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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고를 ‘만났지만’ 소중한 오늘을 사는, 나는 이지선입니다”
[주간경향] 지난 3월 28일, 벚꽃이 만개한 이화여대 교정은 봄기운으로 화사했다. 오가는 학생들의 얼굴에도 봄꽃이 피었다. 정문에서 오르막길을 한참 올라 만난 이지선 사회복지학과 교수(45)의 연구실. 그런데 문고리가 이웃한 다른 연구실들의 동그란 손잡이와 달랐다. 화상으로 양 엄지손가락을 제외하고 첫 마디를 모두 잘라내 손가락이 짧아진 동생을 위해 오빠 정근씨가 돌리지 않고, 아래로 당기면 되는 도어락을 설치해준 것이다.그가 모교 교수로 임용됐다는 소식은 지난 3월 2일 그의 첫 출근에 맞춰 여러 언론이 조명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성취를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그는 이화여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0년 7월, 오빠와 승용차로 귀가하던 중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로 전신에 중화상을 입었다. 죽음의 문턱을 수차례 오가고 화마는 곱던 그의 옛 모습을 앗아갔지만, 주저앉지 않았다. 오히려 글로 풀어낸 긍정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로 많은 이들을 웃고 울게... -
광고장이 이제석 “오늘의 나를 만든 건 생존본능”
[주간경향] 이제석씨(41)는 여전히 ‘똘끼’가 충만해 보였다. 자신감도 넘쳤다. “무언가로 막히면 뚫릴 때까지 계속 두드린다, 반드시 뚫어버린다”고 말했다.그는 세계가 인정한 ‘광고장이’다. 지방대 출신의 설움을 딛고 2006년 9월 미국으로 건너간 지 6개월 만에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공모제에서 수상했다. 대기오염의 위험섬을 경고하는 ‘굴뚝총’ 광고로 세계 3대 광고제의 하나인 ‘원쇼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뿌린 대로 거두리라(What goes around comes around)”는 카피와 함께 군인이 겨눈 총구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반전 포스터는 세계 유수의 공모전에서 동시다발로 메달을 따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미국에서 가장 큰 광고회사인 JWT와 BBDO를 거쳐 FCB에 입사했다. 빅히트작을 연달아 선보인 그에게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장밋빛 미래를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하지만 그는 2009년 돌연 한국으로 돌아왔다... -
‘신영음’ 25년 신지혜 아나 “저, 굉장한 욕심이 있어요”
[주간경향] “오늘 첫 곡은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중에서 바르다가 차 안에서 따라 부르던 그 곡이에요. ‘링 마이 벨(Ring My Bell)’…. 아니타 워드가 부릅니다.”매일 오전 11시, 이탈리아 영화 <일 포스티노(Il Postino)>의 OST ‘바이시클(bicycle)’의 선율이 흐르면 어김없이 중저음의 차분한 목소리가 청취자들의 마음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25년간 CBS 음악 FM(93.9MHz) <신지혜의 영화음악>(이하 <신영음>)을 지켜온 신지혜 아나운서(54)다. 매년 봄·가을 개편 때마다 1, 2년도 안 돼 숱한 프로그램들이 사라지는 라디오 세계. 그 속에서 25년을 한결같이, 그것도 영화음악으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이다. 동시간대 청취율 1위도 거의 빠짐없이 기록 중이다.<신영음>은 신지혜 아나운서의 1인 제작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나오는 작가 한 명이 일부... -
“화장실휴지 찍어 작품…예술 한겹 벗기면 인간 원초적 모습”
