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 문학관도, 공원도, 거리도 하지 마라”···‘난쏘공’ 조세희에게 진 빚

송경동 시인
송경동 시인은 조세희 작가 별세(2022년 12월 25일) 이후 마음이 아파 추모글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2023 길동무 청년문학학교’(22일 개학)를 준비하며 펜을 잡았다. 학교 강사이자 실무자인 그는 “학교 일을 조 선생님에게 빚을 갚는 걸로 여기고 있다. 세상에 덜 알려진 선생님 마음과 일화를 전해야겠다”며 추모글을 보냈다.

조세희 선생님은 한사코 강의료를 받지 않으셨다. 매번 뒤풀이까지 참여해 주시고 늦은 시각 택시를 타고 가셨는데, 그때마다 택시 뒷문을 열고 강의 사례비 봉투를 던져 넣곤 했다. 다음 번 강의에 오셔서는 “앞으로는 그러지 않는 게 좋아!”라고 정중히 꾸짖곤 하셨지만, 우리 역시 지지 않았다. 지금은 가산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뀐 구로공단 한 귀퉁이에서 구로노동자문학회를 열 때다. 내가 다른 작가, 활동가와 함께 만든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현 ‘삶창’)이 나오기 전이었고, 선생님이 <당대비평> 편집인을 맡으시기 전이었으니 1996년쯤이었을 것 같다.

사람들은 “시대가 변했는데 아직도 그러고 있니?”라며 걱정스럽게 묻곤 했지만 꿋꿋했다. 현실사회주의가 패망하고 한국사회에 처음으로 문민정부가 들어서기도 했지만 현실의 소외와 모순, 착취와 독점, 차별과 폭력의 문화는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포와는 다르게 현실은 냉혹해서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좌표를 잃고 표류하는 작은 배에 누워 탈진해 가는 듯한 기분이 들던 때였다.

그해 노동자문학학교를 준비하면서는 부를 수 있는 강사진도 잘 떠오르지 않았다. 대중 강좌이다 보니 조금은 알려진 작가들에게 부탁해야 했는데, 전화할 때마다 “노동자문학회라고요?” 하며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으로 반응하던 목소리들이 다수여서 연락하기가 두렵기도 했다. 그때 문득 조세희 선생님이 떠올랐다. 선생님은 당시에도 최상층에 속하는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근래는 그런 이들을 일러 ‘문화 권력’이라고 표현도 한다. 그런 분이 이렇게 쪼그라든 노동자문학회 강의를 맡아주시겠어. 그것도 쥐꼬리만 한 강의료밖에 못 드리는데…. 한번 연락이라도 드려보자고 했는데, 의외였다. 물론 선생님은 우리가 아직도 해묵은 ‘노동자문학’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계신 상태였는데, 그게 더 갸륵하게 보였던 거 같다. 대중 강좌는 아예 안 하신다는데 노동자문학회라고 하니 와 보시겠다고 했다. 대신 강의료는 필요 없으니 그냥 오시겠다고 했다. 한 번으로는 서로서로 알기 힘드니 몇 번을 해보자고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 처지에서는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수백만 원을 준다 해도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며 어떤 대중 강연 자리에도 잘 나서시지 않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세대를 넘어 ‘친구’가 되었다

들어가 앉을 자리가 없어 새로 온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고 나는 문밖에서 귀를 세우고 강연을 들었다. 선생님은 조용조용하게 말씀하셨지만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변화무쌍했다. 때론 파도처럼, 때론 슬픈 비처럼, 때론 쨍쨍한 여름 볕처럼, 때론 차디찬 빙벽처럼 퍼붓던 그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강인한 말들의 향연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아, 이런 걸 두고 비판적 지성이라고 하는구나’를 배운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선생님을 만나 우리는 세대를 넘어 ‘친구’가 되었다.

조세희 작가(오른쪽)는 여러 노동 현장을 찾았다. 연단이나 대열 맨 앞에서 서는 일은 없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 활동가들을 만나 응원했다. 사진은 조 작가와 송경동 시인이 2018년 3월 중순 어느 날 서울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서 고공농성중이던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대자보를 들고 선 모습을 담았다. 사진 속 앉은 이는 정택용 작가다. 노순택 작가가 촬영했다. 해고노동자들은 426일 동안 농성했다. 사진 촬영 노순택  작가.

