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이(張撫夷)’라는 인물이 있다. 1700여년전 황해도 사리원에서 살았던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일제강점기 잠자고 있던 ‘식민사학의 악령을 깨운 인물’로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드물다. 물론 ‘장무이’ 본인은 그런 누명을 뒤집어쓸 줄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열린 최근 제47회 한국고고학대회에서 ‘장무이묘’를 주제로 최신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 이 참에 ‘장무이’와 ‘장무이묘’와 관련된 사연을 풀어보고자 한다.
■대동강변에서 확인된 벽돌무덤의 정체
1909년 10월의 평양 대동강변으로 시공간을 옮겨보자.
당시 통감부 고건축 촉탁이었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1868~1935)는 평양일보 사장인 시라카와 쇼지(白川正治)로부터 솔깃한 이야기를 듣는다. “대동강 남쪽 강변에 고분이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과연 고분2기의 발굴결과는 흥미진진했다. ‘벽돌(塼)’로 만든 무덤방에서 청동거울과 각종 무기, 오수전이 쏟아져 나왔다(석암동 전실분·벽돌무덤).’
한 달이 지난 11월 말, 도쿄대 하기노 요시유키(萩野由之·1860~1924)와 이마니시 류(今西龍·1875~1932) 발굴단도 대동강변에서 같은 형식의 무덤을 조사했다(석암동 을분).
세키노와 하기노 발굴팀은 이 두 곳의 벽돌무덤을 ‘고구려 고분’으로 판단했다. ‘평양=고구려의 수도’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그런데 1910년 2월,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1870~1953)가 반론을 폈다.
자신이 1903년과 1905년 지안(集安)에서 확인한 고구려 고분과 대동강변 벽돌무덤의 구조가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이었다.
무덤형태(벽돌무덤·塼室墓)’도 그렇고, 출토유물 또한 한나라 고분을 쏙 빼닮았다고 주장했다.
도리이는 “이것은 낙랑고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학계주류인 세키노의 지지자들은 “(인류학자인) 당신이 뭘 안다고 그러냐”고 단칼에 일축했다.
이상하다. 일본학자들이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입증하려고 평양의 낙랑고분을 마구 파헤쳤다는게 정설이다.
그런데 세키노 등 일본학계 주류는 왜 처음에는 ‘대동강변 낙랑 고분=고구려 고분’으로 여겼다는 걸까.
세키노는 기원전 108~기원후 313년 사이에 한반도 서북부를 지배했다는 한사군의 존재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세키노는 한사군이 평양~한강 이북 사이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럼에도 세키노는 ‘대동강변의 벽돌무덤=낙랑고분’으로 여기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제의 낙랑군 유적 조사가 처음부터 사전에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정인성 영남대 교수).
■‘어양 장씨’의 무덤?
필연이나 개연이 아니면 무엇일까. 우연이었다.
1911년 10월이었다. 세키노 조사단이 평양 동쪽의 대규모 고분인 한왕묘를 조사하던 중 사고가 일어났다.
발굴구덩이가 무너져 인부가 매몰된 것이다. 인부들은 “조상의 무덤을 파헤쳐서 천벌을 받은 것”이라며 작업 거부 투쟁을 벌였다. 조사단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할 일이 없어진 세키노는 경성의 이왕가박물관 소장 유물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심상치않은 ‘명문 전돌(태강원년3월왕씨조·太康元年三月王氏造)’이 보였다.
‘태강’은 중국 서진의 무제(266~290)가 사용한 연호(280~289)이다. 따라서 ‘태강 원년’은 280년을 가리킨다.
세키노는 명문벽돌의 출토지로 알려진 ‘황해도 봉산군’으로 달려갔다.
그는 1911년 10월15일 봉산 사리원역 인근인 은파에서 다수의 고분과 전돌(벽돌)을 확인한다.
그리곤 돌아오는 길에 사리원역 동남쪽 철로변의 논 사이에서 고분으로 보이는 둔덕을 확인했다.
“어? 저건 고분이 틀림없어. 한번 확인해보자.”
기차에서 내려 둔덕 위로 달려간 세키노는 ‘어양장(漁陽張)…’이라는 글자가 찍힌 벽돌을 수습한다. ‘어양’은 지금의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지현(薊縣)을 가리킨다. 따라서 ‘어양’ 출신의 ‘장’씨로 읽을 수 있는 벽돌이었다.
세키노는 이 고분의 조사를 발굴단의 일원인 야쓰이 세이이치(谷井濟一·1880~1959)에게 맡겼다.
