했다. 오는 7월에는 <김대건 신부>(가제)를 펴낸다. 전기물 외에 간송 집필 앞뒤로 <그림 애호가로 가는 길>(2008)과 <한국 근대의 풍경>(2011)도 발간했다. / 김창길 기자


“전기, 자료와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 아냐
자료 풍성해야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자료 많아야 독자들이 흥미 가져”

-그런데 공재와 겸재가 등장하는 역사소설이 아닌 간송 전형필의 전기를 냈네요.

“귀국할 때마다 간송미술관을 찾아갔어요. 간송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간송 전기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죠.”

-2010년 책이 출간되기까지 몇년이나 준비했나요.

“취재부터 집필까지 7~8년 걸렸어요. 자료조사를 하면서 공부한 기간이 꽤 길었거든요. 간송을 제대로 알려면 역사 공부가 필수입니다. 간송의 삶은 물론이고 청자 발달사부터 인사동 고서점, 활판 인쇄 심지어 일제강점기 때 도굴 상황까지 일일이 공부해야 했어요. 수집한 문화재에 얽힌 사연과 함께 어떤 것은 왜 기와집 10채 가격이고, 또 어떤 것은 기와집 20채 가격인지도 알아야 했고요.”

-방대한 작업이군요. 일의 순서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전기는 자료와의 싸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자료가 풍성해야 주인공이 살아 움직이고, 새로운 자료가 많아야 독자들이 흥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연보를 작성합니다. 세상을 떠난 날까지 주인공을 중심으로 일어난 중요 사건을 연도별, 월별, 일별, 시간별 순으로 먼저 작성한 후 그 안을 1~2년간 꾸준히 보강하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메우다 보면 한권 분량이 나오는 거군요.

“그렇죠. 처음에 200자원고지 30장 분량으로 시작했던 게 100장, 500장, 1000장, 3000장이 돼요. 연보작업이 700~1200매는 돼야 주인공의 윤곽이 비로소 나타납니다. 그러면 시대와 주인공을 제가 지배할 수 있게 돼요. 이후 중요한 대목을 뽑아 스토리를 만들고, 부각시킬 부분을 정하죠.”

-시대와 주인공을 지배한다는 게 어떤 뜻인가요.

“주인공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거죠. 또 전기를 쓰려면 주인공과 감정이입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잡화점의 장사가 좀 안 된 날에는 간송에게 감정이입이 안 돼 글이 전혀 안 써졌어요(웃음). 간송은 기와집 수십채 되는 돈을 투자해 문화재를 사들이는데, 제 주머니는 빈털터리니까…. 반면 장사가 잘 된 날은 글도 자신감 넘치게 질러지더라고요. 그런데 감정이입을 열심히 하다 보면 놀라운 일이 생겨요.”

-어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자료가 툭 튀어나올 때가 있어요. 김수환 추기경님의 전기를 준비할 때도 여러 번 있었어요. 김 추기경님의 생애는 길어 중간에 공백이 많았습니다. 가령 1956년에 왜 독일에 가셨는지 등을 알 수 없는데 온라인 검색 자료도 전혀 없는 거예요. 그래서 1950년대 이후 가톨릭신문 영인본을 들춰봤습니다. 단서가 막 쏟아지더라고요(웃음).”

-전기의 주인공이 도와준다고 느끼나요.

“그렇죠. 김대건 신부 일대기를 집필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여러 번 했어요.”

-전기 한편 마무리할 때마다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는다고 들었습니다.

“건강이 나빠졌어요. 잡화점에서 육체노동을 하는 틈틈이 집필 자료를 보고, 집에 돌아와서도 서너시간만 자고 몰입했으니까요. 간송 전형필, 혜곡 최순우, 김환기 화백의 전기를 쓸 때 한 번씩 심장마비가 와서 총 3번 응급헬기를 타고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스텐트는 6개 시술했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의 제 삶은 덤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아이들이 대학을 마치고서야 가게를 접고 피닉스로 이사해 작가로만 살 수 있었어요.”


전기가 출간되면 강연 요청이 잇따른다. 사진은 2012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출간 후 이충렬씨가 독자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 이충렬씨 제공

전기가 출간되면 강연 요청이 잇따른다. 사진은 2012년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출간 후 이충렬씨가 독자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 이충렬씨 제공


“미국 등 선진국에선 대통령 전기 많이 나와
한국 법은 사실 적시해도 명예훼손죄 성립
공과 다 써야 하는데 과(過) 쓰면 고소당해”

-사실관계에 대한 고증은 어떻게 합니까.

