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강용 화백 “벽돌처럼 보인다고? 그림자를 그렸을 뿐”

박주연 기자

40년 넘도록 벽돌 그리는 일에 정진

‘벽돌화가’로서 국제적 명성 얻어

“여름이나 가을 유럽서 활동 계획”

‘벽돌화가’ 김강용 화백 / 우철훈 선임기자

‘벽돌화가’ 김강용 화백 / 우철훈 선임기자

지난 4월 5일 자동차를 타고 향한 경기도 양평 황금리. 고운 잔디 위 200평(약 661m²) 대지에 흰색 2층 건물 두 동이 고즈넉이 서 있다. 위채는 남편 김강용 화백(72·서양화가)의 작업동, 아래채는 아내 김인옥 화백(67·동양화가)의 작업동이자 부부의 살림집이다. 정원수들 사이 작은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한가롭게 노닌다.

김강용 화백은 ‘벽돌화가’로 유명하다. 40년 넘는 세월을 벽돌 그리는 일에 정진해왔다. 체에 거른 모래를 접착제로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다음 붓으로 표현한 음영(陰影)의 착시효과를 통해 진짜 벽돌처럼 보이게 하는 작품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의 그림 속 벽돌은 모두 가상의 벽돌, 환영(幻影)이다. 김 화백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시각예술의 본질적 화두를 탐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2004년부터 10년간 미국 뉴욕을 거점으로 삼아 한국과 미국, 중국 등을 오가며 활동했던 그는 올해 또 한 번의 도전을 시도한다. 그는 “올여름이나 가을에 한국 삶을 잠시 중단하고 베를린 등 유럽에 작업실을 마련해 그곳에서 활동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강용 ‘현실+상 76-15’(142x147cm, 혼합재료, 1976)

김강용 ‘현실+상 76-15’(142x147cm, 혼합재료, 1976)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시각예술의 본질적 화두 탐구하고 있죠”

-왜 벽돌인가요.

“내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 시위와 급속한 산업화 속에 열악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시위가 빈발했어요. 박정희 정권은 폭압했고요. 그런 시대적 상황을 작품에 반영하고 싶었어요. 잔디를 그리면서 풀 하나하나를 섬세히 표현했어요. 풀 하나하나가 다 소중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풀은 사람, 즉 인간의 존엄성을 은유하는 거죠. 같은 이유로 벽돌을 그렸어요. 당시는 전 국토가 공사장이었는데, 모래알 하나하나가 모여 벽돌이 되고, 벽돌이 모여 건축물이 되니까요.”

-지금도 작품에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나요.

“아니에요. 오래전부터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시각예술의 본질적 화두가 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예요. 나는 벽돌을 그리지 않아요. 그림자를 그릴 뿐이죠. 그런데 보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보며 벽돌이라고 인식하는 거예요. 벽돌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갖고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그의 초기 벽돌 그림은 구상화로 벽돌을 보이는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모래를 캔버스에 바른 후 벽돌의 그림자를 그려 나가는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벽돌이라는 실재의 사물이 아니라 그의 마음에 그려지는 벽돌의 상(像)을 그렸다.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고, 2차원의 회화를 3차원으로 확대하는 실험을 해왔다. ‘다시점 초점’도 특징이다. 한 작품이지만 그림자를 통해 왼쪽, 가운데, 오른쪽에서 바라봤을 때 벽돌의 모양이 다르다.

-그림자만으로도 실제 벽돌을 붙여놓은 듯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게 놀랍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도 결국 그림자 그리기예요. 튀어나온 부분은 밝게, 꺼진 부분은 어둡게 그리니 입체감이 살아나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거죠.”

-빨강, 노랑, 파랑, 검정 등 작품에 쓰이는 모래 색깔이 정말 다양해요. 정말 물감을 섞지 않은 모래 그대로의 색상인가요.

“물감이 안 들어간 천연재료예요. 서해안, 동해안, 제주도… 지역마다, 또 나라마다 모래의 색깔과 굵기, 질감이 달라요. 곱게 갈아 서로 다른 색의 모래를 섞어 제3의 색을 만들기도 하죠. 요즘에는 대리석 등을 갈아 만든, 투명하면서 다채로운 색감의 규사(硅沙)를 섞어 쓰기도 해요.”