조세희 작가(오른쪽)는 여러 노동 현장을 찾았다. 연단이나 대열 맨 앞에서 서는 일은 없었다.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노동자들, 활동가들을 만나 응원했다. 사진은 조 작가와 송경동 시인이 2018년 3월 중순 어느 날 서울 목동의 열병합발전소 75m 굴뚝에서 고공농성중이던 파인텍 해고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대자보를 들고 선 모습을 담았다. 사진 속 앉은 이는 정택용 작가다. 노순택 작가가 촬영했다. 해고노동자들은 426일 동안 농성했다. 사진 촬영 노순택 작가.

선생님은 강좌가 끝나고도 인연을 놓지 않으셨다. 내가 끝내 택시 뒷문을 열고 던지면서까지 최소한의 예를 갖추려고 했던 당시 강의료는 그 해 노동자문학회 행사 때 찾아오셔서 고사상 돼지머리에 후원금 명목으로 꽂아 주셨다. ‘나중엔 제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라고 마음속으로 약속드렸던 것 같다. 지금 준비하는 ‘길동무 청년문학학교’는 세월을 다시 훌쩍 지나 그 당시 선생님께서 도와주시려고 했던 ‘청년’들에게 다시 선생님의 마음을 전달해 드리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도 나는 중간 실무자나 전달자 역할일 뿐, 지금은 그 귀한 마음을 여든을 넘기시고도 푸르른 청년의 마음을 잊지 않으시는 염무웅 선생님과 김판수 선생님께서 내어주고 계신 게 다를 뿐이다.

조세희 선생님은 자신의 문학을 고귀한 생명의 사회적, 역사적 존엄을 지키기 위한 무기로 생각했다. 몇몇 자리나 글에서 표현하셨듯이 그는 “인간의 기본권이 말살된 ‘칼’의 시간에 작은 ‘펜’”으로 저항을 준비했다. 이 선을 넘으면 위험하다고, 여기부터는 벼랑이라고 적었다. “이런 슬픔, 이런 불공평, 이런 분배의 어리석음이 미래에는 없기를” 바라는 시대의 경계표지, 주의표지를 열두 개의 단편으로 정리했다. 그 주의표지에는 우리 시대의 약자, 가난한 자, 소수자, 소외당하고 핍박받는 모든 이의 분노와 설움이 투명한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게 적혀 있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그들의 분노와 사랑과 이상이 간결하고 투명한 문체로 함축되었다. 시대의 약자들은 난장이로, 꼽추로, 앉은뱅이로 상징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몸이 작고, 구부러졌다고 누구나 갖는 존엄한 ‘인격의 양’까지, ‘생명의 양’까지 작은 것은 아니었다. 1978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그렇게 세상에 태어나 40여 년이 지나도록 어두운 바다 위의 등대처럼 빛나며 한 시대의 파수병 역할을 고단하게 수행하고 있다.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노무현 정권 당시 신자유주의 농수산물 식량 개방에 반대하는 농민 집회 때도 기억난다. 그날 전국농민 집회가 열린 여의도 광장에서 두 명의 농민이 침탈에 나선 공권력의 무자비한 곤봉과 방패에 찍혀 돌아가셨다. 전용철, 홍덕표 농민이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려왔고, 여기저기서 머리가 깨지거나 실신한 사람들을 들어 날리고 있었다. “선생님! 조심하셔야 해요.” 그날, 물대포에 온몸이 적셔진 채로 그 광장에서 혼비백산 나처럼 뛰어다니고 있는 선생님과 몇 번이나 만났다 헤어졌다. 그날 이후 그 무자비한 공권력 타살에 대한 항의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는 많은 자리에서 늘 선생님을 마주쳤다. 그날을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기억하셨다.