“팩트 체크는 이중삼중으로 해야 합니다. 서로 증언이 다를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까지 제가 쓴 전기에서는 팩트 문제로 큰 말썽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김환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김 화백의 삶과 예술을 총체적으로 다룬 전기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환기미술관 측으로부터 저작권 위반으로 고소당하는 일을 겪었다. 환기미술관은 한두 내용의 삭제를 요청했고, 그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 침해로 맞서 검찰로부터 무혐의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그러자 환기미술관 측은 항소와 함께 1억원의 손해배상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한 싸움이 싫어 그는 3쇄까지 찍은 책의 절판·폐기에 결국 합의해줬다. 그는 “이후부터는 유족이 ‘협조는 하되 간섭은 안 한다’는 약속을 안 하면 아예 시작을 안 한다”고 말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전기를 계속 쓰는 이유는 뭔가요.

“한 인물을 복원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일이 되게 즐겁기 때문이에요.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 제 작업을 통해 새롭게 우리 사회에 자리매김하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 크거든요. 또 한국 전기물의 전통도 만들고 싶습니다. 전기는 어떻게 쓰는 건지 후배 작가들에게 표본이 되어 길을 열어주고 싶습니다.”

-집필 대상을 선정하는 데 기준이 있습니까.

“그 사람의 삶이 독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해요. 이완용의 평전은 가능하되 전기는 쓸 수 없는 이유입니다. 평전은 학자들의 주관적인 평과 함께 저자의 평가가 들어가니까요.”

-그래서 한국에 자서전이나 회고록, 평전은 많아도 전기물은 별로 없는 걸까요.

“그래서 없고, 자료조사 과정도 지난하기 때문이에요. 또 전기의 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 샘플이 될 만한 작품이 없었던 게 사실이고요. 1918년 육당 최남선이 2권으로 집필한 <이충무공 전서>가 거의 마지막 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인은 어떤가요. 미국 대통령들에 대한 벽돌 두께의 전기가 무수히 쏟아진 데 반해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전기물이 없잖아요.

“한국 법 때문이에요.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죄가 성립되거든요. 그래서 유족이 걸면 걸립니다. 박정희 대통령이든 누구든 전기라면 공과를 다 써야 하는데 과(過)를 쓰면 유족에게 고소당하는 거죠. 반면 다른 선진국에서는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미국 대통령 조지 워싱턴과 에이브러햄 링컨 등의 전기가 저마다 수십권이 나와 있고, 모두 공과를 다루고 있어요. 한국도 역대 대통령의 전기가 잘 기술되면 역사도 좀 정리가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전기물이 없는 이유를 이충렬씨는 “법 때문”으로 설명했다. “전기는 공과를 다 다뤄야 하는데,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죄가 성립되기 때문에 유족이 문제를 제기하면 출판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안타깝다”고 했다.  / 김창길 기자

미국과 영국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전기물이 없는 이유를 이충렬씨는 “법 때문”으로 설명했다. “전기는 공과를 다 다뤄야 하는데,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죄가 성립되기 때문에 유족이 문제를 제기하면 출판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는 “안타깝다”고 했다. / 김창길 기자


“전기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위인들은 꼭 멘토가 있습니다”

-고 이건희 회장이나 정주영 회장의 전기 집필을 생각해본 적은 있나요.

“정 회장의 전기는 생각해보지 않았고, 이건희 회장의 경우에는 할 마음이 있어요. 창업보다 더 힘든 게 수성(守城)인데 삼성을 세계적 브랜드로 만들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가신 지 불과 2년이 채 안 됐습니다. 그러니 유족들도,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하고, 어느 관점에서 접근할 것인지도 서로 진중하게 논의돼야 할 거예요. 그런데 과연 유족들이 할 마음이 있겠는가, 아마도 아직은 아닐 것 같아요.”

-삶 자체가 감동을 주는 위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까.

“전기를 쓰면서 알게 된 것인데, 꼭 멘토가 있습니다. 전형필은 오세창과 박종화, 최순우는 전형필, 김홍도는 강세황, 김수환 추기경은 독일인 신부 테오도르 게페르트와 장병화 신부, 이태석 신부는 제임스 신부가 멘토셨어요. 멘토가 없는 독자라면, 자신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웃음).”

이씨는 지난해 10월 40년간 동고동락한 아내 이은경씨를 잃었다. 아내는 2017년 뇌종양 진단 후 수술을 받고 투병해왔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은경씨의 손을 꼭 잡고 동행하던 그는 아내가 떠난 후 영구귀국했다. 홀어머니와 함께 경기 남양주 천마산 아래에 살고 있다. 그는 “마음속으로 점찍은 또 다른 두 인물의 전기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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