그는 상감(象嵌) 기법을 사용한다. 접착제로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모래를 끌로 파내고 그 자리에 다른 색상과 굵기, 질감의 모래를 집어넣는 기법이다.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모래를 제거하고 그 속에 색상과 질감과 크기가 다른 모래를 채울 때  사용하는 끌(위)과 그림자를 그릴 때 필요한 붓 / 우철훈 선임기자

캔버스에 얇게 펴 바른 모래를 제거하고 그 속에 색상과 질감과 크기가 다른 모래를 채울 때 사용하는 끌(위)과 그림자를 그릴 때 필요한 붓 / 우철훈 선임기자

“‘모나리자’도 결국 그림자 그리기예요
튀어나온 부분은 밝게, 꺼진 부분은 어둡게 그려
입체감이 살아나 진짜 사람처럼 보이는 거죠”

-얼마나 자주 모래 채집을 하러 나가나요.

“보통 한달에 한두 번은 나가는데, 때로는 3~4개월 만에 나가기도 해요. 운전하고 여행하는 것을 좋아해요. 모래 채집을 하러 아내와 함께 당일로 다녀오기도 하고, 목포-부산-강릉으로 돌아서 오기도 해요. 한번에 많이 채집하지는 않아요. 조금씩 가져와요. 그림이 안 될 때 한 번씩 나가야 더 잘 그려지니까요. 재작년에 자동차를 바꿨는데, 이전에 타던 자동차는 7~8년간 30만㎞를 탔어요. 그만큼 모래 채집하러 많이 다녔어요.”

-수십년간 채집했으니 척 보면 어느 지역 모래인 줄 감별해낼 수 있겠군요.

“그렇죠. 삼천포 모래인지, 경포대 모래인지 한눈에 구분할 수 있어요(웃음).”

-하루에 그림 그리는 시간은 얼마나 되나요.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 빼고 전부라고 할 수 있어요. 오전 7~8시쯤 일어나 새벽 1시쯤에 잠드는데, 온종일 그림만 그려요. 동 트는 것도 모른 채 작업할 때도 많고요.”

-하루종일 반복적으로 똑같은 작업을 하는데 지루하지 않습니까.

“전혀요. 잠을 자는 것도, 쉬는 것도 모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예요. 몰입감이 주는 희열 때문에 계속 그리는 것 같아요. 나는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뭐든 시작하면 잘 할 거예요. 하지만 안 해요. 그림 그리는 시간을 빼앗기는 게 아까우니까요. 술, 담배도 입에 대지 않고요. 그림 외에 유일하게 즐기는 게 있다면 새벽에 종종 프리미어리그를 시청하는 거예요.”

-그림 작업할 때 특별한 루틴이 있나요.

“작업실에 올라와 제일 먼저 하는 일이 TV를 켜는 거예요. 20년 전까지는 클래식음악을 틀어놓고 작업했는데, 언젠가부터 TV를 틀어놓고 일해요. 주로 여행 프로그램을 틀어놓는데, 그것을 보거나 듣는 것은 아니에요. 생활소음처럼 느끼며 작업하는 거죠.”

김 화백은 1950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의 언양 김씨 집성촌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8남매 중 장남이다. 전쟁둥이지만 전쟁에 대한 기억은 없다. 전해 듣기로 6·25전쟁으로 큰댁 어른이 북한군에게 끌려갔고 마을사람 여럿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그의 서너 살 무렵의 기억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김종래 작가의 만화 <엄마 찾아 삼만리>(1958), 김산호 작가의 만화 <라이파이>(1959)를 따라 그렸다.

-어려서부터 재능을 나타냈군요.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몹시 싫어하셨어요. 그림 그리지 말라고 밤에 전깃불을 껐을 정도였죠. 아버지가 잠드셨을 때 몰래 호롱불 밑에서 그림을 그렸던 기억이 남아 있어요.”

김강용 ‘현실+상 207-263’(55×100cm, 혼합재료, 2002)

김강용 ‘현실+상 207-263’(55×100cm, 혼합재료, 2002)

모래는 물감이 안 들어간 천연재료
지역마다, 나라마다 색깔·굵기·질감 달라
다른 색 모래 섞어 제3의 색 만들기도

-그런데 어떻게 화가가 됐나요.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었던 최재남 선생님 덕분이에요. 미술 시간에 내가 그린 그림을 보고는 ‘너는 그림을 참 잘 그리는구나’ 하며 크게 칭찬하셨거든요. 그 한마디가 나에게 충격이었어요. 태어나 처음 듣는 칭찬이었어요. 그때 결심했죠. 나는 앞으로 그림을 그리며 살 거라고, 화가가 될 거라고.”

-아버지는 어떻게 설득했습니까.

