⑧오페라 <오르페오>, 처음은 아니지만 ‘최초’다

문학수 선임기자

‘불멸의 작곡가’ 몬테베르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초상. 이탈리아의 화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Bernardo Strozzi, 1581~1644)가 1630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60대 초반의 모습이다. 당시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이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의 초상. 이탈리아의 화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 Bernardo Strozzi, 1581~1644)가 1630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 60대 초반의 모습이다. 당시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이었다.

평론가에는 대개 두 부류가 있을 터이다. ‘사실’ 혹은 ‘근거’에 충실한 이들이 있을 것이고, 그보다는 화려한 수사에 치중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는 빨강과 파랑으로 양분되지 않는다. 대다수 평론가들은 그 둘을 겸비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넓은 스펙트럼의 어느 중간쯤에 자신의 푯대를 꽂는다. 그런 전제하에서 얘기하자면, 미국의 음악평론가 해럴드 숀버그는 ‘화려한 수사’ 쪽에 가까울 것이다. 1915년 뉴욕에서 태어나 2003년에 타계한 그는 주로 뉴욕타임스에 글을 썼다. 미국 음악계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한국에도 두 종의 책이 번역돼 있는데,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이 세 권짜리로, <위대한 피아니스트>는 두 권짜리로 출간돼 있다. 음악책 시장이 협소한 국내에서도 상당히 많은 독자들이 구입해 읽은 것으로 보인다. 때로는 숀버그를 ‘음악의 스승’으로 여기는 ‘예찬론자’들도 눈에 띈다. 하지만 감히 말하거니와 그의 글을 읽을 때는 조심스러울 필요가 있다. ‘팩트 체크’에 엄밀한 평론가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그의 저서를 읽을 때마다 느끼는 불편함이다. 평론가이자 뉴욕타임스의 저널리스트였던 그는 아마도 마감에 임박해 후다닥 글을 쓰는 스타일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렇다고 숀버그를 ‘나쁜 평론가’로 폄훼할 의도는 추호도 없다. 그의 기질과 글쓰기의 특징을 염두에 두면 상당히 읽을 만한 책들을 썼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때로는 동의하기 어려운 문장들도 있지만 그보다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들이 더 많다는 뜻이다. 특히 바로크 시대부터 20세기까지의 숱한 음악가들을 소개하고 있는 <위대한 작곡가들의 삶>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음악가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1567~1643)라는 사실에는 100% 수긍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음악을 작곡가라는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숀버그는 “음악으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은” “서양인들의 의식을 변화시킨” “생전에 그 위대함을 인정받은” 음악가들 중에서 지금도 여전히 음악적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들을 선별해 세 권의 책에 수록했다. 첫번째 인물로 몬테베르디를 꼽은 이유에 대해 “그의 음악이 오늘날 연주되고 있는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어서”라고 밝힌다.

물론 1970년 나온 초판은 ‘바흐’로 막을 올렸다. 1981년 개정판부터 몬테베르디를 첫번째 순서에 놓았다. 초판을 집필하던 때만 해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음악가 몬테베르디는 현실의 공연장에서 거의 연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10년 만에 상황이 완전히 변했다. 고전과 낭만에 식상한 지휘자와 연주자들, 또 음악애호가들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면서 고음악(Alte Musik)이 새롭게 조명받았기 때문이다.

특히 ‘고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두 명의 지휘자는 몬테베르디를 거의 숭배했다. ‘시대적 고증’을 중시했던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는 취리히 오페라극장 오케스트라의 단원들로 ‘몬테베르디 앙상블’이라는 연주단체를 만들었다. 몬테베르디의 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의 존 엘리엇 가디너(1943~)는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중에 ‘몬테베르디 합창단’을 창단(1964년), 몬테베르디의 ‘성모 마리아의 저녁 기도’(Vespro della Beata Vergine)를 지휘하면서 공식 데뷔했다. 이 깐깐하고 학구적인 지휘자는 여든이 다 된 지금도 여전히 이 합창단을 이끌고 있다. 400여년 전의 작곡가 몬테베르디는 그런 흐름을 타고 부활했다. 물론 고음악에 탐닉하는 경향은 2000년대 들어와서도 여전하기에, 몬테베르디 외에도 많은 옛 음악가들이 새롭게 조명받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음악가들 중에서도 몬테베르디의 존재감은 단연 두드러진다. “오늘날의 청중에게 여전히 감동과 놀라움을 선사하는, 최초의 위대한 작곡가”라는 것이 숀버그의 평가다.