[주간경향] 성능경 작가(79)는 1970년대 이후 실험미술의 흐름을 주도한 한국의 대표적 개념미술가다. 신문, 사진, 퍼포먼스 등을 이용해 자신만의 독보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신문 기사 오려내기, 스트레칭하기,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신체 촬영하기 등 일상을 예술로 수용한 그의 작품은 파격적이다. 관객 앞에서 배뇨를 하거나 대변 닦은 휴지를 매일 촬영해 형형색색의 색을 입혀 완성하기도 했다.그는 한국 미술계로부터 아주 오랜 기간 외면받았다. 철저히 소외됐고 비주류로 존재했다. 55년간 작가생활을 해왔지만 ‘불러주는 곳’이 없어 지금껏 개인전을 연 것은 고작 다섯 차례에 불과했다. 스스로 ‘업신여김’을 넘어 ‘없음여김’을 당했다고 표현할 정도다.그런 그는 올해 개인전과 단체전을 오가며 다수의 전시를 연다. 지난 2월 22일 서울 종로구 화동 백아트 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을 시작으로 5월과 9월 국립현대미술관과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에서 각각 <한국실험미술 1960... -
“인생 최고의 날을 수의로 담아내는 선조들 마음 감동”
[주간경향] “눈 내리는 아침/ 할머니는 손수 지어놓으신 수의로 갈아입으셨다/ 수의는 1978년 7월 15일자 신문지에 싸여 있었다/ 수의를 지어놓고도 이십년을 더 사신 할머니는/ 백살이 가까운 어느 겨울날이 되어서야/ 연둣빛을 군데군데 넣어 만든 그 수의를/ 벽장 속에 숨겨둔 날개옷처럼 차려 입으신 것이다/ (중략)/ 수의 한벌과 삼베 두 조각으로 따뜻하게 여며 입고/ 할머니는 1998년 1월 19일 아침/ 흰눈이 내리는 새로운 집으로 걸어들어가셨다”(나희덕 시인의 ‘삼베 두 조각’)살아서는 입을 수 없는 옷이 수의(壽衣)다. 죽어서야 입을 수 있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옷이다. 수의에 단추와 호주머니가 없는 것은 이승에서 얽힌 모든 인연과 소유욕을 훌훌 털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조선시대 왕실이나 국가의 각종 의례 양식을 집대성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 -
“남자보다 식물…저더러 ‘식물 또라이’래요”
[주간경향] 그는 식물과 닮아 보였다. 맑은 얼굴로 조곤조곤 말했다. 낯가림이 심해 사람 앞에 나서는 게 힘들다고 했다. 사진 촬영을 할 때도 얼굴이 금세 달아올랐다. 하지만 식물 이야기를 할 때는 작은 목소리에 설렘이 가득했다. 사랑에 빠진 게 틀림없어 보였다. 식물을 자주 ‘그 친구’, ‘그 아이’라며 의인화해 불렀다. 그는 사람보다, 남자보다 식물이 좋다고 했다. 식물분류학자 허태임 박사(37) 이야기다.허 박사는 경북 봉화에 자리한 국립백두대간수목원 보전복원실 연구원이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은 백두대간과 고산지역 산림생물자원을 수집·보존·전시·활용해 생물다양성을 증진하고 교육과 체험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목적으로 2017년 5월 출범했다.허 박사는 수목원 연구실보다 야외 현장에 나가 있는 시간이 더 많다. 설악산과 지리산을 잇는 백두대간을 숱하게 종단하며 그곳에 사는 식물 종류를 낱낱이 밝히고, 기록하며, 특정 종을 타깃으로 표적 조사를 진행한다. ... -
“더 아름다운 문장을 취해야죠, 보석을 세공하듯”
[주간경향] 극작가 배삼식(53)은 ‘연극계의 김수현’ 또는 ‘연극계의 김은숙’으로 통한다. 흥행 보증수표다. 영역의 경계도 없다. 번역극과 번안극, 창작극을 넘나들고 정극과 마당놀이, 음악극(창극·오페라·뮤지컬)을 수시로 오간다. 게다가 그의 글은 깊은 철학적 사유를 담고 있다.그는 보석을 세공하듯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심혈을 기울인다. 침묵의 시간, 작은 몸짓 하나도 허투루 담지 않는다. 무언의 강력한 언어라고 믿기 때문이다.1998년 번안극 <하얀 동그라미 이야기>를 시작으로 25년간 활동해온 배 작가를 지난 1월 10일 경향신문 인터뷰실에서 만났다. 그는 오는 3월 7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첫 공연하는 배우 손숙의 80세 기념공연 <토카타>(신시컴퍼니 제작·손진책 연출) 극본을 전날 막 탈고하고 나왔다고 했다. 한동안 그를 옥죄었을 창작의 고통을 덜어내서인지, 그는 자주 환하게 웃었다.창작극 <토카타>는 촉각... -
