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 없어지는 순간까지 닳지 않는 비누가 있어

도재기 선임기자

스페이스 씨 개관 20주년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

‘비누 조각’ 30년 가까이 깎고 주무른 신미경 작가

고전 조각 복제·풍화 작품부터 화장실 프로젝트까지

일상용품의 변신…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권위 되물어

신미경 작가가 스페이스 씨에서 기획초대전을 열고 있다. 사진 위는 작가의 작품들과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이 함께 선보이는 전시장 전경 일부, 아래 오른쪽은 작가의 회화같은 비누 조각인 ‘페인팅 시리즈’, 왼쪽은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1998, 비누, 178×65×41㎝·).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미경 작가가 스페이스 씨에서 기획초대전을 열고 있다. 사진 위는 작가의 작품들과 코리아나미술관 소장품이 함께 선보이는 전시장 전경 일부, 아래 오른쪽은 작가의 회화같은 비누 조각인 ‘페인팅 시리즈’, 왼쪽은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1998, 비누, 178×65×41㎝·).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비누 조각’으로 국내외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 신미경(56)의 작품전은 늘 흥미를 자극한다. 그는 유학한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30년 가까이 비누를 깎고 붙이고 녹이고 주무르며 작업 중이다.

유명 고전 조각을 ‘복제’해 원본과 복제, 역사적 권위와 문화적 가치의 의미를 되묻는다. 때로는 공공화장실에 조각을 둬 불특정 다수가 사용하게 함으로써 예술작품 ‘비누 조각’과 일상용품 ‘비누’의 경계를 질문한다.

생활제품 비누를 신 작가는 자신만의 철학·미감으로 예술작품화한다. 비누의 본래 기능·역할을 뒤엎고, 비누의 사라질 시간을 정지시켜 일상제품과 예술작품, 역사적 유물과 현대적 미술품, 조각과 회화, 고전과 현대, 원본과 복제, 박물관과 미술관, 동서양의 경계를 넘나든다.

갖가지 생각을 촉발시키고 주변 사물들을 새삼 쳐다보게 하며 시간과 물질의 본질까지도 되새김질시킨다. 물론 그의 작품은 저마다의 비누 향을 품어 세계 어느 곳이든 작품이 있는 곳은 향기롭다.

신미경의 신작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 비누·향·안료·프레임, 각 200 ×160×5㎝) 전시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미경의 신작 ‘라지 페인팅 시리즈’(2023, 비누·향·안료·프레임, 각 200 ×160×5㎝) 전시 전경.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 작가가 대규모 작품전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을 스페이스 씨(서울 언주로)에서 열고 있다. 올해로 개관 20주년을 맞은 스페이스 씨가 마련한 기획 초대전이다. 스페이스 씨는 코리아나화장품 창업자 유상옥 회장이 2003년 개관(건축가 정기용 설계)했다. 한국 화장문화 유물을 선보이는 코리아나화장박물관과 코리아나미술관이 함께 자리한다. 유승희 관장은 “그동안 미술관은 80여회의 기획전을 열었고, 화장박물관은 국내는 물론 프랑스·영국·미국 등 해외에서 기획전을 꾸준히 열어오고 있다”며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또 함께 하는 문화공동체 구축에 힘쓰고 있다”고 밝혔다.

‘시간/물질-생동하는 뮤지엄’은 코리아나미술관·화장박물관의 총 4개 전시실에 마련됐다. 신 작가 작품과 코리아나미술관·화장박물관이 소장한 근현대 미술품·전통 화장유물이 함께 어우러진 공간들도 있다. 신 작가는 모두 120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1990년대 후반 초기작부터 그동안 주목받은 주요 시리즈들, 70점의 신작까지 나온 대규모 전시다.

미술관 지하 1층 전시실에서는 ‘라지 페인팅 시리즈’가 관람객을 맞는다. 이전 ‘페인팅 시리즈’의 확장판으로 추상화처럼 보이는 신작 조각이다. 각 작품은 200×160㎝ 크기로 대형 회화 같지만 작품마다 100여㎏의 비누를 녹여 특수제작한 틀에 붓고 색과 향을 더하며 다듬었다. 서로 다른 비누들이 한 몸이 되면서 드러나는 무늬, 색감, 질감이 독특하다. 작가의 고된 노동과 긴 시간, 비누 용액이 섞이는 과정에서의 우연성이 녹아든 작품이다.

바닥에는 ‘풍화 프로젝트’ 신작들이 놓였다. 시간의 흐름, 사람들의 손길에 따라 변형된 비누 조각을 레진·브론즈로 캐스팅(주물)한 작품들로 비누의 가변성·시간성을 박제화해 마치 고대의 유물 같다.

