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포럼

“기본소득이 노동 이탈 유발?…그럼 어떤가, ‘돌봄’이 풍성해지는데”

오스틴 | 안호기 사회경제연구원장 정리 김경학·이창준 기자

‘자본주의’를 되묻다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정책대학원 교수 라즈 파텔

라즈 파텔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정책대학원 교수가 지난달 5일 텍사스대 린든 B 존슨 정책대학원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대담하고 있다.  오스틴 | 김경학 기자

라즈 파텔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정책대학원 교수가 지난달 5일 텍사스대 린든 B 존슨 정책대학원 연구실에서 경향신문과 대담하고 있다. 오스틴 | 김경학 기자

라즈 파텔 미국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정책대학원 교수(51)는 이력이 독특하다. 세계무역기구(WTO)에서 일한 그는 그만둔 뒤 WTO를 비판하며 ‘반WTO 활동가’로 불렸다. 세계은행과 유엔 등 다른 국제기구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지만 역시 이들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4개 대륙에서 최루탄을 맞기도 했다. 옥스퍼드대와 코넬대 등에서 학위를 받은 ‘제도권 엘리트’임에도 커리어의 많은 시간을 제도권과 싸우며 연구실 대신 시위 현장에서 보냈다.

파텔 교수는 자신의 투쟁이 단순히 특정 기구나 사안만을 향한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는 수백년간 이어져 온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물음표를 던진다. 자본주의는 자연과 노동력처럼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요소를 너무 싼값에 착취해 왔고, 그 결과 사회를 더 이상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화시켰다는 것이다.

고갈돼가는 자원에 제값을 치르지 않으면 현재의 ‘자본세(Capitalocene·자본의 시대)’는 파시즘과 같은 극단의 시대로 변질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파텔 교수의 주장이다. 당장 돌봄에 충분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파텔 교수는 기본소득처럼 실험적인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파텔 교수는 “저렴하게 취급된 요소 중 핵심은 돌봄”이라며 “돌봄을 진지하게 고려해야만 우리 스스로 미래를 어떻게 바꿔 나갈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텔 교수는 오는 28일 열리는 <경향포럼>에 참석해 이 같은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로 했다. 지난달 5일 텍사스대 오스틴 캠퍼스 연구실에서 파텔 교수를 만났다.

저렴하게 취급된 요소 중 핵심이 ‘돌봄’
자본주의는 청구서를 늘리기만 하는
지속 불가능한 체제일 뿐
우리는 청구서 개수·액수를 줄이려 하지만
기저에 깔린 ‘착취’라는 본질은 그대로

- 세계은행과 WTO,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이들 기구에서 나온 뒤 앞장서 반대 활동으로 돌아선 계기는.

“이전부터 세계은행과 WTO가 하는 일에 회의적이었다. 직접 몸담고 일해보니 회의감이 확신으로 변했다. 세계은행은 유상 원조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원조를 받는 나라는 그 대가로 환경과 노동자 보호 정책을 철폐해야 했다. 1980~1990년대 시행된 구조조정부터 최근 ‘개발도상국 대상 빈곤 대응책(PRSP)’까지 세계은행은 늘 저렴한 이율로 자금을 제공하는 대신 개도국 주권의 일부를 침해했다. 다만 유엔은 평가하기 조금 복잡하다. 이들은 농민 인권 신장 등 일부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기도 하다.”

- 현재 인류가 처한 환경 위기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지목하면서 ‘자본세’의 시작을 1400년대로 규정했다. 600여년의 자본세가 끝나면 어떤 ‘세’가 도래할 것으로 전망하나.

“어려운 질문이다. 무엇보다도 파시즘이 고개를 들고 있는 점이 매우 우려스럽다. 점차 권위주의 색채가 짙어지는 국가들이 많다. 이들은 인종이나 종교적 순혈주의 정서를 이용해 위기를 통제하려고 한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이끄는 인도 정부가 그 예다. 그들은 특정한 민족주의를 자극해 자신들의 위기를 관리하려 한다. 미국에서는 에코파시즘(환경 보호 명목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 자본주의가 저렴하게 착취한 요소로 자연, 돈, 노동, 돌봄, 식량, 에너지, 생명을 꼽았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돌봄이야말로 저렴하게 취급된 요소 중 핵심이다. 돌봄이라는 주제를 통해 사회적 재생산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아주 큰 고찰이 될 것이다. 최근 자본가들은 주거, 수도, 에너지 등 사회기반시설을 민영화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런 요소는 우리가 서로를 돌보는 데 꼭 필요하다. 재생산과 돌봄의 민영화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있다. 돌봄을 둘러싼 아이디어는 우리가 미래를 위해 어떻게 스스로를 탈바꿈할 수 있을지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요소다.”