몬테베르디는 누구인가

몬테베르디가 태어난 이탈리아의 크레모나(Cremona)는 ‘바이올린의 성지(聖地)’로 유명하다. 이 작은 도시가 세계적 명성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바이올린의 역사를 찬란히 빛낸 명장들의 공방(工房)이 밀집해 있었던 까닭이다. 아마티, 과르네리, 스트라디바리 등의 가문들이 만들어낸 명기(名器)는 지금도 여전히 가장 비싸고 좋은 바이올린으로 손꼽힌다. 이곳에서 태어난 몬테베르디도 바이올리니스트로 음악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크레모나 대성당의 악장이었던 마르칸토니오 인제네리(c.1545~1592)를 스승으로 모시고 음악을 배웠던 그는 빼어난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성악가였다. 물론 20대 초반부터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서서히 얻기 시작했으나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작곡’은 부수적이었다. 경제적 수입과 직결되는 것은 ‘연주’ 쪽이었다. 권력자의 부름을 받아 녹봉을 받을 수 있었던 직업은 ‘작곡가’가 아니라 ‘연주자’였다. 1590년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몬테베르디가 처음으로 얻은 직업은 궁정의 바이올리니스트 겸 성악가였다. 당시 만토바의 권력자는 빈센초 1세였다.

빈센초 1세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귀족들이 으레 그렇듯이 (안 그런 사람도 있었겠지만) 허세가 심하고 놀기를 좋아했다.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미술과 연극도 애호했으며 나름대로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또한 르네상스 권력자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앞서의 연재에서도 몇 차례 언급했지만 당대의 귀족들이 예술가를 고용하거나 후원하는 것은 권력과 취향을 뽐낼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빈센초 1세는 그 지점에서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려 했다. 그는 몬테베르디 외에도 많은 음악가들을 고용해 궁정에 악단과 합창단을 꾸렸다. 배우들을 끌어들여 극단도 만들었다. 물론 미술가들도 후원했는데 그중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라고 해야 할 것이다. 르네상스 말기에 태어나 바로크 시대의 초창기에 활약했던 위대한 화가 루벤스는 ‘신화의 재해석’이라는 측면에서 당대의 누구도 범접하기 어려운 ‘지적인 화가’였다. 오늘날의 벨기에(당시에는 플랑드르) 안트베르펜의 공방에서 작업하던 그를 유럽 전역의 거의 모든 귀족들이 탐냈다. 다들 자신의 궁정에 들이고 싶어했다. 하지만 극진한 애정을 표하며 그를 낚아챈 이는 벤센초 1세였다. 1600년에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던 루벤스는 곤차가 가문의 궁정화가로 8년간 머물렀다. 시기적으로 몬테베르디와 겹친다.

몬테베르디는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곤차가 궁정의 피고용인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몇 권의 마드리갈(16~17세기 이탈리아의 세속가곡) 모음집을 펴내 명성을 쌓았다. 빈센초 1세가 해외 원정이나 외국 방문에 나설 때는 수행원으로 동행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그는 ‘직장인’으로서 매우 성실하고 부지런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직위를 공작에게 직접 요구하기도 했으니, 전임 악장이 세상을 떠나자 공작에게 편지를 올려 그 자리를 자신에게 달라고 탄원했다. 말이 ‘상소문’이지 사실상 자리를 요구하는 편지에 가까웠다. 이 지점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서히 싹텄던 ‘예술가의 자의식’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몬테베르디는 결국 자신의 요구를 관철했다.

이 시기의 몬테베르디가 작곡했던 곡들은 종교음악과 세속음악에 두루 걸쳐 있는데, 종교적 내용을 지닌 음악 중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저녁기도’를 빼놓을 수 없겠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존 엘리엇 가디너가 지휘하는 이 음악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물론 이 걸작과 관련해 상당 기간 논쟁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제목에 표기한 ‘성모 마리아’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20세기 후반에서야 논란이 정리됐는데,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성녀 바르바라를 위한 전례음악이라는 결론”(변혜련, <몬테베르디>, 한국학술정보)이 내려졌다. 가톨릭의 14성인 가운데 한 분인 바르바라는 곤차가 궁정의 수호성인이었다. 그런데 몬테베르디는 왜 ‘성모 마리아’로 이름을 바꿔 출판했던 것일까. 음악학자 변혜련은 같은 책에서 “상업적인 이유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출판의 중요한 목적은 이익의 창출인데 이런 점에서 ‘성녀 바르바라를 위한 저녁기도’로 출판했다면 많은 수익을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또한 몬테베르디의 현실성을 보여주는 측면이다. 그러다보니 어떤 이들은 ‘순수하지 못한 장사꾼’으로 바라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편견이다. 예술가는 이슬을 먹고 사는 존재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몬테베르디는 같은 궁정에서 일하던 소프라노와 결혼했다가 사별한 상태였다. 홀로 세 아이를 키우는 ‘싱글 대디’였다.

오페라의 시대를 열다

오페라 <오르페오> 인쇄본 표지. 이 오페라는 1607년 만토바의 곤차가 궁정에서 초연됐다. 인쇄된 대본·악보는 베네치아에서 1609년 출판됐다.

오페라 <오르페오> 인쇄본 표지. 이 오페라는 1607년 만토바의 곤차가 궁정에서 초연됐다. 인쇄된 대본·악보는 베네치아에서 1609년 출판됐다.

