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비의 칼과 펜

(1)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피 튀길 때, 웃는 자는 따로 있었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이 소장한 투키디데스 흉상(왼쪽 사진)과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체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 소장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현존 최고(最古) 필사본(10세기 초 제작). 위키피디아

캐나다 로열 온타리오 박물관이 소장한 투키디데스 흉상(왼쪽 사진)과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체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이 소장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현존 최고(最古) 필사본(10세기 초 제작). 위키피디아

기원전 431년부터 27년간 이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아테네인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전쟁사’는 411년경으로 마무리
종전까지 남은 7년은 다루지 않아

기원전 431년 아테네가 이끄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전쟁에 돌입한다. 약 27년 동안 그리스 세계를 휩쓸 긴 피의 쟁투의 시작이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자들이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며 급속히 세력을 키웠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의 승부를 결정지은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와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정점인 살라미스 해전(기원전 480년) 한가운데 아테네가 있었다. 페르시아군이 그리스에서 물러간 후에도 아테네는 전쟁을 계속하기 원했다. 페르시아의 세력권에 바로 맞닿아 있던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와 에게해 섬들이 호응했다. 기원전 478~477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아테네가 그리스 세계의 주도 세력으로 부상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바로 이 아테네가 전통적 강자 스파르타와 충돌한 사건이다.

아테네인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을 기록으로 남겼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가 그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을 직접 경험했다. 그는 암피폴리스 방어전(기원전 424년)의 지휘관이었으며 패전의 책임을 지고 20년간 아테네로부터 추방되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록은 완성에 이르지 못했다. <전쟁사>는 411년경에서 끝난다. 전쟁은 그로부터 7년을 더 끌었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둘러싼 스파르타와 아테네의 경쟁이 어떻게 시작되어 어떤 과정을 거쳐 전쟁으로까지 번지는가에 초점을 맞추어 <전쟁사>를 구성했다. 그는 떠오르는 아테네 앞에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스파르타가 느낀 질투와 공포심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원인이라고 적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가 자신을 압도할까 두려워하고 바로 그 두려움에 떠밀려 전쟁터로 향한다. 아테네는 아테네대로 이미 손에 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권력을 움켜쥐려 발버둥을 친다. 그 가운데 동맹국의 권리는 무시되고 약소국은 짓밟힌다.

투키디데스의 분석과 평가는 패권의 향배를 둘러싸고 강대국이 벌이는 파워게임에 관심을 갖는 논평가들을 매혹시켰다. 2017년 하버드 대학의 그레이엄 앨리슨이 미국과 중국의 경쟁에 잠재한 대규모 충돌의 위험을 경고하며 투키디데스 함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역사적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숨겨진 진실은 없는가?

■페르시아 제국

기원전 500년쯤의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의 확장은 그리스인에게 큰 위협이었다.

기원전 500년쯤의 페르시아 제국. 페르시아의 확장은 그리스인에게 큰 위협이었다.

기원전 499년경 그리스인과 전쟁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페르시아
하지만 수차례 패전 이후에도
동지중해 무역에 힘쓰며 건재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경험과 신빙성 높은 자료를 근거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를 적어 나간다고 썼다. 그러나 투키디데스의 기록은 많은 중요한 정보와 사실을 빠뜨리고 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진정한 모습은 투키디데스가 쓴 이야기들 뒤편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들을 찾아내 함께 읽을 때만 드러난다. 그 쓰지 않은 이야기 중심에 페르시아 제국이 있다.

기원전 6세기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일어난 아케메네스 왕조는 메디아, 리디아, 신바빌로니아, 이집트를 차례로 굴복시키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페르시아 제국이다. 세기말 제국의 지배는 마케도니아와 소아시아 서부 해안지대에까지 미쳤다. 그리스인들의 입장에서는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대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원전 499년경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던 소아시아 해안지대의 그리스인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에 본토의 그리스 도시들이 호응함으로써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이 열렸다. 연이은 페르시아의 침공은 그리스인들에 의해 번번이 격퇴되었다. 전쟁은 그리스인들의 승리로 끝났다.

