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기적'의 박정민 "어느 반찬과도 어울리는 '흰 쌀밥' 연기가 필요했다"

백승찬 기자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준경은 맞춤법을 잘 모르지만 수학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고등학생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준경은 맞춤법을 잘 모르지만 수학에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고등학생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박정민이 영화 <기적>의 주인공 준경 역을 연기하기 위해 풀어야 할 몇 가지 난제가 있었다. 사투리와 나이 문제였다.

이 영화는 1988년 경북 봉화군에 세워진 최초의 민자역사 양원역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행정구역상 경북이지만 강원도와 매우 가까워 사투리가 특이하다. “~보시소” “~했닝교?” “뭐로?” 등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들어보지 못한 어미가 나온다.

게다가 영화 속 준경은 고등학생이다. 박정민은 지금 34세다. 박정민은 발달장애인(그것만이 내세상), 도박꾼(타짜: 원 아이드 잭), 트랜스젠더(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등을 무리 없이 연기했지만, 세월을 뛰어넘는 고등학생 역할은 전혀 다른 도전이었다.

최근 기자들과 화상으로 만난 박정민 역시 준경 역이 지금까지 맡아온 극적인 역할들과 비교해도 쉽지 않은 연기란 걸 알고 있었다. 박정민은 함정을 현명하게 피했다.

“이런 사투리를 처음 들어봤고 연습도 많이 필요했어요. 다만 어느 순간 제가 사투리를 잘 구사하는 데만 혈안이 돼있다는 걸 인식했어요. ‘위험하다’고 느꼈습니다. 사투리에 갇혀 있으면 스스로 사투리를 검사할 것 같았어요. 사투리는 관객이 듣기에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만 쓰고, 영화와 캐릭터, 정서를 분석하는 데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등학생 역할을 연기하는 데는 제작진의 도움도 받았다. 교복 자율화 시기를 배경으로 했기에, 1980년대풍의 밝고 발랄한 의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준경의 ‘뮤즈’를 자처하는 라희 역의 임윤아를 비롯해 같은 반 친구 역 연기자들을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캐스팅했다. 박정민 외모와의 위화감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박정민이 30대 중반인 사실을 알고 영화를 봐도 고등학생 역할이 어색하지 않다.

<기적>에서 준경은 산골 외진 마을에 산다. 간이역조차 없어 주민들은 이동에 애를 먹는다. 기찻길을 따라 걷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도 많다. 준경은 간이역 건설을 탄원하는 편지들을 청와대에 보낸다. 준경은 비록 편지 맞춤법도 틀리지만, 수학 재능만큼은 천재적이다. 교사 등 주변 사람들이 서울 혹은 해외 유학을 주선하려 하지만, 준경은 좁은 방에서 나가려 하지 않는다. 준경이 세상에 나가려 하지 않는 데에는 숨은 이유가 있다.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준경은 간이역 설치를 청원하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준경은 간이역 설치를 청원하는 편지를 청와대에 보낸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기적>은 청량하고 순진무구한 외양과 달리, 몇 번의 극적인 반전과 저변의 우울을 간직한 영화다. 슬픔, 죄책감, 자기부정에 빠진 청소년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고, 주변의 선인들이 이를 돕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도 하다. 박정민은 “아주 오래전 배우가 되는 꿈을 꾸고 노력했던 순간들, 할 건 다해 봤는데 결과물은 탐탁지 않은 순간들의 감정이 준경을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연기의 감정적 진폭은 크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은 극적이지 않아야 했다. 차분하면서도 소소한 웃음을 주는 영화 전체 분위기와 맞아야 했고, 극의 전개상 몇 가지 단서를 숨겨야 할 필요도 있었다.

“어느 반찬과도 어울리는 ‘흰 쌀밥’ 같은 연기를 하자고 이장훈 감독님과 얘기했어요. 초반에는 쉽지 않았어요. 현장에 들어가면 뭔가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내가 연기를 못하나’ ‘연기를 덜하나’ ‘재능 없는 게 까발려지나’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은 건가’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감독님이 처음 몇 회차를 편집해 보더니 ‘날 믿어라. 지금처럼 해도 아무 문제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때부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영화 <기적>의 한 장면 . 88올림픽 직전인 1980년대 중반이 시대배경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 88올림픽 직전인 1980년대 중반이 시대배경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외지로 나가는 길이 고된 경북 봉화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외지로 나가는 길이 고된 경북 봉화 작은 마을이 배경이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종반부 기관사인 아버지(이성민)가 준경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우는 대목은 영화 하이라이트다. ‘이건 성민 선배님 장면이다’라는 생각에 부담없이 촬영을 시작했지만, 이성민의 연기에 “수도꼭지 터지듯이 울음이 터져버렸다.” 박정민뿐 아니라 스태프까지 눈물바다였다고 한다. 결국 감정이 과도하다는 판단 때문에 울음이 크게 터진 장면은 사용하지 못했다. 오히려 박정민이 부담을 가졌던 건 준경이 누나 보경(이수경)과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이다. 차창 밖으로 부드러운 햇빛이 쏟아지는 밝고 아름다운 장면이지만, 준경은 억눌러온 생각과 감정들을 조곤조곤 드러내야 했다. 박정민은 “시나리오 볼 때마다 눈물 나고 가슴 아팠다. 이걸 현장에서 표현 못하면 어떡하나 두려움이 컸다”며 “컨디션 안 좋을까봐, 긴장할까봐, 카메라와 합이 안 맞을까봐, 돌발상황이 생길까봐 온갖 걱정을 다했다”고 말했다. 촬영 2~3일 전부터 잠을 못 잤지만,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 금방 끝냈다고 한다.

<기적>은 올 상반기 개봉을 준비했다가 팬데믹 상황의 악화로 연기됐다. 결국 추석을 앞둔 15일 개봉한다. 박정민은 ‘전화위복’이라고 표현했다. “전 이 영화가 잔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영화에 담긴 정서가 엄청 커서, 보고 있으면 그 무게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가족분들이랑 함께 보시면 평소에 하지 못한 말을 영화가 대신 해줄 거예요.”

영화 <기적>의 배우 박정민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배우 박정민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박정민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배우 박정민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잔잔하게 이어지던 스토리에는 몇 가지 반전이 숨어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기적>의 한 장면. 잔잔하게 이어지던 스토리에는 몇 가지 반전이 숨어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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