예정되어 있던 한왕묘 조사가 재개되고, 영남 지방 발굴이 예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키노의 명을 받은 야쓰이는 10월21일부터 문제의 사리원 고분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높이가 5.4m에 달하며 지름은 남북 32.4m, 동서 30m 정도 되는 큼지막한 고분에 속했다.
천장이 붕괴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도굴의 화를 입은 것으로 판단됐다.
하지만 왼쪽 벽과 널방, 널길에 마련된 이실(耳室·움푹 들어간 아치형 공간)에서 획기적인 자료를 잇달아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바로 여러 종류의 명문 문자 벽돌이었다. 벽돌에는 경천동지할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대방태수 장무이의 무덤’ 현현
그중 여러 점의 벽돌에서 보인 ‘사군(지방 장관) 대방태수 장무이 벽돌(使君帶方太守張撫夷塼)’ 명문이 특히 눈에 띄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대방태수 장무이’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장무이묘’ 명칭이 그래서 붙었다.
‘태세무어양무이전(太歲戊漁陽張撫夷塼)’과 ‘태세신어양장무이전(太歲申漁陽張撫夷塼)’의 벽돌 조합도 의미심장했다.
연구자들은 ‘태세 무(茂)’와 ‘태세 신(申)’을 합쳐서 이른바 ‘태세(목성) 간지’의 ‘무신년’을 가리키는 의미로 해석한다.
‘태세(太歲)’는 12년 주기로 태양을 도는 세성(목성)을 기준으로 계산한 기년법이다.
또 무덤 주인공의 장사를 위해 벽돌(전돌)무덤을 조성했음을 알린 ‘애도문’ 형식의 ‘명문벽돌’도 출토됐다.
“천생 소인이 군자를 공양하니 1000명을 시켜 전돌을 만들어 부모를 장사지냅니다.(혹은 부모를 장사지내듯 합니다)…(天生小人 供養君子 千人造塼 以葬父母…)”
“슬프다. 부인(그 분)께서 갑자기 백성을 등지시니 자민이 수심에 차 밤마다 평안치 않고 영원히 무덤에 계시니 애통함이 인정을 찢는듯 합니다.(哀哉! 夫人奄背百姓子民憂慽 夙夜不寧永側玄宮痛割人情)”
이밖에 “8월 28일 벽돌을 만들었는데 80석주(石酒)가 들었다(八月卄八日造塼日八十石(酒)”는 벽돌 내용도 흥미롭다.
‘조주부(태수의 바로 밑 부하)가 전돌제작을 주관하면서 정성스러운 마음에 눕지도 않았다.(趙主簿令塼懃意不臥)’는 벽돌도 이채롭다. 상관의 무덤 조성을 위해 불철주야 찍어내는 벽돌 공정을 관장한 부하(조 주부)의 노심초사가 엿보인다. 지금까지 확인된 장무이묘 출토 전돌은 14종 81점(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1종 54점 포함)에 이른다. 비단 장무이묘만 출현한 것이 아니었다. 묘 주변에서 노출된 당토성(지탑리 토성)을 조사했더니 장무이묘와 같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식민사학의 세포를 깨웠다
새삼 ‘대방군’이 부각됐다. 대방군은 여러 설이 있지만 통설을 꼽자면 기원전 108~107년 설치된 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도군) 중 진번군의 한 현이다. 기원전 82년 낙랑군에 편입되었다가 기원후 3세기쯤 공손강이라는 인물이 ‘대방군’으로 승격 부활시켰다. 그러다가 기원후 313년(혹은 314년) 고구려군에게 소멸될 때까지 100여년간 유지했다.
그 경우 명문 벽돌에 등장하는 ‘대방태수 장무이’와 ‘무신년’ 간지를 연결하면 ‘288년’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장무이묘 인근의 지탑리토성은 대방군의 치소(행정관서)가 존재했던 곳이라는 얘기인가.
중국이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인 대방군의 중심지역이 바로 이곳(황해도 봉산)이라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나온 것이다.
황해도가 대방군이라면 대동강변은 어디인가. 낙랑군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때까지(1911년) 대동강변에서 잇달아 발견되던 전돌 무덤은 고구려가 아니라 낙랑 고분이 맞다는 얘기가 된다.
세키노를 신봉하며 도리이 류조의 견해를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 일본 주류학계가 술렁거렸다.
한마디로 말해 ‘장무이묘 발굴’은 잠자고 있던 식민 사학의 세포를 두들겨 깨운 꼴이 되었다.
입장 조정이 불가피했다. 1909년 11월 세키노 다다시에 이어 대동강변 석암동 을분을 조사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발빠른 행보를 보인다. 1909년 조사한 석암리 을분의 주인공을 ‘고구려’가 아닌 ‘낙랑’으로 바꿔버렸다.