심지어 전문 역사가조차 저지르는 실수는 이 시점부터 고대 그리스인들의 역사에서 페르시아 제국이 사라졌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침공 실패 이후에도 페르시아는 건재했다. 제국은 여전히 소아시아, 레반트(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팔레스티나 지역), 이집트를 지배하며 동지중해를 가로지르는 상업망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에도 그리스인들에게 페르시아의 위협이 여전히 진행형이었음을 의미한다.

기원전 466년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페르시아가 그리스 세계를 상대로 어떤 군사적 모험도 감행하지 않았음은 사실이다. 침공 실패로부터 페르시아는 그리스 세계를 무력으로 병합하기가 쉽지 않음을 깨달았다. 큰 비용을 들여 그리스 세계와의 대결을 또다시 준비하는 것보다는 동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무역에 힘을 쏟는 것이 남는 장사이기도 했다. 그리스가 그리 탐나는 땅도 아니었다. 올리브와 포도, 솜씨 있는 선원과 중장보병(용병으로서 해외에서 꽤 인기가 있었다) 외에 특별히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력 판도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하나로 뭉쳐 있던 그리스 세계가 분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국의 반격

460년 스파르타와 아테네는 각자의 동맹국들을 이끌고 전쟁에 돌입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아테네는 이집트에서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기를 든 이나로스에게 원군을 파견한다. 스파르타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병력 일부를 돌려 해외에 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자신감과 야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투키디데스는 원정군의 규모를 삼단노선 200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충 계산해도 4만명이 넘는 대군이다. 절반은 동맹국에서 차출되었다 해도 아테네는 2만명 가까운 병력을 이집트로 보낸 셈이다. 같은 해 아테네 해군은 동지중해 전역에 걸쳐 군사작전을 벌였다. 아테네의 의도는 분명했다. 반란군을 도와 이집트에서 페르시아 세력을 꺾는 것은 작은 목표였다. 궁극적으로 아테네는 에게해를 벗어나 동지중해로 진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6년 원정의 끝은 비참했다. 페르시아에 이집트는 변방의 그리스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했다. 이집트는 곡창이었고 문화의 중심지였다. 페르시아 해군이 기동하는 데 필요한 항구를 제공했다. 잃어버려도 좋은 곳이 아니었다. 페르시아의 대군은 순식간에 아테네 원정군을 압도했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자가 거의 없었다고 적었다.

아테네는 동지중해에서 빠르게 밀려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아테네의 지도력에 대한 회의가 퍼져나갔다. 아테네는 동맹의 공동금고를 델로스섬에서 자신에게 옮겨 왔다. 페르시아의 침공이 두려운 상황에서 에게해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들리는 동맹국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자금원을 직접 통제할 필요도 있었다.

아테네의 공세는 끝이 났다. 판도가 역전되었다. 아테네는 전략을 수정한다. 기원전 449년 아테네는 페르시아와 칼리아스 화약을 맺는다. 동지중해에서 군사활동을 포기하는 대가로 페르시아로부터 에게해와 소아시아 해안 지방에 뻗어 있는 자신의 세력권을 인정받는다. 스파르타와도 30년 평화조약을 맺는다. 스파르타와 페르시아를 상대로 양면전을 벌인다는 것이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이 무렵 아테네를 이끌던 페리클레스는 깨닫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와의 대결을 끌수록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에게해로 돌아올 기회가 커진다는 점을 그는 이해하고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전쟁 중인 아테네·스파르타에
페르시아의 지지는 매우 중요
성급할 필요가 없던 페르시아는
양국이 서로 물어뜯기를 부추겨
오랜 전쟁으로 그리스는 쇠진
페르시아에 맞설 힘도 잃게 돼

세기 초에 페르시아에 맞서 모습을 드러냈던 단합된 그리스 세계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질 무렵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제국의 대결이라는 단순 명료한 구도는 사라졌다. 이제는 세 세력이 마주 보고 있었다. 전략적 계산이 훨씬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이런 전략적 지형에서 전개되었다. 치열하게 각축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동지중해의 최대 강국 페르시아의 지지는 매우 중요했다. 페르시아가 어느 편에서 개입하느냐에 따라 전쟁의 흐름은 크게 바뀔 것이기 때문이었다. 페르시아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적어도 적의 편에 서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를 띠고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사절들이 페르시아의 궁정으로 떠났다.

