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근우의 리플레이

분노 입력, 폭력 출력…자극적 이미지에 ‘난감’한 개연성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은 원작의 주요 문제의식 자체를 배신하는 연출을 보인다. 이는 작품이 내세우는 도덕적 딜레마에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어렵다.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드라마 <살인자ㅇ난감>은 원작의 주요 문제의식 자체를 배신하는 연출을 보인다. 이는 작품이 내세우는 도덕적 딜레마에 시청자를 끌어들이기 어렵다. 넷플릭스 제공

웹툰 <살인자ㅇ난감>이 넷플릭스를 통해 영상화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우려했던 건 두 가지다. 첫째, 원작이 너무나 만화적이라는 것. 살인과 불법촬영, 강간 등 온갖 흉악한 범죄와 악의가 넘쳐나는 작품 속 세계에서 꼬마비 작가 특유의 이등신 캐릭터와 네 컷 만화 형식을 이용한 간결한 연출은 이야기의 심각성과 문제의식을 유지하되 반사적 혐오 반응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의도치 않게 죽인 이들이 알고 보니 법망을 피해온 인간말종이더라는 주인공 이탕의 능력을 비롯해 <살인자ㅇ난감>의 설정과 반전 상당수는 일종의 사고 실험에 가까우며 이러한 만화적 형식을 통해 범죄의 잔혹성에 매몰되지 않고 그 잔혹함의 죗값을 판단할 도덕적 전제나 믿음, 상식에 대한 질문을 더 효과적으로 던질 수 있었다. 과연 영상화 과정에서 피와 폭력의 이미지로부터 얼마나 전략적이고 윤리적인 거리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었다. 둘째, <살인자ㅇ난감>은 그 자체로 좋은 작품이지만 꼬마비 작가의 이후 작품들 특히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이자 창작자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인 <미결> <데우스 엑스 마키나> <환상의 용>에서 연속적으로 드러낸 작가의 문제의식과 연결해 독해할 때 훨씬 풍부한 맥락을 드러낼 수 있다. 실제로 이탕이 잠깐 등장하기도 하는 이들 작품은 이야기가 가상임을, 창작자라는 신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숨기지 않는 방식으로 작품이 직접 말한 것 너머에서 반성적으로 성찰되고 재구성된다. 그리고 이것은 <살인자ㅇ난감>에 대한 감상을 그저 이탕의 행위에 동조하느냐 마느냐는 차원 너머로 이끌어준다. 과연 단독 시리즈에서 이러한 효과가 나올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결론부터 말해, 지난 2월9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살인자ㅇ난감>은 첫 번째 우려에 있어서는 딱 예측 가능한 만큼 별로였고, 두 번째 우려에 있어서는 미리 그은 하한선보다 더 빤했다.

영상화된 <살인자ㅇ난감>이 범죄를 자극적으로 재현하며 작품의 문제의식 자체를 배신하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나왔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K드라마 흥행작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그 모양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학교는> <지옥> <오징어 게임> 등에서 폭력의 재현은 필요 이상으로 노골적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한 세계관을 정당화 혹은 자연화한다. <살인자ㅇ난감>도 마찬가지다. 이탕(최우식)의 첫 살인의 경우 원작에선 손님에게 폭행을 당하다가 휘두른 망치에 의한 살인의 우발성에 방점이 찍힌다면, 영상물에선 원작보다 과격해진 폭행과 이탕이 과거 겪었던 심각한 학교폭력과의 교차 편집을 통해 폭력에 대한 반발과 응징으로서 살인의 정당성에 방점을 찍는다. 다시 말해 이탕이 죽인 첫 피해자가 실은 수배 중이던 연쇄살인범이라는 반전이 드러나기도 전에 이미 시청자들이 이탕에 이입하도록 유도한 것에 가깝다. 비판적 거리감은 애초에 없다. 자신을 협박하던 첫 번째 살인의 목격자를 살해하는 장면에서도 원작에선 살인의 의도성을 강조했다면, 드라마에선 이탕의 목에 목줄이 채워져 개처럼 끌려가는 연출을 통해 다시 한번 카메라가 이탕의 입장에 선다. 그렇게 죽인 피해자가 어릴 때부터 사이코패스에 부모를 죽이고 암매장한 패륜아라는 반전은 그래서 반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사족처럼 느껴진다. 이탕이 당한 폭력과 피해자들이 저지른 과거 악행의 노골적인 재현은 이후 이탕이 자경단이 되어 벌이는 살인 행각이 쾌락적인 스펙터클로 그려지기 위한 밑 작업이 된다. 피해자의 악행이 혐오스러울수록 이탕의 응징은 통쾌해지므로.

주인공 이탕의 ‘의도’ 삭제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
설계와 망상에 대한 의심 전에
‘죽어 마땅한 악인’을 재현할 뿐
뜬금없는 정사신도 같은 맥락
원작 속 도덕적 딜레마는 휘발