석암동 을분에서 나온 칠기 부속금구의 명문, 즉 ‘王×’ 명을 중국에서 건너온 ‘낙랑 왕씨’와 관련시킨 것이다.
주류학계를 대표하던 세키노도 슬그머니 ‘낙랑설’을 개진함으로써 ‘학설세탁’에 나선다.
1912년 후배인 야쓰이가 발굴한 장무이묘를 직접 조사하면서 “이 무덤은 (1909년 대동강변에서 조사한) 석암동 고분과 같은 전돌무덤”이라면서 “중국 고대의 무덤과 유사하다”고 해석했다. 1909년 당시 고구려무덤으로 규정된 석암동 고분이 세키노에 의해 낙랑고분으로 수정되는 순간이었다.
■장무이묘의 나비효과
이른바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나비효과’는 ‘낙랑 광풍’으로 번져간다. 세키노 등은 적극적으로 낙랑찾기에 나선다.
급기야 1913년 이마니시와 짝을 이뤄 대동강 남안에 밀집한 고분군의 한가운데에서 낙랑토성을 발견했다. 이곳에서 ‘낙랑예관(樂浪禮官)’이 찍힌 명문기와와, ‘낙랑태수장(樂浪太守長)’ 봉니(封泥·문서류 등을 봉함할 때 쓴 점토) 등이 발견됐다.
이어 평남 용강군 어을동에서 토성과 함께 ‘점제현 신사비’가 발견됐다. 일본학계는 열광한다.
황해도엔 대방, 대동강변엔 낙랑…. 313년까지 무려 421년이나 한반도 서북쪽을 지배해왔던 한사군이 현현하다니….
그러니 어찌되었을까. 가뜩이나 한국 역사의 타율성과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일제는 옳다구나 싶었다. 조선총독부가 1916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벌인 고적조사사업에 ‘평양 일대의 낙랑 고분 조사’는 0순위로 꼽혔다. 그 이유가 기막힌다.
“…단군의 건국설화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비교적 연대가 명백한 것은 한치군(한사군)의 시기가 처음이다…”(‘고적조사개요’)
대방-낙랑군의 영역으로 치부된 서북한 일대에 발굴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일제가 패망 직전인 1944년까지 이른바 발굴조사로 파헤친 낙랑 고분은 무려 93기에 이른다. 그래서 ‘장무이묘가 식민사학의 악령을 깨웠다’고 하는 것이다.
■세키노 다다시의 오독
그런데 최근들어 ‘장무이묘’를 둘러싸고 흥미로운 견해가 등장했다.(정인성 영남대 교수)
무덤의 조성 시기가 ‘288년’이 아니라 ‘348년’이라는 해석이 통설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중요한 논쟁점이다.
‘288년’이면 이른바 대방군이 존재했던 시기이고, ‘348년’이면 소멸한 지(313년) 35년이 지난 후이기 때문이다.
1910년대 발굴자인 세키노는 ‘장무이묘’ 무덤방의 천장을 ‘벽돌로 쌓은 궁륭상(아치형)=한나라식’으로 인식하고 복원도면을 그려 <조선고적도보>(1915)에 제시했다. 무슨 근거였을까. 사실 장무이묘의 천장은 무너진 상태로 노출되었다.
그런데 세키노는 본인이 조사한 ‘대동강변 벽돌무덤’의 경험만으로 무너진 장무이묘의 천장을 멋대로 ‘아치형 벽돌’로 복원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세키노가 간과한 대목이 있다. 무덤 바닥에 비스듬히 기울어진채 서있던 대형 판석이었다.
세키노는 도굴범이 바닥에 깔려있던 대형 판석을 일으켜 세운 뒤 그 밑의 부장품을 꺼낸 흔적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무덤에 침입해서 부장품만 서둘러 꺼내간 도굴꾼들이 그 무거운 대형판석을 들어올릴 여력이 있었을까.
■무덤안에 칠해진 석회의 정체
더욱이 이 비스듬히 서있던 대형판석은 물론 무덤방과 무덤길 벽면 모두에도 석회가 발려 있었다. 매우 중요한 착안점이다.
석회발림이 전형적인 고구려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북한 현지에서 고구려고분을 실견한 연구자(정인성 영남대 교수)는 진파리 1·4·5호분과 덕흥리고분의 천장석 밑 등에서 두껍게 발린 석회를 확인했다.
그렇다면 벽돌로 쌓은 무덤에 회칠을 잔뜩 하고 지붕에는 돌을 얹어 마감했다는 얘기인가. 맞다는 것이다.
