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아름다움’을 세운 건축가 김중업

박주연 기자

한국 현대건축의 선구자…올해로 탄생 100년

김중업 개인 사진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김중업 개인 사진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건축이란 인간이 자연에 시도하는 가장 웅장하고 보람 있는 창조에의 길이라는 것을 꼭 잊지 말아다오.”(김중업)

올해는 한국 현대건축의 걸출한 선구자, 김중업(1922~1988) 탄생 100년이다. 당대 세계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1887~1965)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중업은 김수근(1931~1986)과 쌍벽을 이뤘지만 사회적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국가로부터 추방당한 비운의 건축가다. ‘예술로서의 건축’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단순히 기능에 충실한 건물이 아니라 아름답고 감동적인 작품을 지향했다. 한국 현대건축의 최고작으로 꼽히는 주한프랑스대사관(1962), 한국 최초의 마천루 삼일빌딩(1970)을 비롯해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김중업 탄생 100년을 맞아 김중업의 생애와 건축이력, 건축적 특성과 가치를 조명한다. 김중업건축박물관 소장 자료와 책 <김중업 다이얼로그>(열화당), 정림건축 기획연재 ‘한국의 건축가-김중업’(조인철) 그리고 김중업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1960년 설계하고 1962년 완공된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만의 조형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발점이다. 한국 전통 기와기붕의 날렵한 곡선을 현대적 재료로 표현했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1960년 설계하고 1962년 완공된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만의 조형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발점이다. 한국 전통 기와기붕의 날렵한 곡선을 현대적 재료로 표현했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평양 출신으로 시와 그림에 재능

김중업은 1922년 평양시 진향리에서 5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연안 김씨 권세가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평양의 명문인 평양고등보통학교 출신으로 군수를 지내기도 해 김중업은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김중업도 아버지처럼 평양고보를 다녔는데, 시와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말라르메, 보들레르 등의 난해한 시를 읽고, 포비즘의 그림을 그리며 예술가적 자질을 보였다. 하지만 예술가의 길은 집안의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그는 건축을 택했다. 일본인 미술교사의 권유로 1939년 일본의 요코하마 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김중업은 “미술과 시와 가장 가까운 것이 건축이었기 때문”이라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파리의 에콜 데 보자르에서 수학한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1887~1977)가 지도교수였다. 김중업은 1941년 12월 이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건축사와 미술사 전문인 조현정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는 “미술과 문학에 재능을 보이던 김중업은 이곳에서 그의 특기로 알려진 빠르고 유려한 드로잉 실력뿐 아니라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 건축에 대한 동경, 그리고 무엇보다 건축을 공학이 아니라 예술로 보는 평생의 건축관을 장착하게 됐을 것”이라고 <김중업 다이얼로그>에서 주장했다. 김중업은 이 시절 독립운동에 관여했다. ‘한국의 건축가-김중업’에서 조인철은 “김중업은 ‘요코하마 우치코시바시 교회사건’에 연루돼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청각이 상할 정도로 물고문을 당했다”고 기술했다. 여운형의 여동생을 통해 당시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오는 소식이나 지령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는데 그 교회 열린 모임에 갔다가 체포됐다.

유람선이나 비행선을 연상시키는 제주대학교 본관(1969)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유람선이나 비행선을 연상시키는 제주대학교 본관(1969)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김중업은 1942년부터 약 2년간 도쿄의 마쯔라 히라타(松田平田) 설계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면서 고전건축에 근거를 둔 근대건축을 접했다. 이듬해 평양시 염전리의 김병례와 중매로 결혼했다. 김중업 21세, 김병례 19세였다. 부부는 슬하에 4남1녀를 뒀다.

김중업은 1944년 귀국해 서울의 조선주택영단, 안양의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에서 일했다.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8일 평양으로 돌아온 그는 공산청년동맹 연구부장을 맡았다. 이 전력이 김중업을 시기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자로 몰리는 빌미를 제공해 1970년대 추방의 이유로 작용했을 수 있다는 해석(조현철)도 있다.

