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향고래 잡으면 인생역전” 아메리칸 드림이 된 ‘양키 포경’

최명애 | 환경지리학자

미국 뉴 베드퍼드·낸터킷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에 낚싯바늘처럼 길게 휘어진 케이프 코드라는 곳이 있다. 보스턴 중산층의 휴양지다. ‘라이프’ 잡지에 나오는 것처럼, 삼색 스트라이프 패턴의 비치 하우스 사이로, 꽃무늬 셔츠를 입은 은퇴자와 동성애자들이 손에 손을 잡고 다닌다. 이 나른한 케이프 코드 초입에 뉴 베드퍼드(New Bedford)라는 작은 도시와 낸터킷(Nantucket)이라는 섬이 있다. 이 지역을 거쳐 간 주민 가운데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모비딕>을 쓴 허먼 멜빌이다.

뭉툭한 머리 부분에 향기로운 기름이 들어 있는 향고래는 미국 포경의 집중 타깃이었다. 낸터킷 포경 박물관에 전시된 14m짜리 향고래 골격.

뭉툭한 머리 부분에 향기로운 기름이 들어 있는 향고래는 미국 포경의 집중 타깃이었다. 낸터킷 포경 박물관에 전시된 14m짜리 향고래 골격.

<모비딕>은 19세기 낸터킷과 뉴 베드퍼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 포경, 소위 ‘양키 포경’ 격동의 한 시대를 한 권의 소설로 영원히 남겨 놓았다. 고래에 ‘미친’ 에이허브 선장이 필생의 맞수 흰 고래 ‘모비딕’을 쫓아다니는 이야기다. 스포일러라서 죄송하지만, 주요 등장인물, 아니 등장동물 모비딕은 684쪽의 책 647쪽에 처음 등장한다. 이 연재 시리즈의 제목도 이 소설의 첫 문장에서 따 왔다. 이슈마엘은 고래를 보고 싶어 포경선에 오른 열 일곱의 하급 선원. 이슈마엘처럼 멜빌도 젊은 시절 포경선을 탔다. 소설 속 이슈마엘의 배도, 실제 멜빌의 포경선도 모두 뉴 베드퍼드에서 출발했다. 150여년이 흐른 지금, 멜빌과 <모비딕>은 포경 역사 관광의 핵심 상품으로 지역 경제에 이바지하고 있다. 멜빌이 출항을 기다리며 다녔다는 뱃사람 교회(Seamen’s Bethel)에는 ‘멜빌이 앉았던 자리’가 표시돼 있고, 소설에 묘사된 대로 뱃머리 모양의 설교단도 만들어 놓았다. 앞에는 ‘콜 미’, 뒤에는 ‘이슈마엘’이라고 적힌 셔츠도 판다.

케이프 코드를 가로지르는 25번 국도 끝에 나오는 뉴 베드퍼드는 심란한 도시였다. 오로지 목적만을 위해 성급히 지은 성냥갑 같은 건물들, 페인트칠이 벗겨진 퇴락한 창고, 녹슨 쇠사슬과 낡은 로프가 뒹구는 뒷골목. 버려진 산업단지 같은 이 도시에 한 해 9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온다. 뉴 베드퍼드는 1992년 미국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됐다. 포경 역사 유적 때문이다. 한때 전 세계 고래들을 떨게 했던 양키 포경의 중심지. 관광객들은 격동의 시대를 겪은 건축물도 보고, 걷기 투어도 하고, 포경 박물관(Whaling Museum)도 구경한다. 잘 만든 고래 생태 전시관들은 꽤 있지만, 잘 만든 포경 박물관은 드물다. 뉴 베드퍼드는 그 어려운 걸 해냈다.

뉴 베드퍼드 ‘뱃사람 교회’의 뱃머리 모양 설교단. 원래 평범한 설교단이었으나 멜빌이 <모비딕>에서 이 교회에 뱃머리 모양의 설교단이 있다고 쓰면서 소설 속 묘사대로 모양을 바꿨다.

뉴 베드퍼드 ‘뱃사람 교회’의 뱃머리 모양 설교단. 원래 평범한 설교단이었으나 멜빌이 <모비딕>에서 이 교회에 뱃머리 모양의 설교단이 있다고 쓰면서 소설 속 묘사대로 모양을 바꿨다.

■포경이라는 이름의 자연 착취

뉴 베드퍼드 포경 박물관은 1712년 낸터킷에서 시작, 1925년 뉴 베드퍼드에서 막을 내린 200여년의 양키 포경을 전시하고 있다. 그 전에도 인류는 간간이 고래를 잡아 왔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근대적 상업 포경은 17세기 영국과 네덜란드의 북극해 포경에서 시작된다. 이어 영국에서 건너온 초기 미국 정착자들이 ‘새 영국’(뉴 잉글랜드)이라고 이름 붙인 케이프 코드 앞바다에서 넘실거리는 고래 떼를 발견했고, 이때부터 세계 포경의 패권은 미국으로 넘어간다.

