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판타지로 태어난 창극 '흥보展'…공연과 전시 경계 허물다

선명수 기자
국립창극단의 창극 <흥보展>은 판소리 흥보가를 바탕으로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과감히 무너뜨린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극 <흥보展>은 판소리 흥보가를 바탕으로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과감히 무너뜨린 작품이다.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이 여기까지 왔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흥보와 놀보 이야기가 현대적 미장센과 화려한 판타지라는 새옷을 입었다. 지난 15일 막을 올린 국립창극단의 신작 <흥보展>은 공연과 전시의 경계를 과감히 무너뜨린 작품이다. 공연의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흥보傳’이 아닌, <흥보展>. ‘흥보전(傳)을 전시(展示)한다’는 콘셉트를 분명히 한 무대다.

창극 <흥보展>은 국립창극단이 계속해온 판소리 다섯 바탕(춘향가·심청가·흥보가·수궁가·적벽가)의 현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기획됐다. “창극은 동시대 감각에 맞춰 변화하되 뿌리인 판소리는 변하지 않아야 한다”(유수정 예술감독)는 비전 아래 창극의 독창적 성격을 정립하는데 매진했던 연출가 허규(1934~2000)의 <흥보가>(1998)를 원작으로 삼았다.

작품은 원작을 뛰어넘어 파격에 가까운 공연예술의 새로운 미감을 제시한다. 한 편의 전시와 같은 무대 미술이 작품 속 환상의 세계를 구현했다. 소품이 거의 없는 간결한 무대를 가득 채운 것은 가로 8m, 세로 5m의 대형 LED 패널 두 대다. 공연 내내 LED 패널은 서로 떨어지고 맞물리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데, LED가 구현한 영상과 오브제가 작품의 새로운 시공간을 만들어낸다. 신비롭고 웅장한 제비나라, 서양식 샹들리에와 화려한 오브제로 장식된 놀보의 집, 대형 산수화를 보는 듯한 흥보네 집터와 박이 열리며 펼쳐지는 형상까지. 현실과 환상, 추상을 넘나드는 현대적인 미장센이 창극단의 전통 판소리와 자연스럽게 융합된다. ‘흰고깔제비’가 보은을 위해 남태평양의 섬들과 대륙을 거쳐 흥보네로 돌아가는 장면의 미디어아트는 관객도 제비와 함께 비행하는 듯한 쾌감을 선사한다. 제비 다리를 고쳐준 흥보네 가족의 모습은 마치 스마트폰 사진을 찍듯 제비의 카메라를 통해 LED에 투영돼 재미를 더한다.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공연과 전시를 함께 관람하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는 무대 미술은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최정화가 총괄했다. 그는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미술감독,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무대디자이너,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개·폐막식 미술감독 등으로 활동하며 공연예술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한국의 웨딩홀 기둥을 모방해 한국사회의 급격한 근대화와 서구화를 읽어낸 그의 기둥 시리즈 ‘세기의 선물’도 LED 영상을 통해 놀보네 집의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번 무대엔 ‘전통은 박물관에만 있으면 안 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됐다. 최정화는 “판소리는 수백년 전 민중의 밑과 옆·곁에서 이뤄진 노래이자 생활 속 예술이었을 것”이라며 “전통도 누군가 향유할 때 의미가 생기고 그것이 이어진다. 이번 작품을 통해 다양한 분야 예술가들이 재해석한 판소리 ‘흥보가’를 지금의 관객이 즐기고 다시 우리 옆 이야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흥보 형제와 ‘보은과 복수’의 제비 이야기지만, 권선징악보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닌 욕망에 더 초점을 맞췄다. 제비가 물어다준 ‘박’이 상징하는 민중의 염원을 중심으로 원작에는 없는 ‘제비나라’ 장면을 새로 추가해 환상성을 더했다. 공연은 머나먼 북쪽 나라에서 돌아온 제비들이 ‘제비 여왕’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고하며 시작된다. 러시아와 중국, 일본에서 온 제비에 이어 한쪽 다리를 오색실로 싸맨 흰고깔제비가 절뚝거리며 들어오는데, 이 제비가 흥보의 집에서 겪은 사연을 풀어놓으며 해설자처럼 극을 안내한다.

팬데믹이나 기후위기, 부동산 투기 광풍 등의 소재가 작품 중간중간 등장하며 현대적 변주를 시도한다. 힙합 공연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머니 건(지폐가 나오는 장난감 총)’, 박에서 나온 비단을 형상화한 풍선 달린 의상, 부자가 된 흥보가 손에 든 포브스 잡지 등 사용된 소품들 역시 재치있다. 김명곤 연출은 “판소리 ‘흥보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권선징악이란 전형적 교훈 이상의 무언가가 느껴졌다”며 “고달픈 세상살이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꿈과 욕망을 담았다는 점에 주목해 한 번쯤 판타지를 꿈꾸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판소리 거장 안숙선 명창이 작창을 맡고, 월드뮤직 그룹 공명의 리더이자 영화 <소리꾼>, 연극 <화전가> 등의 음악을 만든 박승원이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한국 전통 악기와 서양 악기가 어우러진 음악은 박승원·최성은·김창환이 공동 작곡했다.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태평소, 생황, 아쟁, 소리북 등 국악기와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 등 서양 악기가 어우러진 연주가 관객 귀를 즐겁게 한다.

국립창극단 전 단원을 포함해 59명의 대규모 출연진이 최근 재단장을 마친 서울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소리꾼 김준수와 윤석안이 각각 흥보와 놀보를 연기하고, 이소연과 김금미가 각각 흥보 아내와 놀보 아내로 분해 형제 간 팽팽한 긴장감을 보여준다. 흥보전에 빠질 수 없는 캐릭터인 마당쇠는 유태평양이 맡았다. 공연은 21일까지.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창극 <흥보展>의 한 장면. 국립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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