이렇게 ‘벽돌무덤+돌덮개’라는 절충형은 동리묘·승리동 3호·로암리·봉도리 송오고분 등 대방군 멸망 후인 4세기대의 무덤에서 보이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무덤의 평면 형태가 사각형이라는 점, ‘무덤의 겉모양’(분구) 크기에 비해 매장주체부가 극단적으로 작다는 점 등도 고구려적이라는 것이다. 고구려 태왕릉·호남리 사신총·토포리 대총·강서삼묘 등을 보라는 것이다.
‘장무이묘’와 가장 유사한 고분의 형태는 지안(集安)의 우산 3319호이다. 매장주체부를 벽돌로 쌓았고, 석회로 싸발랐다. 무덤방에서 확인된 명문 기와 중에 ‘355년’과 ‘357년’으로 읽힐 수 있는 간지가 보였다. 비슷한 연대에 제작된 중국제 도자기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떨까. ‘장무이묘’ 역시 대방군이 소멸된 313년 후에 조성됐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무신년’ 간지가 맞다면 ‘288년’이 아니라 ‘348년’일 가능성이 짙다.
■장무이는 이름이 아니다
장무이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1911년 발굴실무자인 야쓰이는 <삼국지> ‘위서·동이전·한’조의 기사를 눈여겨 보았다.
즉 “(대방군을 만든) 공손강이…장창 등을 파견해서…(대방군) 백성들을 복속시켜 잘 다스렸다”는 구절을 인용했다. ‘장무이묘’의 주인공을 공손강이 파견한 ‘대방태수 장창 부부’라고 추정한 것이다. 무덤 축조자는 그 아들이라고 덧붙였다. ‘부모를 장사 지냈다(以葬父母)’는 명문 벽돌의 내용이 그 근거라는 것이었다.
반전의 이야기지만 사실 ‘장무이’는 사람 이름이 아니다. 1951년 발견된 황해도 안악3호분 벽화에서 주인공인 동수의 직책을 나열하는 와중에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관직이 언급되어 있다. 그렇다면 ‘장무이(張撫夷)’는 ‘장씨’성에 ‘무이’라는 관직명을 붙인 사례가 아닐까. 여기서 또한번 궁금증이 생긴다.
만약 이 무덤이 대방군 소멸 후(348년) 조성했다면 ‘대방태수’도, ‘무이(호무이교위)’도 시대착오적인 관직명이 아닌가.
그러나 평양에서 발견된 벽돌무덤(동리묘)에서도 ‘353년(영화9년) 요동·한·현도군을 관할하는 태수인 동리가 만들었다’는 명문벽돌이 확인됐다. 기원전 75년에 쫓겨간 현도군 태수(동리)가 400년 이상 지난 353년에 부활했다는 것인가.
왜 이런 시대착오적인 관직명이 잇달아 등장하는 걸까. 연구자들은 안악3호분의 ‘동수’, 동리묘의 ‘동리’, 장무이묘의 ‘장무이’ 등이 모두 ‘과거의 관직’을 끌어썼거나 무덤주인공을 예우하기 위해 얹어준 ‘허호(虛號)’일 가능성이 짙다고 보고있다.
한번 장관이면 ○○○장관, 한번 국회의원인 ○○○의원이라 하지 않은가.
‘대방태수 장무이’는 벽돌의 명문처럼 중국 어양 출신으로 파견되었다가 대방군 소멸 후 고구려에 정착한 인물로 추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대방군 초기에 파견된 대방태수 장창은 아닐 가능성이 짙다. 시대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장창의 후손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장창의 후예가 ‘태수를 역임한 가문’을 자칭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장무이’를 두고 중국인이니 한국인이니 하는 이니 하는 이분법으로 따지는 것은 옳지 않다. 외국인라도 이 땅에 정착해서 수십년간 터전을 잡고 살았다면 그 이는 고구려인, 한국인이 아닌가.(이 기사를 위해 정인성 영남대교수와 이나경 국립춘천박물관 학예연구관이 도움말과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이기환 히스토리텔러
<참고자료>
정인성, ‘대방태수 장무이묘의 재검토’, <한국상고사학보> 69권69호, 한국상고사학회, 2010
정인성,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낙랑유적 조사·연구 재검토-일제 강점기 고적조사의 기억1’, <호남고고학보> 제24집, 호남고고학회, 2006
이나경·안정준·장병진·정인성, ‘장무이묘로 본 3~5세기 동아시아’, <고고학으로 본 권력과 공간>, 제47회 한국고고학전국대회 발표문, 한국고고학회, 2023
국립중앙박물관, <평양 석암리 9호분>(일제강점기 자료조사보고 30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