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인 거주지서 금속 유물 어떻게 나왔나

김종목 기자

찾았다, 기록에만 남아있던 세종 때 첨단 과학 기술의 실체

조선 전기 한글과 한자 금속활자 1600여점이 29일 공개됐다. 이날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유물 언론 공개회 중 문화재청 직원이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만 사용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한글 금속활자를 돋보기로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조선 전기 한글과 한자 금속활자 1600여점이 29일 공개됐다. 이날 오전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열린 유물 언론 공개회 중 문화재청 직원이 훈민정음 창제 시기에만 사용하던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한글 금속활자를 돋보기로 보여주고 있다. 연합뉴스

한양의 경제문화 중심지…금속활자·천문시계 ‘일성정시의’ 부품 ·물시계 부속품 발굴돼
도자항아리 속 한꺼번에 매장…“누군가 의도를 갖고 묻은 듯” 전란 피해 도망가며 숨긴 ‘퇴장유적’일까

서울 인사동 유적 발굴 의미는 각각 인쇄본과 기록으로 남은 세종 시기 인쇄술과 과학기술의 실체를 확인할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이하 연구원)의 오경택 원장은 “우리가 세종 시기 첨단 기술이라 규정한 금속활자와 과학기구 실물은 전해 내려오는 게 없다시피 했다. 이제 연구를 새롭게 시작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역사도 다시 써야 한다. 이번 발굴은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한글과 한자 금속활자 제작 시기는 아직 추정 단계다. 실제 인쇄본과 대조 작업을 해야 한다. 조선 전기 중인들 거주지였던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인사동 79번지)’에 왜 금속 유물이 묻혔는지에 관한 의문도 남았다.

■ 구텐베르크보다 앞선 것일까

한글 금속활자 발굴 의미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1443년) 표기를 반영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금속활자라는 것이다. 출토된 금속활자에는 동국정운식 한자음이 적혀있다. 이 표기법은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만 사용했다.

추후 연구조사 결과에 따라 한자 금속활자 발굴 의미가 더 클 수 있다. 지금은 추정 단계인데, 1434년 갑인자(甲寅字), 1455년 을해자(乙亥字), 1465년 을유자(乙酉字)로 보이는 유물이 나왔다. 학계는 이번에 한자 금속활자 중 ‘추정 갑인자’에 주목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 시기가 1450년쯤이다. 인쇄본과 대조 확인을 거쳐 갑인자로 최종 확인되면 구텐베르크보다 15년가량 앞선 시기의 금속활자를 실물로 확보하게 된다. 최초로 금속활자와 인쇄본을 동시에 갖게 된다. 학계 일각에선 출토한 일부 금속활자를 두고 1420년 경자자(庚子字)일 가능성도 제기했다. 다만 29일 공식 기자회견 자료에서 이 가능성에 관한 추정은 제외됐다.

이재정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금속활자 치수를 측정하고, 직접 찍어서 당시 책과 대조해야 정확한 제작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구원은 여러 형태의 금속활자를 찾았다. 크기와 형태, 뒷면 깎음새, 서체가 다양했다. 깎음새만 해도 ‘낮은 V형’에서 ‘평저형’까지 6개 형태가 출토됐다. 연구원은 “한글 금속활자를 구성하던 다양한 크기의 활자를 모두 출토한 것은 최초”라고 했다.

조선시대 중인 거주지서 금속 유물 어떻게 나왔나
조선시대 중인 거주지서 금속 유물 어떻게 나왔나
서울 인사동 유적 현장에서 발굴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의 부품,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 용뉴(용 모양 손잡이)와 동종 파편(위부터).   문화재청 제공

서울 인사동 유적 현장에서 발굴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의 부품, 물시계의 부속품인 주전, 용뉴(용 모양 손잡이)와 동종 파편(위부터). 문화재청 제공

■ 기록에만 나오던 과학기술 유물 첫 발견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부품과 물시계 옥루 또는 자격루의 ‘주전(籌箭)’으로 보이는 동제품도 확인했다. 이 시계들도 기록만 있던 것이다. 현재 박물관에 전시된 일성정시의나 물시계는 옛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것이다.