지하 2층 전시실은 서양 회화·조각과 신 작가의 작품들이 한자리에 어울려 200여년의 시간이 공존한다. 코리아나미술관의 로코코·낭만주의 계열 컬렉션과 이에 영감을 받은 작가의 신작 ‘낭만주의 조각 시리즈’, 또 ‘페인팅 시리즈’와 그리스 조각상을 재해석해 고전의 권위를 해체·전복시킨 ‘번역 시리즈’ 등 초기 작품들이다. 벽에는 프랑수아 부셰 등의 회화, 신 작가가 수집한 골동품 액자 속에 그림 대신 비누 작업을 한 ‘페인팅 시리즈’(2014~2023)들이 나란히 걸렸다.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 ‘스페이스 비너스’(1984, 청동, 코리아나미술관 소장)와 신미경의 ‘페인팅 시리즈’가 전시장에 어우러져 있다.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살바도르 달리의 조각 ‘스페이스 비너스’(1984, 청동, 코리아나미술관 소장)와 신미경의 ‘페인팅 시리즈’가 전시장에 어우러져 있다.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살바도르 달리·미셸 클로드의 조각과 ‘번역 시리즈’인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1998) 등도 있다. 비누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든 등신상인 ‘트렌스레이션-그리스 조각상’은 20여년이 지나면서 변색이 되는 등 박물관이 소장한 고귀한 유물 같아 눈길을 잡는다.

전시는 5~6층의 화장박물관 상설전시실로 이어진다. 삼국시대의 갖가지 장신구와 고려시대 청동거울(동경)·화장도구와 용기 등 유물들이 신 작가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 ‘풍화 프로젝트’와 따로 또 같이 어우러진 독특한 공간이다. 청동거울과 나란히 전시된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는 수백년의 시간을 품고 역사적 맥락을 같이하는 문화재 같다. 사실은 비누로 만든 도자기에 은·동박을 입혀 긴 세월을 품은 듯 보이게 했다.

고려시대 청동거울(코리아나화장박물관 소장)과 신미경 작가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비누에 은박·동박)가 함께 전시된 모습(사진 위), 사진 아래 오른쪽은 ‘고스트 시리즈’(2007-2013, 총 19점, 비누·바니쉬, 가변 크기), 왼쪽은 ‘풍화 프로젝트 시리즈’(2023, 총 13점, 청동, 가변크기). 코리아나미술관 제공·도재기 선임기자

고려시대 청동거울(코리아나화장박물관 소장)과 신미경 작가의 ‘화석화된 시간 시리즈’(비누에 은박·동박)가 함께 전시된 모습(사진 위), 사진 아래 오른쪽은 ‘고스트 시리즈’(2007-2013, 총 19점, 비누·바니쉬, 가변 크기), 왼쪽은 ‘풍화 프로젝트 시리즈’(2023, 총 13점, 청동, 가변크기). 코리아나미술관 제공·도재기 선임기자

진짜 유물과 유물 같은 현대조각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유물과 현대미술품, 원본과 복제, 박물관과 미술관 등의 경계와 본질을 되새기게 한다. 화려한 색감과 매끈한 질감으로 페르시안 유리 공예품 같은 도자기들은 투명 비누로 도자기를 캐스팅해 속을 파냄으로써 투명함을 강조한 ‘코스트 시리즈’다.

한쪽에는 공용 화장실에서 누구나 비누 조각을 사용하게 한 ‘화장실 프로젝트’ 결과물도 있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세밀하게 조각된 우아한 여인 두상은 최근 5개월간 백화점 화장실에서 사용돼 외계인 머리처럼 매끈한 타원형으로 변형됐다.

현재 전시장의 4곳 화장실 세면대 옆에 놓아 누구나 비누로 쓸 수있는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 조각(왼쪽)과 지난 5개월간 백화점 화장실에서 진행됐던 ‘화장실 프로젝트’의 결과물.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현재 전시장의 4곳 화장실 세면대 옆에 놓아 누구나 비누로 쓸 수있는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 조각(왼쪽)과 지난 5개월간 백화점 화장실에서 진행됐던 ‘화장실 프로젝트’의 결과물. 코리아나미술관 제공

신미경 작가의 ‘라지 페인팅 시리즈’와 ‘풍화 프로젝트’가 전시된 모습(왼쪽)과 작업 중인 신미경 작가. 코리아나미술관 제공·도재기 선임기자

신미경 작가의 ‘라지 페인팅 시리즈’와 ‘풍화 프로젝트’가 전시된 모습(왼쪽)과 작업 중인 신미경 작가. 코리아나미술관 제공·도재기 선임기자

‘화장실 프로젝트’는 전시장 4곳의 남녀 화장실에서 진행 중이다. 관람객들은 세면대 옆에 놓인 정교한 조각을 비누의 본래 역할을 되찾아 마음껏 쓸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내 손을 씻기며 닳아진 그 비누 조각상을 미술관 전시장에서 만날 것이다. 전시는 유료이며 6월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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