이미 많이 지적됐듯 이해하기 어려운 정사신이 툭툭 튀어나오는 문제도 비슷한 맥락이다. 1화에선 이탕이 살인을 정당화하는 자위에 대한 은유로서 여성의 나신과 섹스가 등장하고, 5화에선 불법촬영 피해 여성의 영상 일부를 재현했다. 여성의 나체가 문제인 게 아니다. 남성의 혼란을 묘사하기 위해 철저히 남성 관점에서 성적으로 대상화된 객체로서 재현하는 것이, 피해자를 연민하고 가해자에 분노하는 척하면서 정작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없는 방식으로 피해 상황을 재현하는 것이 문제다. 미적으로 구태의연하고 도덕적으로 미심쩍으며 무엇보다 대의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느냐는 작품의 주요 문제의식 자체를 배신하는 연출이다. 앞서의 폭력 묘사가 그러하듯, 혼돈과 추악함을 재현하겠다는 명분으로 자극적인 이미지를 고민 없이 나열한다는 점에서. 하여 극중 이탕의 반대편에 선 장난감(손석구) 형사가 공적 제재의 당위를 아무리 설파한들 작품이 표면상 내세우는 도덕적 딜레마에 시청자를 끌어들이긴 어렵다. 말은 말일 뿐, 카메라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담기 때문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폭력과 불의가 볼거리로 구현되어 시청자의 즉각적이고 반사적인 반응을 이끌어낼수록 사건 개개의 심각성과 특수성은 휘발되고 안티히어로 장르물의 서사적 장치로 도구화된다. 여기서 드라마의 결정적인 설정 변경은 더더욱 원작의 중요한 맥락을 지워버린다. 이유야 어찌 됐든 죽이고 보니 극악한 인간쓰레기더라는 원작 속 이탕의 능력이 드라마에선 악의에 소름이 돋으며 반응하는 일종의 ‘쎄이다’(싸한 직감이 레이더처럼 작동하는 것)로 변경된 건 원작 설정에 일말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수준의 변화가 아니다. 후자에선 이 초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악인인 걸 뻔히 인지하면서 그냥 외면해도 되는 것인지 질문한다. 하여 드라마 속 이탕이 자경단 역할을 수락하는 과정은 자신의 능력에 고뇌하던 안티히어로의 각성처럼 묘사된다. 한편 원작에서 이탕의 능력은 슈퍼히어로의 초능력이 아닌 신의 권능에 가깝다. 악의에 대한 감지 능력이 아니라 어떤 이유로든 죽이면 악인임이 밝혀지는 기적. 여기서 옳고 그름은 이탕이 증명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에겐 이미 선결된 일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할 절대적이고 유일한 존재의 허락에 비하면 법의 허락은 무의미하다. 여기서 자경단 역할을 맡는 건 고뇌하는 개인의 각성이 아닌 신의 부름에 응하는 것이다. 작품 후반부 이탕의 조력자인 노빈(김요한)과 장난감이 자경단 활동에 대해 나누는 대화는 이 차이를 잘 보여준다. 드라마에선 “너, 네가 무슨 신이라도 돼? 네가 뭔데 벌을 줘? 죽어 마땅한 사람 네가 정할 수가 있어?”라는 장난감의 비난에 노빈이 송촌에 대한 장난감의 집착 역시 법 때문이 아니지 않냐 반문한다. 신은 아니지만 꼭 법만 옳다는 법은 없다는 반박. 반면 원작의 같은 상황에서 “죽어 마땅한 사람? 누가 그걸 정할 수 있는데?”라는 장난감의 질문에 노빈은 “탕이요”라 답한다. 탕의 결정이 신의 결정이므로. 죽어 마땅한 사람을 이탕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이탕이 죽이면 죽어 마땅한 사람이 된다. 이것은 다분히 망상적이다. 다만 이 망상이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혹적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화 <살인자ㅇ난감>은 흔한 자경단 이야기처럼, 사회악을 처단하는 사적 제재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질문으로 소급하는 작품이 아니다. 원작이 제기하는 가장 핵심적인 물음은 세상에 신적인 폭력은 존재할 수 있는지, 있다면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지, 그것을 우리의 정의 기준으로 판단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탕이 앞선 몇 번의 살인으로 사회악을 처단했다는 것이 신의 뜻인지 악마의 농간인지 그저 기가 막힌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만화는 이 부분을 불가지(不可知)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그것을 신의 권능으로 만드는 건 과학적 증거가 아닌 노빈의 믿음이다. 원작은 이탕에게 드라마의 초능력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아우라를 부여하지만, 그 모든 게 거대한 허구이자 망상이며 언제든 틀릴 가능성 역시 열어둔다. 누군가의 삶에 절묘하게 개입해 그 삶을 자신이 설계한 스토리로 만들어내는 이야기인 <미결>에서 주인공인 만화가가 <살인자ㅇ난감>의 아이디어를 말하고 이탕을 등장시키는 건 카메오 출연 같은 게 아니다. 꼬마비 작가는 자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허구라는 것을, 작품 안에서 발휘되는 신적인 권능이 실은 창작자인 자신의 설계임을 숨기지 않는다. 신의 존재를 이용해 역설적으로 중립적이고 신적인 시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엇을 보여주고 보여주지 않는 것엔 작가의 의도적 선택과 변덕이 있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다. 이탕이 보여준 능력과 사적 제재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라면 그것은 작가의 현혹일 수도 있다는 것. 나는 단순히 원작의 중요한 미덕이 드라마에 제대로 이식되지 못한 걸 지적하려는 게 아니다. 기존의 넷플릭스 K드라마들이 그러하듯 <살인자ㅇ난감> 역시 폭력과 불의로 가득해 오직 폭력으로만 대항할 수 있는 세계를 설정한 뒤 그 안에서 벌어지는 핏빛 파국의 자극적인 풍경을 불가피한 결론처럼 자연화한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이탕의 사적 제재에 대한 알리바이도, 송촌의 타락에 대한 알리바이도, 이탕을 체포하지 않은 장난감에 대한 알리바이도 아니다. 그저 폭력에 탐닉한 작품 스스로에 대한 알리바이일 뿐이다. 감 좋은 장난감 형사 아니라 딱히 누구라도 속여 넘기기도 어려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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