한국 전통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유엔기념묘지 정문(1966)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한국 전통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유엔기념묘지 정문(1966)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르 코르뷔지에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김중업은 25세였던 1947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 조교수로 재임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그곳에서 김중업은 전국에서 몰려든 당대 내로라하는 예술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시인 구상·모윤숙·조병화, 화가 김환기·박서보·이중섭 등과 우정을 나눴다. 건축가 박학재와 함께 조병화를 위해 부산 송도 앞바다에 ‘패각의 집’으로 널리 알려진 송도의원 건물을 설계해주기도 했다. 조현정 교수는 “건축을 예술의 지위로 격상시키는 것은 1950년대 한국 건축계의 시대적 요청이기도 했다. 부산 광복동 금강다방에서 열린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회원들의 결의로 김중업이 윤효중, 김소운, 오영진, 김말봉 등 당대의 유명한 화가, 문인들과 함께 1952년 7월 베네치아에서 유네스코 주최로 열린 제1회 세계예술가대회에 참석이 결정됐을 때, 이는 건축이 예술의 일부로 공인받은 사건으로 여겨졌다”고 전했다. 동료 건축가들은 김중업의 여비를 모금해줬다.

김중업은 세계예술가대회에서 동경하던 르 코르뷔지에를 만난다. 특별연사 자격으로 무대에 오른 김중업의 연설에 르 코르뷔지에는 깊은 감명을 받았고, 그날밤 열린 연회에서 김중업에게 묻는다. “당신은 시인인가요? 건축가인가요?” 그러자 김중업은 “저는 시인이자 건축가입니다”라고 말하고 파리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싶다고 말한다. 르 코르뷔지에로부터 자신의 사무실로 한번 와보라는 말을 들은 김중업은 귀국하지 않고 파리로 가기로 결심한다. 1952년 10월부터 1955년 12월까지 3년 2개월 동안 르 코르뷔지에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김중업은 인도 펀자브주의 찬디가르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작업에 참여했다.

대한민국 현대화의 상징, 삼일빌딩(1970) / 경향신문 자료사진

대한민국 현대화의 상징, 삼일빌딩(1970)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귀국 후 한국적 모더니즘 추구

김중업은 1956년 귀국해 ‘김중업건축연구소’를 열었다. 모더니즘과 한국 전통을 결합한 독창적인 작업을 이어갔다. 김현섭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는 “1956년 귀국 후 선보인 여러 디자인에는 필로티, 브리즈-솔레유(외부 차양막), 모듈러(르 코르뷔지에가 고안한 건축 및 디자인용의 기준 척도와 치수표) 등 스승의 여러 어휘가 직접적으로 묻어난다. 하지만 그는 주한프랑스대사관(1962)을 완공함으로써 자신만의 건축적 성취를 맛봤고, 제주대학교 본관(1969)과 서병준산부인과의원(1967) 등 이후의 디자인을 통해 그러한 성취를 더욱 단단히 다져 나갔다”고 <김중업 다이얼로그>에서 기술했다.