신수정 KT 부사장 “불황기엔 비관도 낙관도 아닌, 최악에 대비하는 태도를”
[주간경향] 신수정 KT 엔터프라이즈 부문장(부사장·58)은 매 주말 중 하루는 ‘아점’을 먹고 동네 카페에 간다. 경험에 기반한 자신의 생각에 책에서 얻은 지혜를 더해 페이스북에 글을 쓰기 위해서다. 주로 일과 삶, 경영과 리더십에 관한 내용이다. 그는 주제마다 번호를 매겨 간결한 문장으로 핵심을 요약한다. 십수년 전부터 생긴 습관으로, 그에게는 일상의 업무에서 벗어난 달콤한 휴식시간이다. 오후 4시까지 카페에 앉아 그렇게 자기만의 시간을 보낸다.신 부문장의 페이스북 팔로워는 3만2000명에 달한다. 올린 글마다 ‘좋아요’가 수천 개씩 달리고, 댓글과 공유도 수백 회씩 이뤄진다. ‘페이스북의 현인’이라는 애칭이 붙었을 만큼 그가 올리는 글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하는 이가 많다. 이렇게 쌓인 글을 모아 2021년 6월 출간한 <일의 격>(턴어라운드)은 10만부 가까이 판매됐다. 2022년 9월에는 그가 페이스북으로 이동하기 전 트위터에 기록한 짧은 글을... -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37년째 책 나올 때마다 놀라워”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60)는 오래된 습관이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침실 한켠 책장에 꽂힌 1200여권의 시집 중 한 권을 무작위로 뽑는다. 아무 데나 펼쳐 시를 소리내 읽는다. 그는 “오늘 나는 문학적인 하루를 보낼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한 습관”이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음식의 질은 물론 접시와 수저받침 하나까지 정성을 다한 자신만의 아침식탁을 차린다.출근길에는 단골 꽃집에 들러 꽃을 한아름 산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마음산책 출판사 6층 회의실에 놓인 커다란 화병의 꽃을 깔아끼우기 위해서다. 중정(中庭)을 사이에 두고 집무실 맞은편에 위치한 회의실은 대형 탁자 위 꽃과 오디오 기기, 책과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그는 “작가를 비롯해 필자 대다수가 예술가이다 보니 일 이야기로 바로 들어가는 것보다 꽃과 음악으로 분위기를 먼저 부드럽게 만드는 게 여러모로 효과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소한 행동 하나에도 치밀한 전략이 숨은, 경영인다운... -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사회주의 배제하면 안 돼”
[주간경향]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배제하거나 축소하는 것은 역사적 진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일제하 사회주의운동은 마땅히 독립운동사에 포함되어야 할 뿐 아니라 역사적 기여만큼 온당한 지위와 비중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임경석. <독립운동열전> 서문 발췌)사회주의운동가들은 해방 후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철저히 외면받아왔다. 정부기관의 독립유공자 선정에서도 배제됐다. 반공이데올로기는 그만큼 공고했다. 문민정부 수립 후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이름이 지워진 채 양지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임경석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64)는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의 권위자다. 1993년 박사논문 <고려공산당 연구>를 발표한 이래 한국 사회주의운동사에 천착해왔다. 2003년 단행본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을 시작으로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