“2005년 11월 15일에 나도 여의도에 있었어요. 그날 농민 하나가 1001.1002.1003 중대, 그 진압작전에 의해서 희생을 당했고 나도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서 카메라 하나 망가지고 문화마당 쪽에서 그 차디찬 물에 흥건히 젖어서 겨우 살았구나 그러고 숨 돌리고 있을 시간에 문화마당까지 경찰들이 진입해 왔어. 그래서 문화마당에서 끔찍한 진압작전을 진행하는 와중에 전용철 농민이 거기서 희생을 당한 거야. 그때 나는 문화마당 잔디밭에서 옷을 짜면서 카메라 어떤 게 죽었나 체크하고 그러고 있었지. 그러지 않고 현장에 내가 전용철 농민을 가까이서 사진을 찍고 있었으면 나는 그때 죽었어. 그러면 무슨 말이 가능해? 브레히트 시인의 말에 “나는 운이 좋아서 살아남았다” 그런 시가 있어요. 내가 늘 그 생각을 해요.”(박수정 작가 정리)

2008년 KTX비정규직 여승무원들의 농성장과 기륭전자 여성비정규직의 농성장을 찾던 선생님의 모습도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하다. 그 많은 현장에서 만나면서도 난 선생님을 모시고 밥 한 끼, 술 한잔하시자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가끔 선생님께서 목이 칼칼하다고 맥주 한 캔 씩 먹고 헤어지자던 때가 있긴 했다. 대열 옆 어느 화단가에서 맥주 한 캔씩을 들이키던 그때가 어제 같다. 선생님보다 그 현장과 그 현장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 더 소중했던가 보다. 어려서 그랬을 터다. 5월 1일, 메이데이 집회 현장이나 11월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 현장에도 어김없이 선생님은 함께 하셨다. 그 모든 현장에서 선생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가끔은 연단이나 대열 맨 앞에서 지도자입네 허세를 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기 조세희 선생이 있다’라고 한 번쯤 외쳐주고 싶을 때가 참 많았다. <난쏘공>의 작가는 늘 그렇게 평범했고 낮았다.

2009년 용산에서 철거민 다섯 명이 불타 죽던 날 늦은 밤 통화도 잊을 수 없다. 현장 상황을 물으셨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경동이가 그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라는 말씀이 얼마나 기운이 되었는지 모른다. 용산참사 첫날, 인근 철도노조 사무실을 빌려 대책회의를 하곤 시민들에게 현장으로 와 달라고 긴급 타전을 쳤다. 엠프 등 실무 준비를 해두니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긴급히 잡은 추모제 프로그램이 없으니 추모 시를 하나 쓰자고 했다. 다시 철도노조 사무실로 달려가 컴퓨터 한 대를 빌려 무슨 말들인가를 써 내려 갔던 것 같다. 울부짖었던 것 같다. 시 낭송을 마치고는 참사 현장으로 달려 온 분노한 사람들과 함께 수십 겹 경찰 방어막을 뚫고 청와대까지 내달렸다. 중간에 시청 광장 앞쪽에서 경찰 방어막에 막힌 대오가 명동성당으로 턴했다. 그곳에서 투석전이 일어났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던 칠흑 같던 밤이었다. 고마웠다. 이렇게 칠흑 같은 밤에, 이렇게 참담한 밤에, 그 밤을 기억하며 연락을 해오는 ‘동지’가 있다는 것이 눈물겨웠다. 선생님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이건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어떤 일이든 필요한 일이 있으면 자신의 이름을 적고, 불러라”고 하셨다.

조세희 작가가 2009년 1월21일 저녁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세희 작가가 2009년 1월21일 저녁 서울 용산 참사 현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선생님은 그때 이미 4시간 간격으로 수전증이 온 손안에 한 움큼이나 되는 약을 모아 털어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몸이셨다. 며칠 후 허락도 받지 않고 비공개로 기자들을 모아 선생님 댁 앞으로 무조건 쳐들어갔다. “경솔한 일”이라고 나무라셨다. 근처 빈 밥집으로 기자들을 모았다. 가셔서는 단 한 점의 물러섬도 없이 용산 철거민 학살이 어떤 일인지를, 우리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다.