이제 ‘오페라의 탄생’을 언급할 차례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피렌체부터 들를 필요가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르네상스의 도시’ 피렌체는 ‘오페라의 탄생지’로 불린다. 바르디 백작의 카메라타(Camerata)에서 오페라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카메라타’는 근대의 살롱(Salon)과도 흡사하지만 좀 더 학술적인 모임이었다. 당시 피렌체에는 몇 개의 카메라타가 있었는데 바르디 백작이 호스트를 맡은 카메라타에는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였던 빈센초 갈릴레이(천문학자 갈릴레이의 아버지)와 시인 오타비오 리누치니, 작곡가 줄리오 카치니, 자코포 페리,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 등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화두는 그리스 비극의 부활이었다. 그리스의 연극은 대부분 노래였다.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자면 ‘음악극’에 가까웠으며, 음악을 단지 극의 반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주연 배우와 앙상블의 대사 자체가 이미 음악이었다. 바르디의 카메라타에 모인 음악가들은 그것을 되살리려 했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의 비극이 어떤 선율을 사용했는지, 말과 음악을 어떻게 융합했는지에 대해 아무 증거도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오로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뿐이었다. 이 고전은 바르디의 카메라타에 모인 예술가들의 ‘경전’이었다.

상상과 유추의 결과로 만들어진 작품이 <다프네>(Dafne)였다. 리누치니가 대본을 맡고 페리가 작곡한 이 작품은 1597년 초연되고 2년 뒤 재공연됐다. ‘최초의 오페라’로 종종 거론되지만 대본만 남아 전해질 뿐 음악은 짐작할 길이 없다. 대본과 음악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1600년 공연했던 <에우리디체>(Euridice)인데, 이는 메디치 가문의 마리아 데 메디치와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결혼을 기념해 만든 작품이었다. 대본은 리누치니, 작곡은 페리와 카치니가 공동으로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솔직히 지금 들어보면 ‘오페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말(대사)에 음악을 입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텐데, 페리는 이를 ‘레치타르 칸탄도’(Recitar Cantando, 노래하는 음송)라고 스스로 칭했다. 오늘날의 오페라에 빗대 표현하자면 아리아(Aria)는 없었지만 레치타티보(Recitativo)는 존재했던 셈이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은 뒷심이 부족했다. ‘음악극’으로서의 그리스 비극의 부활을 꿈꿨지만, 이론과 논쟁에서 보여줬던 치열함에 비하자면 음악적 실력에서는 아마추어에 가까웠다. 결국 결정적 바통은 몬테베르디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가 오페라를 ‘창시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이와 관련해 매우 설득력 있는 서술은 <그라우트의 서양음악사>에 등장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페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오페라를 새로운 창조물로 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경험을 근대적인 방식으로 되살리려는 시도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로 불려 음악이 정서적인 효과를 만들어내는 연극이다. 다른 방식은 원래 있던 장르들인 연극, 극장에서 열리는 볼거리, 춤, 마드리갈과 같은 것들이 섞여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의견이 모두 옳다.”

그러면서 이 책은 “오페라의 첫번째 위대한 작곡가는 페리나 카치니가 아니라 몬테베르디”라고 못 박는다. “어떤 아이디어를 처음 창안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아이디어의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한 사람이 역사에 남는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서 잠시 되짚어봐야 할 지점은, 앞서 언급했듯이 곤차가 궁정에는 다른 가문에 비해 규모가 훨씬 컸던 악단을 비롯해 합창단, 극단까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몬테베르디가 오페라를 작곡하는 데 중요한 인프라였다. 그리하여 1607년 만토바의 곤차가 궁정에서 <오르페오>가 태어났다. 명실상부한 오페라의 등장이었다.

한국에서는 2015년 서울시오페라단이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했다. 작곡 이후 400여년 만에 이뤄진 공식적인 한국 초연이었다. 당시 단장이었던 작곡가 이건용 선생은 <오르페오>에 대해 “요즘 관점에서는 음악이 좀 단순할 수 있겠지만, 격조 있고 독특하다”면서 “미묘한 장식음들을 구사하는 아리아, 합창, 춤 등이 지금 봐도 흥미진진하다”고 평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과도기를 살았던 대(大)작곡가 몬테베르디는 1612년 빈센초 공작이 사망하자 만토바를 떠나 베네치아로 갔다. 당시 유럽 음악가들이 너나없이 부러워하는 자리였던 산 마르코 대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했다. 이 공간적 이동은 의미심장하다. 피렌체에서 씨앗을 뿌리고 만토바에서 첫 봉오리를 맺었던 ‘오페라의 꽃’이 베네치아에서 활짝 피어났기 때문이다. 궁정이 아니라 극장에 모여든 관객을 상대로 공연을 했다는 점에서 보자면, 베네치아야말로 진정한 오페라의 도시였다. 최초의 오페라 극장인 테아트로 산 카시아노(Teatro San Cassiano)가 1637년 베네치아에서 문을 열었다. 이 도시에서는 1641년까지 모두 5개의 오페라 극장이 개관했다. 당시 인구가 14만명에 불과했음에도 객석은 관객으로 가득했다. 그만큼 인기를 끌었다. 그 중심에서 활약한 작곡가는 당연히 몬테베르디였다.

[클래식 오디세이 - 음악의 역사를 항해하다]⑧오페라 <오르페오>, 처음은 아니지만 ‘최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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