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슨한 전세대출, 집값 상승·전세사기 원인···정부 전세보증 고쳐야”

경주 | 유희곤 기자
참석자들이 지난 9일 경북 경주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3 한국금융학회 특별 정책 심포지엄 ‘한국 부채의 진단과 해결 -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발언하고 있다. 유희곤 기자

참석자들이 지난 9일 경북 경주 라한셀렉트호텔에서 열린 2023 한국금융학회 특별 정책 심포지엄 ‘한국 부채의 진단과 해결 -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서 발언하고 있다. 유희곤 기자

최근 전세사기 등과 관련해 사실상 ‘사금융’의 역할을 하면서 임대인이 손쉽게 갭투자를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전세대출 제도를 대폭 손질해야 한다는 전문가들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 금융학자들은 코로나19 기간에 주택담보대출은 억제하면서도 전세대출은 확대해 갭투자 증가와 이에 따른 주택가격 급등과 전세사기를 불러왔다고 비판했다.

최근 발생한 역전세로 임대보증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는 임대인의 대출 규제를 완화해주겠다는 현 정부의 정책도 규제완화가 아닌 재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비판이 나온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는 “경제의 과도한 금융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11일 경향신문 취재 결과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지난 9일 경북 경주에서 열린 금융학회 정책심포지엄에서 “공공임대주택 확대 등 재정이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전세대출을 확장하고 보증제도를 도입해 금융으로 해결한 결과 가계부채 규모는 늘고 임차인의 전세자금대출이 임대인의 갭투자 원금이 돼 주택 가격이 급등했다”고 비판했다.

이 교수는 전세대출의 가장 큰 문제로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을 위험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다는 점을 꼽았다. 그는 “전세대출은 사실상 주택에 대한 대출인데도 세입자의 소득과 신용도를 바탕으로 한도가 정해지는 신용대출의 성격이 있다”면서 “세입자의 이자 갚을 능력은 엄격히 평가하면서도 임대인(집주인)의 전세보증금 반환 가능성은 제대로 심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박창균 자본시장연구원 부원장은 “전세 대출은 2010년대 후반 주택담보대출 규제가 강화하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가계대출 증가세를 견인했다”면서 “정부가 임차보증금을 과도하게 보증해 임차인은 물론 임대인의 모럴헤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기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전세대출 잔액은 2017년 1월 36조5000억원에서 2022년 10월 171조9000억원으로 늘었다. 같은 기간 전체 주택담보대출 잔액은 545조9000억원에서 751조1000억원으로 증가했다. 약 6년간 커진 전체 주택담보대출 잔액(205조2000억원)의 66.0%(135조4000억원)가 전세대출이었다.

전세대출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정책금융기관이 대출금의 90~100%를 보증한다. 은행은 사실상의 정부 보증에 기대 대출심사를 소홀히 하고, 임차인들도 보증보험에 기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을 크게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산정에서도 제외된다. DSR 규제는 매년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가 연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은행은 40%, 비은행은 50%가 적용된다. 지난해부터 강화됐으나 전세대출, 정책금융상품은 산정 대상 대출에서 빠졌다.

참석자들은 정부가 임대인의 DSR 규제를 완화해 임대보증금 반환 여력을 높이겠다는 정책도 비판했다. 이 교수는 “대출로 생긴 문제를 또 다른 대출로 막는 것은 미봉책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철인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한국재정학회장)는 “과거에는 금융 부실을 재정이 떠안는 경우가 많았는데 지금은 반대인 것 같다”면서 “재정 문제가 금융으로 이전되는 것을 막는 게 앞으로의 과제이고 금융 부문만큼은 경제적으로(경제 논리에 따라) 냉정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전세제도를 폐지하기는 쉽지 않고 제도 자체의 정책적 역할도 있다면서 보증 제도의 축소 내지 폐지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제시했다.

허석균 중앙대 경영학부 교수는 “전세 제도 자체보다는 정부 보증을 없애야 한다”면서 “시장의 수요가 있다면 금융사도 보증 없는 전세를 공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부원장도 “전세 제도가 사회정책적으로는 바람직할 수도 있지만 경제와 금융 분야에서는 위험한 요소로 자리잡았다”면서 “정부 보증 규모를 축소하거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제도 정비가 필요하고 주택바우처도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특별강연을 한 정운찬 전 국무총리(전 한국금융학회장)는 금융 분야의 신뢰를 강조하면서도 경제의 금융화를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전 총리는 “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의 지난 3월 파산은 신뢰를 잃으면 어떤 금융기관도 한 순간에 사라진다는 점을 새삼 알게 해 줬다”면서 “보유 자산 가치의 하락에 따른 손실 가능성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최고경영자가 보유지분을 미리 매각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위가 은행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화폐금융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지나친 금융화의 문제점’을 실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경제의 금융화가 실물 부문을 위축시키고 소득과 부의 양극화를 가속할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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