“분향소를 세웠다면서, 잘했어. 가서 꽃이라도 하나 놓아야 되지 않겠니.” 다시 댁으로 들어가 약봉지를 잔뜩 챙겨 나오신 선생님을 택시에 태우곤 용산참사 현장으로 달리던 그 겨울 저물녘 한강 변도 잊을 수가 없다.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에 의해 저지되었지

그렇게 투병 중인 몸을 이끌고 길 나서던 선생님이지만, 그 당시 “조세희가 나타났다”며 환호하면서 개인적인 인터뷰를 요청하던 KBS, SBS, MBC 등을 비롯한 모든 방송언론의 섭외에는 단 한 건도 응하지 않으셨다. 어쩌다 보니 선생님과 관련된 모든 연락이 내게 올 때라 잘 기억하고 있다. 특집 마당을 꾸리겠다, 스페셜 마당을 몇 부작으로 꾸며보려고 하는데 허락을 받아 달라, 조건은 선생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겠다 등등 모든 언론의 섭외 요청을 전달 드리면 그때마다 하셨던 말씀은, “그런 건 좋지 않아. 내 세대는 반성해야 할 사람들이야. 더 좋은 세상을 만들지 못하고 우리는 패퇴했어. 나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야. 조용히 내가 꼭 가야 할 때가 있으면 그런 거나 얘기해 줘”였다. 그리곤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곤 하셨다.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어.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어. 제3세계의 많은 나라가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지. 우리는 그것의 목격자야.” “우리 세대들은 실패하고 말았어. 그것이 늘 경동이 같은 세대들에게 미안해. 우리가 조금만 더 잘했다면 경동이와 같은 세대들이 지금 하는 고생을 조금은 덜 수 있었겠지. 그것이 늘 미안해. 하지만 어쩌겠어. 돕지는 못하지만 경동이의 세대들이 기운을 잃지 말아야 해.”

한번은 선생님께서 가장 신뢰하던 사진가 노순택 형과 별 정신없는 나를 따로 부르신 적이 있다. 경기도 양평 산골짜기에 있는 생가 마을을 가는데 함께 동행해 달라는 특별한 부탁이셨다. 당시 양평군에서는 선생님의 생가 마을에 ‘조세희 문학관’을 세우겠다는 그럴듯한 제안을 해오고 있었다. 집성촌이라 모든 일가친척들이 종친회를 이루고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한참을 달려도 시골 점방 같은 것 하나도 안 나오는 벽촌의 산기슭 마을이었다. 그곳에 수십억 원의 돈이 들어오고 ‘조세희 문학관’을 세워 준다니 종친회와 일가친척들이 무조건 해야 한다고 압박이 무척 심하시다고 했다. 자신이 흔들릴 것 같아 자네들을 부른 거라고 의견을 말해달라고 하셨다. 이미 본인은 마음 결심이 서셨기에 우릴 부러 부른 거라는 걸 알아 더 말할 게 없었다. 돌아오는 어느 길 변에 차를 세우고 담배 한 대를 태우시며 노욕이 되거나 추해지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지 한마디 하셨다. 시간이 좀 흐른 후 제일 가까운 혈육인 외조카께 물어보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사북탄광지역으로 내려가게 하거나, <노동해방문학>이 만들어지던 때 주요한 활동가로 결합하게도 했던 ‘만년 삐라쟁이 시인’ 김명환 형(전 철도노조 편집실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모르고 있었다. 가까운 가족들에게도 모두 알리지 않은 일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현재 ‘단군 이래 최대의 재건축사업‘이라며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둔촌동 주공아파트에서 40여 년을 사셨다, 건물 벽에 금이 쩍쩍 가 있어 말년엔 어떤 폐가보다 위험하게 보이던 아주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다. 비로소 재건축 논의가 시작되었을 때 주변의 후배 작가들이 나서서 주공아파트가 재개발되면 그곳에 최소한 ‘조세희 공원이나 거리’ 정도는 남겨야 하지 않겠느냐고 추진에 나서겠다고 했었다. 그 모임에도 두어 번 선생님께서 부르셔서 노순택 형과 함께 갔던 기억이 난다. 왜 굳이 우릴 불렀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 또한 한사코 말리셨던 거로 안다. 그 정도는 받으셔도 될 일 아닌가 선생님이 훌쩍 떠나고 나니 문득 아쉽게 생각되기도 했다.