페르시아로서는 성급히 어느 편을 들 이유가 없었다. 분열된 적을 다루는 데 페르시아는 아주 익숙했다. 어차피 그리스 도시들이 서로를 파괴하는 것은 페르시아에 유리한 일이었다.

페르시아가 전쟁에 뛰어든 것은 기원전 413년 아테네가 시칠리아 원정에서 함대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전쟁의 추가 스파르타 편으로 기운 후였다. 심지어 이때도 페르시아는 전쟁을 끝내기보다 스파르타와 아테네 사이에서 적당히 줄을 타며 양쪽이 더 오래 서로를 물어뜯도록 부추겼다. 적으로써 적을 제압하는 이이제이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오랜 전략적 지혜였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항복한다. 그러나 승자는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표적으로 다시 한번 노회함을 발휘했다. 코린토스, 테베, 아르고스가 스파르타에 반기를 들도록 부추겼으며 아테네가 신속히 해군을 재건하도록 도왔다. 그 결과로 기원전 395년 코린토스 전쟁이 발발했다. 안탈키다스 조약을 통해 기원전 387년에야 끝난 이 전쟁은 한 세기에 걸친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 간 파워게임의 마지막 장이었다. 전쟁 처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세스 2세의 뜻에 좌우되었다. 기나긴 전쟁으로 그리스 도시들은 소진되었다. 페르시아에 맞설 힘이나 의지는 그들에게 없었다. 제국의 변방에 안정이 찾아온 것이다.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의 도시들에 대한 지배권도 고스란히 회복했다. 이 모든 것은 약 110년 전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로 출병하며 세웠던 목표였다.

■투키디데스를 다시 생각하다

투키디데스가 쓴 ‘전쟁사’는
그리스 중심주의가 반영
페르시아를 ‘행인1’처럼 다루고
진실의 중요한 부분 가렸지만
가려진 진실엔 페르시아가 존재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세계는 소아시아, 레반트, 이집트를 축으로 동지중해에 구축된 페르시아 제국 세력권의 서북쪽 변방이었다. 물론 그리스인들은 스스로를 변방의 존재로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유라는 가치를 내세웠고 그 가치의 수호자로서 자신들의 세계를 그렸다. 그들에게 페르시아 전쟁은 자유를 지켜낸 세계사적 투쟁이었다.

투키디데스의 <전쟁사>는 그런 그리스 중심주의를 반영한다. 그는 시야를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고정했다. <전쟁사> 대부분에서 페르시아는 마치 ‘행인 1’처럼 등장한다. 페르시아가 전쟁에 뛰어든 기원전 412년 이후에도 투키디데스는 페르시아를 일관된 전략 없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정과 행동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그린다.

여기에는 물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투키디데스는 클레온이나 알키비아데스 같은 야심가들의 무책임한 선동이 아테네의 쇠퇴와 패배의 원인이라고 여겼다. 그는 국가가 합리적인 지도력을 결여할 때 어떤 비극이 오는지 알리고자 했다. 그런 만큼 그의 눈은 아테네 내부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세계 내의 사건 전개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쓰인 <전쟁사>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모습을 뒤틀어 놓았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전체와 4세기 초에 걸쳐 그리스 세계와 페르시아가 벌인 쟁투의 드라마는 패자였던 그리스인들의 시각을 빌려 기억되어 왔다. 영화 <300> 같은 할리우드 오락물은 2500년 전 그리스인들의 시각이 여전히 살아남아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역사의 진실의 중요한 부분은 가려졌다. 가려진 진실의 중심에는 오래전 사라진 한 제국이 있었다. 페르시아였다.

▶윤비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윤비의 칼과 펜](1)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피 튀길 때, 웃는 자는 따로 있었다

정치이론을 역사 및 문화와 관련지어 연구한다. 베를린 훔볼트대 정치학과 및 역사학과, 서울대 외교학과에서 서양정치사상을 강의하였다. 가르친다는 일을 영광으로 여기며 산다. 2021년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독일에서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2018~2020년 한겨레 신문에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를 연재하였고, EBS <지식의 기쁨> <세바시> 등에서 강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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