서울 서대문 언덕 위에 지상 4층, 전체면적 1603㎡ 규모로 선 주한프랑스대사관은 김중업만의 조형세계가 본격적으로 드러난 시발점이다. 4개 건물이 경사진 대지 위에 둥근 정원을 품고 배치돼 있다. 그러한 배치는 한국 전통가옥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며, 사무동 건물은 한국 전통 기와지붕의 날렵한 곡선을 적용했다. 정재은 김중업건축박물관 학예팀장은 “김중업 건축에서 지붕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주한프랑스대사관에서는 두 종류의 지붕이 등장하는데, 르 코르뷔지에가 인도 찬디가르에 설계한 주지사 관저와 행정 청사의 형태와 유사하다. 그렇지만 김중업은 르 코르뷔지에의 지붕 형태를 한국적 맥락으로 해석했다. 한국 전통건축에서 나타나는 고유한 지붕선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것을 현대적 재료로 표현하려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관저 외벽 전체를 둘러싼 모자이크는 서양화가 윤명로, 김종학이 옛 기와와 자기를 부숴 제작했다. 조현정 교수는 “건축, 미술, 조각의 통합에 대한 열망, 즉 예술 종합의 자장”으로 해석했다. 김중업은 생전 “한국의 얼이 담긴 것을 꾸미려고 애썼고 프랑스다운 엘레강스를 나타내려 한, 피눈물 나는 작업이 나에게 엄청난 행운을 안겨주었다”고 회상했다. 이 작업을 통해 그는 훗날 프랑스 국가공로훈장과 슈발리에 칭호까지 받았다. 유엔기념묘지 정문(1966·현 유엔기념공원 정문) 역시 한국 전통건축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조형성이 돋보인다.

기하학적 곡선의 미학이 돋보이는 서병준산부인과의원(1967)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기하학적 곡선의 미학이 돋보이는 서병준산부인과의원(1967)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유기적인 곡면은 김중업 건축의 특징이다. 서울지하철 2호선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3번 출구와 만나는 5층짜리 서병준산부인과의원(현 아리움 사옥)은 기하학적 곡선의 미학을 제대로 구현하고 있다. 대지가 좁고 세모진 대로변이라는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곡선을 사용해 독특하면서도 기능적으로 설계했다. 내부공간은 산부인과 병원이라는 점에 착안해 자궁과 같이 디자인했다. 1층의 방들은 웅크린 태아의 모습이며 2~3층의 수술실과 인큐베이터실, 입원실 등은 크고 작은 타원형인데, 자궁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건물 벽면과 바닥 이음매 부분도 둥글게 마감하고, 두 방향 발코니도 층층이 곡면으로 처리했다.

제주대학교 본관 역시 아름다운 곡선 형태를 보였다. 유람선이나 비행선을 연상케 하는 독특한 외형의 이 건물은 21세기형 건축으로 꼽히며 일찍부터 해외에 더 알려졌다. 하지만 노후화를 이유로 안타깝게도 1996년 철거되고 말았다. 백문기 건축가는 “바다라는 텍스트로 해양성을 은유한 건축물”이라며 “김중업은 유머로 외부 계단을 돼지 꼬리가 한번 감고 또 반대로 한번 더 꺾이는 모양이라고 묘사했다”고 말했다.

■국가정책 비판했다 강제 추방돼 9년 유랑

김중업은 서울 종로구 삼일로에 1970년 당시 서울에서 최고층인 지하 2층, 지상 31층의 마천루, 삼일빌딩을 완공한다. 전형적인 미스 반데어로에(Moes van der Rohe·1886~1969) 식의 유리·강철로 외피를 두른 오피스 빌딩이다. 독일 출신의 미스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미국 뉴욕 맨해튼의 시그램빌딩과 형태와 비례가 같아 모작이라는 비판도 받았다. 반면 창틀의 독창적 비례의 아름다움이나 내부 구조의 효율성에서 동시대 국내 어떤 국제 양식 건축물들이 따라갈 수 없는 역작이라는 찬사도 동시에 받았다. 삼일빌딩은 2020년 리노베이션했는데, 설계자들은 공사 과정에서 김중업 건축의 유산과 대한민국 현대화의 상징성을 최대한 존중했다. 기존 삼일빌딩 외관 자재 일부가 내부에 전시돼 있다.

