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누가 봐도 1만원이지만…나는 모르겠습니다

조미덥 기자

구분 어려운 지폐

[장애인도 소비자다]⑥누가 봐도 1만원이지만…나는 모르겠습니다

‘6만원’ 받아온 줄 알았는데
집에서 확인하니 1만5000원
시각장애인들 사회서 ‘곤혹’

호주에선 ‘돌출부’ 넣어 구별
한은 “당장 도입하기 어려워”
장애인들 “지폐 구분 앱 필요”

시각장애인 안마사 김주연씨(55·가명)는 최근 출장안마에서 속상한 일을 겪었다. 안마를 하고 현금 6만원을 받아왔는데, 집에 와서 가족에게 확인하니 1만5000원이었다. 하지만 연락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 김씨는 “손님이 5000원과 5만원을 헷갈리신 것 같다”며 “내가 돈을 받고 바로 확인하지 못했는데 어쩌겠나. 괜히 얘기했다가 서로 기분만 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참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인 이병돈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대표는 몇년 전 고깃집에서 한 실수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시각장애인이라고 잘 챙겨준 직원에게 팁으로 1만원을 줬는데, 나와서 일행에게 들으니 1000원이었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했다”고 했다. 이 대표는 그 후 외출 전 주머니마다 철저하게 지폐를 구분해 넣는다. 양복 상의 안주머니에 5만원과 1만원권, 바지 왼쪽 주머니에 5000원권, 바지 오른쪽 주머니에 1000원권을 넣는다. 요즘 같은 무더위에도 이 대표는 안주머니에 지폐를 넣어 다니기 위해 재킷을 꼭 입는다.

8일 경향신문 취재에 따르면, 시각장애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지폐를 구분하지 못해 낭패를 본 경험이 있었다. 요즘은 신용카드 사용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현금을 꺼내야 할 일은 많다. 시각장애인들은 비장애인보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다. 원래 익숙한 현금 지급 방식을 바꾸지 않으려는 성향도 있고, 신용카드는 얼마가 결제되는지 바로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마사로 종사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많은데 이들은 출장 때 현금을 받는 일이 많아 거스름돈을 준비해야 한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8일 이병돈 대표가 1만원권 지폐를 꺼내고 있다. 이 대표는 지폐를 여러 주머니에 구분해서 넣고 다니기 위해 더운 날에도 꼭 양복 재킷을 입는다.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제공

서울 영등포구의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사무실에서 8일 이병돈 대표가 1만원권 지폐를 꺼내고 있다. 이 대표는 지폐를 여러 주머니에 구분해서 넣고 다니기 위해 더운 날에도 꼭 양복 재킷을 입는다. 한국장애인소비자연합 제공

한국 지폐에도 앞면 인물초상 오른쪽에 작은 점자가 있다. 금액별로 1000원권엔 원이 1개, 5000원권엔 2개, 1만원권엔 3개다. 5만원권엔 원 대신 5개의 줄이 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은 신권이 아니면 이 점자를 촉각으로 인지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 대표는 “시각장애인 25만명 중 이 점자로 지폐를 구분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폐 길이도 금액별로 다르긴 한데, 길이로는 어느 것이 더 큰돈인지 상대 비교만 되고, 이 역시 오래된 지폐는 구겨져서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한다.

지난 6월 호주에선 한 시각장애인 소년의 간곡한 청원으로 5달러 지폐를 바꾼 일이 있었다. 지폐 모서리에 설탕 한 알 크기의 돌출부 2개를 넣어 촉각으로 쉽게 구분되게 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향후 지폐를 새로 디자인할 때 개선하겠지만, 지금 당장 지폐에 새로운 점자 표식 체계를 도입하긴 어렵다”고 밝혔다.

지폐만 바꾸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전국에 보급된 은행 현금인출기(ATM)와 자판기 등 지폐를 인식하는 모든 기기의 센서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강창식씨가 지난해 지폐 점자를 개선해달라고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넣었지만,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야기돼 (한은이) 이행하기 곤란할 것으로 보인다” 등의 이유로 ‘기각’ 결정이 나왔다.

시각장애인들은 정부가 당장 지폐의 점자 표식 체계를 바꿀 수 없다면, 지폐를 구분해주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이나 기기를 보급해주길 원했다. 지금도 지폐를 비추면 구분해주는 스마트폰 앱은 있는데 유료이고, 스마트폰에 익숙지 않은 시각장애인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대표는 “기술적으로는 앱을 만드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들었다”며 “정부가 만들어 보급해주면 많이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정부가 공신력 있는 앱을 만들면 향후 앱의 적용 대상을 신용카드, 백화점 상품권 등으로 확대해 소비생활이 훨씬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요즘 발급되는 신용카드 상당수는 카드 번호가 예전처럼 양각으로 돌출돼 있지 않아 시각장애인들은 카드를 구분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점자 카드를 발급해주는 카드사는 KB국민카드 등 일부에 불과하다. 백화점 상품권도 금액을 오인해 실수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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