- 돌봄에 제값을 지불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한국은 국가 재정의 가장 많은 부분을 복지에 쏟고 있지만, 복지 공백이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데.

“미국의 보건 지출은 연간 4조달러에 육박한다. 미국 국내총생산의 20%에 달하는 수치다. 엄청난 규모의 낭비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각자 돌봄 활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스스로 부모나 자녀를 돌보고 환경보호 활동에 나설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생존 가능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보장한다면 노동량은 줄고 돌봄 활동이 증가하게 된다. 이는 연구를 통해 입증됐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돌보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돌봄에 얼마를 쓸지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 일종의 실험과도 같은데, 우리 모두 이 실험에 동참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 기본소득을 제공하면 노동 욕구가 낮아진다거나 늘어난 소득을 단순히 쾌락을 위해 소비할 수 있다는 비판도 있다.

“사람들이 (기본소득을 받고) 노동시장에서 이탈한다면 그들은 무엇을 할까.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에 시간을 할애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노동시장에서 벗어나 인생을 예술가처럼 산다고 해도 전혀 나쁘지 않다. 기본소득 실험의 취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롤스로이스 같은 사치품을 향유하도록 하는 게 아니다. 기본소득은 그저 기초 생활을 영위하고 약간의 저축을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수입일 뿐이다. 기본소득을 받는 사람들은 늘 그들이 꿈꿔왔던 의미있는 일에 나서지, 마약을 흡입하거나 비디오게임에 심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 노예처럼 착취 상태에 있는 노동자가 4000만명에 이르고, 굶주리는 사람은 10억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이들의 고통은 이미 한계에 이른 것 같은데, 왜 세상은 그대로일까.

“매우 좋은 질문이다. 누군가는 ‘굶주리는 사람이 20억명, 30억명, 40억명에 이르면 세상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한다. 얼마나 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하나. 그래서 파시즘이 우려된다는 것이다. 이 위기를 아주 파괴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도처에서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자유주의에 기반한 사회민주적 제도와 장치들이 ‘우리가 이 문제를 해결할 테니 파시즘은 걱정하지 마’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는 점이다. 하지만 자유주의와 파시즘은 서로 연장선상에 있고, 자유주의는 쉽게 파시즘으로 변질된다.”

- 변화를 위해서는 저항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흑인 목숨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나 ‘350.org(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350PPM으로 낮추자고 촉구하는 국제적 기후변화 방지 운동)’ 등의 투쟁이 있었다. 하지만 저항과 투쟁을 확산시키고 더 발전시켜야 할 지배구조 역시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면 결국 정치가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모든 건 정치적 함의를 갖는다. 여기서 정치는 단지 누구에게 투표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를 총망라하는 개념이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는 정치적인 질문이다. 모든 게 정치적이고, 정치가 바로 유일한 해결 방안이다. 그러나 투표가 정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정치는 투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 파시즘이 대두하는 현재 상황을 고려하면 선거를 통해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민주주의란 모두가 각자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체제다. 현실의 민주주의는 마치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과 같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인가. 선택권이 있다는 점에서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에서 사람들은 선택지마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 탈자본주의적 정치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으로 안다. 자본주의 체제는 유지하되 문제 요소를 수정하는 식으로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까.

“자본주의는 지불해야 할 청구서를 늘리기만 하는 지속 불가능한 체제일 뿐이다. 요금 청구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도) 우리는 청구서의 개수와 액수를 줄이려 하겠지만 그 기저에 존재하는 착취라는 본질은 그대로일 것이다.”

- 당장 인류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를 하나만 꼽으면.

“단연코 기후위기다. 그리고 기후위기는 곧 자본주의의 위기다.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기후위기 또한 없었을 것이다. 기후위기는 또한 파시즘과 긴밀히 연관돼 있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이면서, 식량 위기기도 하고, 돌봄에 관한 문제기도 하다. 기후위기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합돼 나타나는 현상이다.”

-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시민들은 재활용품을 사용하는 등 나름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양적 성장을 지향하는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근본적으로 기후위기 극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다.

“우리는 모두 ‘가능한 한 금속 빨대를 사용하고 분리배출을 통해 재활용을 늘리라’는 압박을 받는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대응하려는 전형적인 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한다. 우리는 금속 빨대와 재활용만으로 기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적 문제에 지극히 개인적인 해결 방안만을 반복하며 걱정 말라고 하는 분위기가 매우 우려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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