“중학교를 산 하나를 넘어야 닿는 읍내의 배영중학교로 갔어요. 1학년 때 미술교사인 나병준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고 깜짝 놀라며 미술반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너무 좋았죠. 나의 우상이었던 전수천 선배(2018년 작고한 한국의 대표적 설치미술가로 제46회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가 당시 3학년으로 미술반장이었어요. 나는 미술반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나 선생님이 서울에 가서 미술공부를 하라더군요.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하다고 하자 선생님이 자전거를 타고 우리 집까지 찾아오셨어요.”

-뭐라고 설득했나요.

“강용이는 보통 애가 아니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웃음). 그래서 아버지가 서울로 유학을 보내주셨어요. 나 선생님의 추천에 따라 서라벌예술대학의 부속인 서라벌고등학교에 차석으로 입학했어요. 아마도 선생님은 서울예고의 존재는 당시 모르셨던 것 같아요(웃음).”

재수를 해 1971년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91)이 지도교수였다. 1976년 만 3년의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그는 같은해 특유의 첫 벽돌 그림 ‘현실+상(像)’을 발표했다. 1979년 극사실화로는 최초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특선을 수상했다. 모래로 표현한 벽돌이 그의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0년대부터다.

김강용 화백은 2000년대 미국 뉴욕 맨해튼 빌딩들의 벽돌에서 영감을 얻어 컬러 벽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색상과 질감, 크기의 모래를 직접 찾아다닌다. / 우철훈 선임기자

김강용 화백은 2000년대 미국 뉴욕 맨해튼 빌딩들의 벽돌에서 영감을 얻어 컬러 벽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색상과 질감, 크기의 모래를 직접 찾아다닌다. / 우철훈 선임기자

“얼마 전에 자동차를 바꿨는데
이전에 타던 자동차는 30만㎞ 탔어요
그만큼 모래 채집하러 많이 다녔죠”

-스승 박서보 화백에 대해서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습니까.

“무척 엄하셨어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분이 계셨다는 것 자체가 교육이죠. 큰 혜택을 받았어요. 박서보 선생님이 주도한 ‘에꼴 드 서울’(정기 그룹전)에 갓 졸업한 나를 참여시켜 주었거든요. ‘네 작품 좋다, 같이 하자’ 하셨어요. 국내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참여하는 그룹전이었어요.”

-그에 앞서 졸업하던 해인 1978년 권수안, 김용진, 서정찬, 송윤희, 조덕호, 주태석, 지석철 등 홍익대 동기들과 함께 극사실 회화 경향의 그룹인 ‘사실과 현실’을 결성해 작품을 발표했더군요.

“당시 한국 화단은 추상회화가 대세였어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히 재현하려는 사실주의는 진부한 예술, 형편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그리는 예술로 폄훼했죠.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당시만 해도 추상회화가 와닿지 않았어요.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던 그 시절에도 국제적 활동을 하셨던 박서보 선생님이 세계미술운동의 흐름은 극사실주의라고 우리에게 설명해주셨어요. 미술잡지도 가져다주셨고요. 큰 힘이 됐죠. 한국 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분이세요.”

-1981년 홍익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같은해 결혼했던데, 아내는 어떻게 만났습니까.

“입대하기 전까지 화실에서 입시생들을 가르쳤어요. 같은과 친구 정덕영도 같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아내가 제자였어요. 복학해보니 홍익대 동양화과 학생으로 들어와 있더라고요. 아내로서는 화실에서 본 아저씨니까 아저씨, 아저씨 하다가 선배님 하다가 여보, 당신이 된 거죠(웃음).”

김 화백은 1980년부터 5년간 홍익대 부속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결혼을 하려면 안정적으로 생활비가 조달돼야 했기 때문이다. 전두환 정권의 괴외금지조치로 다른 길이 없었다. 5년 후 아내가 미술교사 바통을 이어받은 후 한동안은 작품 활동에 집중했다. 1999년 쾰른 아트페어에서 출품작이 전부 팔려나갈 만큼 인기를 끌면서 처음으로 세계적 주목을 끌었다. 이후 바젤, 시카고 아트페어, 도쿄 현대아트페어 등 국제적인 아트페어에 참가하며 한국의 위상을 높였다.

-2004년부터 10년간 미국 뉴욕에 정착해 작품활동을 했지요. 뉴욕에는 왜 갔습니까.