김중업은 성격이 대쪽같았다. 그는 “건축가는 시대를 지켜보는 목격자여야 하며, 사회적 발언을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은 근대화·산업화 기치 속에 대규모 토목·건축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삼일빌딩이 완공된 해, 서울 마포 와우아파트가 붕괴돼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부실공사가 참사의 원인이었다. 김중업은 조목조목 비판했다. 1971년 8월 경기도 광주(현 성남시) 대단지사건이 일어났다. 서울시가 철거민 이주를 졸속 추진하다 대규모 봉기를 야기한 사건이었다. 김중업은 동아일보에 도시개발에 대한 국가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다.

유작이 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세계평화의문(1988). 사신도(백금남)와 열주 탈(이승택) 등 미술가들과 협업한 작품이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유작이 된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의 세계평화의문(1988). 사신도(백금남)와 열주 탈(이승택) 등 미술가들과 협업한 작품이다. / 김중업건축박물관 제공

중앙정보부는 그를 반체제 인사로 분류해 1971년, 3개월 강제 추방했다. 김중업건축연구소는 삼일빌딩의 설계비조차 받지 못한 채 세무조사를 받았고 엄청난 세금이 부과됐다. 김중업은 성북동에 겨우 마련한 집과 사무실도 풍비박산 나며 15년간 닦은 기반이 송두리째 날아갔다.

김중업은 자식들은 한국에 남겨둔 채 프랑스 파리에서 100㎞ 떨어진 페르 앙 타르드누아라는 시골에서 부인과 둘이 살았다. 파리에 계속 머물 수 있었던 건 유엔본부 건축위원이었던 르 코르뷔지에가 유엔본부에 제청해 난민 지위를 받게 해줬기 때문이다. 파리에 있으면서도 그는 성공회회관, 홍명조씨댁, 외환은행 본관 등을 설계했다. 1975년 주프랑스 미국대사관에서 미국비자(5년)을 받아 LA에서 임시 기거하며 1976년 로드아일랜드 예술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강의했다. 김태원 김중업건축박물관장은 “김중업의 추방을 계기로 건축가들은 동토의 살얼음판을 걸어야 했다. 김중업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엄벌을 감내해야 할 일이었기에 김중업의 제자를 자처하기도 힘든 세월이었다”고 말했다.

김중업이 9년간의 유랑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건 1979년, 박정희가 사망하고 나서다. 쇼핑센터 태양의집(1982), 육군박물관(1983), 중소기업은행 본점(1987), 유작이 된 KBS 국제방송센터(IBC·1988)와 세계평화의문(1988) 등을 설계했다.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당시 저평가된 김중업의 후반기 작업은 최근 젊은 세대로부터 보통의 건물과 달리 규범을 깨는 독특한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며 “김중업의 공간은 지금 세대의 감수성과 조응하는 부분이 있어 후세대 건축가가 이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중업은 고혈압과 당뇨병 합병증을 앓다가 1988년 5월 11일 66세의 일기로 타계했다.



김중업 설계 작품 ‘실감 콘텐츠’로 체험


김중업건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중업 자필공책(위)과 수첩

김중업건축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김중업 자필공책(위)과 수첩


김중업의 생전 일기와 노트, 설계도와 건축모형 등 76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 김중업건축박물관은 김중업 탄생 100년을 기념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한다. 지난 4월 7일 방영된 KBS 다큐인사이트 <자화상, 중업>을 시작으로 김중업 건축 기록화 사업, 기획전시, 국제 콘퍼런스 등이 계획돼 있다.

특히 지난 4월 15일부터 열린 <미디어아키텍쳐: 김중업, 건축예술로 이어지다>는 문화체육관광부와 경기도의 지원을 받아 8억원의 예산으로 제작됐다. 김태원 박물관장은 “국내 최초의 첨단기술을 활용한 건축 실감 콘텐츠 전시”라고 소개했다. 김중업의 대표 건축물을 3D 모형 프로젝션 매핑 기술과 인터렉티브 미디어를 적용해 체험존으로 구성했고, 이를 관람객들이 직접 참여해 건축물의 재질, 색 등을 변화시키며 자신만의 미래도시를 완성해보는 색다른 체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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