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민은 안 보이는 구룡마을 개발 그림

글·사진 류인하 기자
서울 강남구 개포동 567-1 일원 구룡마을 내 주거지가 밀집해 있다. 거주민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 집의 지붕과 벽면을 천으로 둘렀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567-1 일원 구룡마을 내 주거지가 밀집해 있다. 거주민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 집의 지붕과 벽면을 천으로 둘렀다.

용적률 500%·입주권 제공 등
민주당의 ‘1만2000가구 공급안’
현실성 없고 이해관계 고려 안 돼
싼값 분양해도 비용 감당 못해
주민들 “지키지 못할 헛공약”

서울시 맞서 강행할 방법도 없어
“포퓰리즘으로 시장 혼란만 야기”

“언급할 가치가 있을까요? 누가 봐도 불가능한 계획인데. 말 그대로 ‘공약(空約)’ 아닙니까.”

지난 18일 구룡마을주민자치회 사무실에서 만난 유귀범 회장(73)은 “또 시작이다”라며 헛웃음을 쳤다. 그는 몇 해 전 화재로 사무실이 타버린 뒤 25인승 버스를 개조해 사무실로 쓰고 있었다.

더불어민주당은 20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 첫날인 지난 15일 구룡마을 공공개발사업을 통해 이 일대에 1만2000가구의 주택을 공급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 중 5000가구는 청년·신혼부부에게 반값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임대주택 공급계획은 포함되지 않았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567-1 일원 ‘구룡마을’을 공공주택 특별공급구역으로 지정하고, 4종 일반주거지역 신설 및 종상향 추진을 통해 용적률(대지면적 대비 건축 연면적 비율)을 최대 500%까지 늘려 경기도에 집중된 수도권 공공주택 공급을 서울 강남 노른자 땅에도 하겠다는 얘기다. 얼핏 들으면 상당히 매력적인 수도권 공급계획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지난 10여년간 지루하게 벌어진 구룡마을 주민과 토지주, 서울시와 강남구 간의 갈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구룡마을 개발을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4종 일반주거지역을 신설해 종상향을 통한 용적률 500%를 만드는 것 자체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현재 구룡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은 650여명이다. 주민등록상에는 1107가구가 거주하고 있지만, 실제 거주자는 ‘구룡마을주민자치회’ 소속 주민이 전부다. 구룡마을 주민들은 2012년부터 개발방식을 놓고 갈등을 빚다 구룡마을주민자치회와 구룡마을자치회로 갈라졌다. 구룡마을주민자치회는 대토지주와 토지신탁을 통해 약속한 땅을 무상으로 양도받아 주택조합을 통해 내 집을 짓는 ‘환지방식 공영개발’을, 구룡마을자치회는 서울주택토지공사(SH공사)가 토지를 매입해 직접 개발하는 방식으로 민간에 분양하는 ‘100% 공영개발’을 주장해왔다.

원주민은 안 보이는 구룡마을 개발 그림

■주민 “대선용 공약…현실성 떨어져”

이후 서울시는 2016년 구룡마을 26만6502㎡에 임대주택(1107가구) 포함, 총 2838가구를 공급하는 실시계획을 인가했다. 이 계획에 따라 구룡마을자치회 소속 주민 454가구는 2017년부터 위례신도시 등 SH공사 소유 임대주택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토지주와 거주민 사이에 보상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서 당초 2020년 완공 후 입주예정이었던 구룡마을 도시개발사업은 2023년으로 연기됐다. 2023년 이후에도 또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대체적 관측이다. 임대아파트로 옮긴 주민들이 4년째 구룡마을로 돌아오지 못하면서 또 다른 갈등의 불씨가 되고 있다.

구룡마을에 남아 있는 주민들은 민주당이 발표한 공약에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다. 구룡마을 주민 A씨(71)는 “토지주의 이해관계가 제각각이고, 여기 사는 사람들의 생각도 제각각인데 또다시 불가능한 약속을 하고 있다”면서 “지난 10여년간 각종 사건사고에 법정분쟁까지 겪으면서도 첫 삽조차 뜨지 못한 구룡마을 개발이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고 가능하겠나”라고 말했다.

■“입주권 준다는 것, 말장난”

민주당은 주민들에게 모두 입주권을 주겠다고 밝혔지만 이 역시 현실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유귀범 회장은 “입주권은 말 그대로 새집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일 뿐 아무리 싼값에 분양을 한다 해도 현실적으로 여기 주민들이 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입주권을 준다는 것 자체가 말장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주민 대부분이 70~80대인데 어느 세월에 임시거주시설에 있다가 원래 살던 데로 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도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주민의 평균연령은 70대 초중반이다.

구룡마을에 조성된 집이 무허가 건축물이 아닌 ‘무허가 공작물’로 등록돼 있는 것도 개발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공작물’은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축사 등의 시설을 뜻하기 때문에 사람은 이주대책 대상에 포함될 수 없다. 서울시와 SH공사는 과거 “구룡마을은 대부분 ‘주거용 무허가 비닐 간이 공작물’에 해당해 이주대책 및 보상법이 없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토지보상법 시행령 부칙에 ‘1989년 1월24일 현재 허가를 받거나 신고를 하고 건축해야 하는 건축물을 허가를 받지 않거나 신고하지 않고 건축한 건축물 소유자는 이주대책 대상자에 포함한다’고 명시하고 있어 구제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민 대부분은 자신의 집이 1989년 1월24일 이전에 집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또 민주당이 실질적인 권한이 있는 서울시와 SH공사의 뜻에 반하는 개발을 강행할 방법도 사실 마땅치 않다. 공약(空約)에 머물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서진형 대한부동산학회장(경인여대 교수)은 “주민들은 입주권을 받아도 돈이 없으면 새 아파트에 들어갈 방법이 없고, 용적률을 500%까지 높이면 성냥갑 아파트가 되는 데다 도심 난개발이 심각해질 것이 뻔하다”면서 “기부채납 등을 통한 도시환경 개선 계획도 없이 포퓰리즘적인 공급대책을 발표해 시장의 혼란만 야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서울시 관계자는 “민주당의 1만2000가구 공급공약은 구체적인 상황을 검토한 결과로 보기 어렵다”면서 “다만 서울의 주택공급을 늘리기 위해 당초 서울시 계획보다 구룡마을 주택공급물량 확대를 검토할 필요성은 있어 보인다”고 밝혔다. 구룡마을은 전두환 정권이 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88년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는 과정에서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개포동 무허가주택을 철거하며 쫓겨난 주민들이 1987년 무렵 구룡산 북사면에 거주하기 시작하며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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