“두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1999년에 홍익대 미술대학원이 생기면서 전임 교수가 됐어요. 그런데 학생들 논문 지도하느라 그림 그릴 시간이 너무 부족했어요. 또 국제활동을 도와주고자 한 박여숙화랑과 1999년 10년 전속 작가 계약을 체결했는데 내 생활이 너무 오픈되는 거예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이야기가 잘돼 계약을 해지했고 영어 한마디 못 하면서 2005년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혼자 간 건가요.

“그랬죠. 맨해튼 브리지와 브루클린 브리지 사이의 브루클린 지역인 덤보의 한 오피스텔에 작업실을 차렸어요. 덤보는 갤러리와 작가 스튜디오가 운집한 곳인데, 한국 후원자가 공간을 제공해줬어요.”

2006년 뉴욕 뉴호프 갤러리에서 전시 초대전을 가졌다. 이 전시장에 한국의 유명 갤러리스트가 찾아와 작품을 샀고, 2년 후인 2008년 서울 전시로 이어졌다. 2009년에는 베이징 ‘중국 미술관’ 초대전과 상업갤러리인 베이징 T아트센터 초대전으로 이어져 중국 시장의 주목을 받았다.

-덤보에는 얼마나 있었습니까.

“3~4년 있다가 집세가 좀더 비싼 허드슨강 바로 건너편 웨스트 뉴욕으로 옮겼어요. 그림이 잘 팔렸거든요.”

-뉴욕에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맨해튼이 빌딩숲인데 딱 보니까 전부 벽돌로 돼 있는 거예요. 그런데 벽돌 색깔이 다 달라요. 매일 그걸 보고 오가며 영감을 얻었죠. 이전까지 20년 이상 모노톤으로만 작업했어요. 모래색의 톤과 굵기, 질감에 변화를 줬을 뿐 색깔을 바꾸려는 생각은 아예 못 했죠. 뉴욕에서 색깔을 느끼면서 컬러 벽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컬러 작품을 모아 2008년 가나아트센터에서 대규모 전시를 했고요.”

뉴욕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가 수시로 뉴욕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을 찾아갔다. 뉴욕 구겐하임 전시가 목표가 됐다. 한국인으로 구겐하임을 통째 빌려 초대전을 연 작가는 2000년 백남준, 2011년 이우환뿐이다. 후원해줄 재력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베이징 동북쪽 다샨쯔(大山子)에 있는 중국 최대 화랑 밀집구역인 ‘798 예술구’에 작업실 겸 갤러리 ‘위드 스페이스(With Space)’는 왜 오픈한 건가요.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 열린 2008년 8월 8일에 문을 열었던데요.

“둘째 딸이 고등학생 때 중국으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중국이 발전하고 있으니 아내가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아이를 챙기겠다고 한 거죠. 나는 뉴욕에 거주하며 한국과 중국을 오갔고요. 아내는 갤러리가 매우 잘 되자 그림 그릴 시간이 없다며 속상해했어요(웃음). 딸이 학교를 마치면서 2014년 여름 갤러리도 철수했어요. 같은 시기 나도 뉴욕생활을 청산하고 서울 집도 처분한 다음 1990년부터 집 짓고 산 경기도 양평에 2015년에 아예 정착한 거예요.”

김강용, ‘현실+상 1707-1645’(200×200㎝, 혼합재료, 2017)

김강용, ‘현실+상 1707-1645’(200×200㎝, 혼합재료, 2017)

“뉴욕 구겐하임 전시는 모든 작가의 희망…그 꿈 향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

-딸 둘도 미술을 한다고요.

“첫째 재원(40)은 홍대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 중이고, 둘째 재영(32)은 칭화대에서 중어중문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홍대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있어요.”

-뉴욕 구겐하임에서 전시하겠다는 목표는 접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모든 작가의 희망인걸요(웃음).”

그는 2020년 여름 성곡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한국원로작가 초대전-김강용: 극사실적 벽돌’전)을 했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60여점의 작품이 망라됐다. 이 전시를 계기로 스위스와 미국 뉴욕의 갤러리에서 전시 초대 및 레지던시 프로그램 제공 의사를 타진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미술관에서도 초대 의사를 밝혔다. 다만 코로나19 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전시 진행은 잠시 멈춰섰다.

-앞으로 계획은 뭔가요.

“독일 베를린에 작업실을 마련해 그곳을 거점으로 활동할 계획이었는데 코로나19 사태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어요. 코로나19가 수그러들고 있으니 올여름이나 가을에 작업실을 마련해 유럽으로 떠날 생각이에요.”

그는 “건강만 허락하면 죽는 날까지 계속 그림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다.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고희를 넘긴 나이에도 도약을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 노화가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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