주전은 동판과 구슬방출기구로 구성됐다. 동판은 직사각형 형태 판에 원형 구멍을 엇갈리게 배치했다. 우측 상단에는 ‘일전(一箭)’ 글씨를 음각했다. 구슬방출장치는 원통형 동제품이다. 양쪽에 걸쇠와 은행잎 형태의 핀을 달았다. 동판 구멍(3.8㎝)과 작은 못 4개로 결합되는 형태다. <세종실록>의 주전 기록과 일치한다. 연구원은 중종 31년(1536년) 창덕궁에 설치된 새 보루각을 완성하면서 개선한 주전 또는 세종 때 흠경각 옥루의 주전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일성정시의도 기록으로만 존재했다. 중국 원(元)의 천문관측의기인 간의(簡儀)의 구조를 혁신하여 창제한 천문시계다. 해시계의 단점을 보완하려고 밤에 별자리를 이용하는 주야 겸용 시계라는 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는다. 세종 19년인 1437년에 4개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남았다. <증보문헌비고>엔 제작 내용 기록이 나온다.

실록에 기록된 일성정시의의 형태는 공평동 유적 출토품과 매우 유사하다. 원형 고리의 이름도 일치한다. “바퀴의 윗면에 세 고리(環)를 놓았는데, 이름을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라 한다.” 연구원은 ‘주천도분환 지름은 두 자, 두께는 3분, 넓이는 8분’ 같은 기록과 발굴 유물의 크기가 유사하다고 했다.

연구원은 승자총통(1583년) 1점, 소승자총통(1588년) 7점의 소형화기 총통을 찾았다. 승자총통들은 명량 해역에서도 확인됐다. 제작자로 기록된 장인 희손과 말동 중 희손은 보물 ‘차승자총통’ 명문에도 나온다.

동종은 귀꽃 무늬와 연꽃 봉우리, 잔물결 장식을 했는데, 15세기 제작된 왕실 발원 동종의 양식을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

■ 누가 언제 왜 묻었나

유물은 한꺼번에 매장한 형태였다. 도자항아리 안에 금속활자, 주전의 동제 유물을 담았고, 항아리 밖에 동종, 동판, 일성정시의, 총통을 쌓았다. 금속활자를 빼곤 대부분 잘리거나 쪼개진 형태였다.

누가, 언제, 왜 이 유물을 묻었는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연구원은 발굴 뒤 문헌을 뒤졌지만 관련 기록은 찾지 못했다고 했다. 다만 몇 가지 추정할 거리는 있다.

발굴 지역은 조선 한양도성의 경제문화중심지였다. 발굴지 바로 남쪽이 운종가다. 이곳에 상업시설 시전행랑이 설치됐다. 오 원장은 “발굴 장소는 궁이나 관하고 관련 없는 지역이다. 중인이 살던 곳이다. 행랑채에 딸린 창고로 보인다. 항아리를 기와편과 작은 돌로 괸 걸 보면, 누군가가 의도를 갖고 묻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날 공개된 총통은 ‘언제’의 실마리를 제공할 단서이기도 하다. 이번 출토 유물 중 제작연대가 가장 늦은 게 소승자총통(1588년)이다. 이후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한 채 오늘날까지 묻힌 상태로 유지된 듯하다. 총통을 고의로 절단한 후 묻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물러나면서 매장한’ 퇴장유적(退藏遺蹟)으로 연구원은 추정한다. 전란 때 피하면서 묻은 것일 수도 있다. 임진왜란 발발이 소승자총통이 제작된 지 4년 뒤인 1592년이다.

매장 유물은 모두 금속이다. 종합해 추정하면 중인 계급의 한 사람이 전란을 피해 도망가면서 당시 값어치가 큰 금속을 작은 것은 항아리에, 큰 것은 항아리 밖에 쪼개 묻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돌아와 팔려고 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당시 중인이 금속 유물을 소유할 만한 재력을 가졌느냐는 반문도 있다. 연구원은 “관련 문헌 자료를 더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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