■인간과 사회의 존엄을 기록하는 문학

그렇게 한국 문학의 또 하나의 금자탑이자, 사회적 이정표로 언제라도 곧게 서 있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님은 갔다. 비정규직이 1100만 명에 달하는 이 참혹한 세상에서 자신들만 행복해하는 자들은 ‘도둑 아니면 바보’라는 간명한 말씀도 남겨 주셨다. ‘힘은 적에게 주어버리고 빛나는 이성을 택하라’는 말씀도 기억에 생생하다.

“20세기 말에 나타난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중의 하나가 마르코스야. 그런데 그 마르코스는, 보통 다른 남미의 혁명가들은 총을 메었거든. 칼을 들고. 그런데 이 사람은 펜을 메었어. 그 사람은 컴퓨터를 갖고 혁명을 하려고 그랬던 사람이야. 그 사람이 한 말 중에 ‘여러분이 이성과 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여러분 자신은 이성을 갖고 적에게는 힘을 주어버려라’ 그랬어요. 그러면 ‘그 적은 그 힘으로 전투에서는 이길 것이다. 힘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지만 전쟁에서 이기는 것은 이성을 가진 여러분이다’ 즉 우리라고 치자고. 우리는 우리의 이성으로서 힘을 만들 수 있지만 적은 그 힘으로 이성을 만들 수 없어. 그러니까 폭력적인 싸움에서는 이기더라도 이성적인 전투, 큰 전쟁에서는 우리가 이긴다는 거야.”

이런 말씀도 하셨다.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생님께서 늘 늦가을 낙엽 같은 어조로 하시던 말씀이기 때문에 낯익은 말인데도 새롭다. 그럼 누가 이 길로 들어서겠냐고 아니라고, 아니라고 항변해 보고 싶기도 했던 말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문학은 이기는 일을 상상하는 일보다 지기만 하면서도 멈출 수 없는 싸움에 나서는 장엄한 난장이들의 싸움을 기록하는 아픈 숙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배제당하거나 탄압받는 사회적 약자들이 쓰러지거나 몸부림치고 있는 사건과 현장, 그곳에서 일어나는 고통과 못다 한 말들을 좇는 아픈 여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그 역사적 어둠의 시대에서도 끝내 가릴 수 없이 새어 들어오는 한 줄기 가느다란 빛 같은 인간과 사회의 존엄을 기록하는 숭고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당분간 우리는 모든 싸움에서 지기만 할지 모르지만, 나 자신에게만은 지지 말자고 각오하며 살아왔었는데…’ 잘 사는지 모르겠다. 며칠 전 밤에도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고, 마치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내가 비겁하고 나약하게 느껴져서 새벽에 일어나 혼자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우리 세대만큼은 선생님의 세대들처럼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아도 될 세상을 가져보아야 할 텐데, 자꾸 나 또한 ‘빛나는 이성’이 아닌 그릇된 힘이나 적당한 타협과 기생을 꿈꾸는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되어가는 건 아닌지 부끄럽고 미안해진다.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더라는 체념에나 빠져 적당히 냉소적인 시인 흉내나 내며 낡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부끄럽다.

그런 나를 반성하는 마음으로 함부로 쓰고만 서툰 내 글의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선생님의 말씀을 남기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이십 수년 전 선생님께서 이젠 그 누구도 잘 찾아오지 않던 구로공단의 한쪽 구로노동자문학회에 찾아와 설익은 문학청년이던 우리에게 들려주시던 그 말씀과 다르지 않다. ‘길동무 문학학교’에 찾아오는 어떤 청년이(물리적 나이만이 아닌!) 다시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겨 넣어준다면 정말 좋겠다.

“냉소주의에 빠지지 말자. 그런 말은 또 한 번 써 줘요. 냉소주의는 우리의 적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빠지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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