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시동…‘K반도체’에 기회일까, 독배일까

이재덕 기자

한국 등 6개 지역 제작 참여…국내 기업들, 미국 투자에 ‘승부수’

일자리 창출·경제안보 측면서 ‘한국 내에도 생산기반 둬야’ 지적

경쟁적 투자로 향후 ‘공급 과잉’ 우려…“가격 폭락도 대비해야”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미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 ‘램리서치’ 직원에게서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20일 삼성전자 평택공장에서 미국의 반도체 장비 회사 ‘램리서치’ 직원에게서 반도체 장비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애플의 아이폰13에는 애플이 자체 설계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인 ‘A15 바이오닉’이 장착됐다. 모바일 AP는 연산과 그래픽, 메모리 등 다양한 시스템이 하나의 칩에 담긴 반도체(SoC)로, 스마트폰의 성능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다. 애플의 A15 바이오닉을 만드는 데 다양한 기업들이 협력한다. 애플은 AP 공장(Fab)이 없기 때문에 설계만 하고 생산은 위탁업체에 맡긴다. 설계만 하는 반도체 회사를 팹리스(Fabless), 위탁 생산만 하는 회사를 파운드리(Foundry)라고 한다. 반도체를 설계하려면 기본적인 설계도면(IP·설계자산)이 필요하다. 애플은 영국 회사 ARM의 IP를 구입해 반도체를 디자인한다. 설계를 위한 전용 소프트웨어도 있어야 한다. 미국의 시놉시스나 케이던스 같은 반도체 설계 자동화(EDA) 업체들이 이를 제공한다.

미국 주도 반도체 공급망 재편 시동…‘K반도체’에 기회일까, 독배일까

■ ‘6개 지역’이 만든 글로벌 공급망

그렇게 완성된 ‘A15 바이오닉’의 설계도는 대만의 TSMC로 전달돼 실물로 만들어진다. TSMC는 세계 1위 파운드리 업체로, 그 뒤를 삼성전자(한국), UMC(대만), 글로벌파운드리스(미국), SMIC(중국) 등이 쫓고 있다. 반도체는 감광제를 바른 실리콘 웨이퍼 원판에 빛을 쏘는 방식(노광 작업)으로 회로를 새겨 넣는데, 회로의 선폭을 최소화해 보다 많은 회로를 넣을 수 있는 파운드리가 경쟁력을 갖는다. 1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이하 초미세 공정에서는 극자외선(EUV)으로 회로를 새긴다. 극자외선 노광 장비는 네덜란드의 ASML에서만 생산하고, 극자외선에 반응하는 감광제인 EUV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에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반도체는 대만과 말레이시아에서 패키징 등 후공정을 거친다. 이외에도 실리콘 웨이퍼의 재료가 되는 실리콘 다이옥사이드(실리카)는 미국에서 채굴돼, 일본에서 정제 과정을 거치고, 한국 등에서 실리콘 웨이퍼로 만들어진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과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는 2021년 4월 낸 ‘불확실한 시대의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 강화’ 보고서에서 “크게는 6개의 주요 지역이 (반도체 제작에) 참여한다. 미국, 한국, 일본, 중국 본토, 대만, 그리고 유럽이다. 이들 국가는 반도체 제작에 있어 각각 8% 이상의 부가가치를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 ‘중국’ 제외시키려는 바이든 정부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는 시스템반도체의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 본토를 제외시키려 한다. 반도체는 정보기술(IT)·자동차·차세대 통신 등 국가의 미래 성장동력이 될 핵심산업에 필요한 부품일 뿐 아니라 최신 무기에도 사용된다. 예컨대 미국의 팹리스 자이링스가 만든 FPGA 반도체(프로그래밍이 가능한 반도체)는 통신용 기지국과 클라우드용 서버뿐만 아니라 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F-35에도 들어간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는 기간산업”(2021년 4월)이라고 외친 건 이 때문이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역시 ‘국가안보’를 이유로 중국 통신기업 화웨이에 반도체가 공급되는 것을 막았고, 성장가도를 달리던 화웨이는 큰 타격을 입었다.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로 끌어올리려는 중국은 SMIC를 앞세워 초미세 공정 개발을 추진하고 있지만, 정작 공정에 필요한 ASML의 극자외선 노광 장비는 미국에 막혀 단 한 대도 들이지 못하고 있다.

■ 한국은 순응해야 할 입장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은 ‘K반도체’의 성장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권석준 성균관대 교수는 “(한국이) 공급망 재편에 참여할지 여부는 선택이 아닌 의무에 가까운 상황이 됐다”면서 “미국 주도로 진행되는 공급망 재편이 마냥 반가운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미국 입장에서 한국과 대만은 각각 ‘북한 리스크’와 ‘중국 리스크’를 갖고 있는 지역이다. 파운드리 참여를 선언한 인텔의 팻 겔싱어 최고경영자는 지난해 10월 언론 인터뷰에서 “세계가 (아시아) 한 지역에 의존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지 않다”면서 “미국 땅에 더 크고 빠르게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미 의회가 지원법을 제정해) 도와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아시아 의존도를 줄이면서 미국 내에 생산공장을 늘려나가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올해 미국 상·하원을 통과한 ‘반도체 지원법’은 미국 반도체 업체를 지원해 경쟁력을 높이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데, 삼성전자와 TSMC도 미국에 반도체 생산공장을 짓는다는 이유로 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국내에 생산 기반을 두는 것 역시 일자리 창출 및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중요한 일이다. 삼성전자도 지난 24일 투자계획을 발표하면서 “경제안보 측면에서 반도체 공급망을 국내에 두는 것은 단순히 GDP(국내총생산) 등 수치로 표현되는 그 이상의 전략적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이 분리된다는 건 중국 기업을 주요 고객으로 하던 한국과 대만 역시 거대한 시장을 잃게 된다는 의미다. ‘반도체 공급 부족’을 겪는 지금은 미국, 대만, 한국이 경쟁적으로 공장을 늘리고 있지만, 향후 시장 규모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면 반도체 가격이 폭락할 수도 있다. 지금의 설비투자가 미래에 막대한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뜻이다. 권석준 교수는 “앞으로 줄어들게 될 중국 시장을 대체할 지역을 찾는 게 급선무”라며 “인도·태평양 축에서 본다면 인도와 아세안, 호주에서 새로운 시장이 창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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