미국은, 앞서 영국은 왜 고래를 잡았을까. 먹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름 때문이었다. 석유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석탄으로는 충분하지 않던 시대, 안타깝게도 고래가 ‘바이오 연료’로 쓰였다. 고래는 지방층이 많아 오래 삶으면 기름이 된다. 기름을 찾아 고래를 쫓던 미국 포경선들은 케이프 코드에서 유난히 머리가 뭉툭한 고래를 발견했다. 잡아서 머리를 열었더니 기름이, 그것도 향기가 좋은 기름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삶는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 고래가 바로 향고래(sperm whale)다. 미국 포경에서 최고로 친 것은 향고래였다. 흰고래 모비딕도 향고래다.

미국 포경선은 짧으면 2년, 길면 4년을 고래를 찾아 대서양과 태평양을 항해했다. 고래를 잡으면 배 위에서 즉시 해체하고 기름을 짜서 커다란 술통 격인 ‘캐스크’에 담았다. 캐스크는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으로 수출돼 맨체스터의 방직기를 돌렸다. 뉴 잉글랜드의 미국인들은 고래 기름을 가공해 양초를 만들었고, 수염은 손질해 여성복 코르셋의 재료로도 팔았다. 포경 기술과 방식의 변화로 고래 상품의 대량 생산과 품목 다양화가 가능해졌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든 선원과 상인들로 포경업은 ‘다국적 산업’으로 거듭났다. 지금으로 치면 ‘코카콜라’ 정도 되는 다국적 산업이었던 것이다. 기름을 얻기 위해 북극해의 긴수염고래를 잡던 유럽 포경은 미국으로 넘어오면서 ‘업그레이드’됐고, 본격적으로 대형 고래의 멸종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포경은 이렇게 우리가 자연과 맺어온 아주 오래된 관계 - 약탈적 경제의 명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멀게는 원시적 수렵, 채취 생활부터 가깝게는 뒷산의 도토리를 주워오는 것까지, 인간은 자연을 채취와 이용이 가능한 자원으로 여겨 왔다. 약탈적 경제가 대량화, 기계화, 산업화되고, 그 결과가 다른 종의 절멸로 이어지는 지점에 바로 미국 포경이 자리 잡고 있다.

향고래 머리에서 채취한 고급 기름 경납유.

향고래 머리에서 채취한 고급 기름 경납유.

■‘일확천금’을 통한 아메리칸 드림

왜 뉴 베드퍼드와 낸터킷이었을까. 연안에 고래가 많고, 원양으로의 접근성이 좋았지만 무엇보다 노동력이 풍부했다. 이 두 지역은 유난히 퀘이커 교도의 비중이 높고 흑인 인구가 많았다. 때는 바야흐로 남북전쟁(1861~1865) 직전. 평화와 자유주의 신념을 가진 퀘이커 교도들은 흑인 노예해방운동에 적극적이었다.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을 쓴 헤리엇 스토도 퀘이커 교도다. 뉴 베드퍼드의 퀘이커들은 ‘지하 연락망’을 만들어 도망친 흑인 노예들을 숨겨주고, 먹여주고, 일자리도 구해 줬다. 몇 년씩 먼 바다를 떠도는 포경선은 ‘현상금 사냥꾼’을 피할 수 있는 최고의 일자리였다.

남북전쟁 이후 흑인 노동력이 줄어들자, 대서양의 외딴 섬 주민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포경선이 기항하던 아조레스 제도나 케이프 버다의 주민들은 일자리와 이국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고, 포경선은 이들 섬에서 선원을 채우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항해가 끝난 뒤 뉴 베드퍼드에 남았다. 그들이 가족을 불렀고, 뉴 베드퍼드에서 새로운 삶을 꾸리기 시작했다. 뉴 베드퍼드의 마지막 포경선원도 케이프 버다 출신의 이민자다.

노예 출신의 흑인, 가난한 이민자들에게 포경업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이었다. 고래는 ‘일확천금’의 자원이었다. 원양포경 4년이면 고래 50마리를 잡아 2000배럴의 캐스크를 싣고 돌아올 수 있었다. <모비딕>에도 이름을 남긴 낸터킷 최고의 포경선장 스타벅은 2만 배럴을 싣고 돌아왔다. 이렇게 돌아온 이들의 인생은 더 이상 그 전과 같지 않았다. 뉴 베드퍼드에는 성공 신화가 넘쳐난다. 평범한 야채 상인에서 포경선에 투자해 ‘벼락부자’가 된 포경 선주, 흑인 노예 출신과 대서양 섬 출신의 선장들도 있다. 포경선의 생활은 가혹하지만, 참고 견뎌서 ‘한방’만 터져주면, 떵떵거리며 부자로 살 수 있었다.

포경 박물관이 있는 부둣가를 떠나 언덕 위로 올라가면 그리스 신전 같은 고급 주택들이 나온다. ‘벼락부자’들은 기둥과 파사드를 얹은 흰 저택을 짓고, ‘존경받는 신사’로 살았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으로 견고한 신분과 부가 ‘바람과 함께 사라질’ 수 있던 시대. 뉴 베드퍼드는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인생을 꾸려나갈 ‘기회의 땅’이었고, 포경업은 그 도구였다. 아조레스 제도의 소년도, 아프리카의 흑인도, 스코틀랜드의 청년도 ‘아메리칸 드림’의 꿈을 품고 포경선에 몸을 실었다.

[콜 미 이슈마엘 - 최명애의 고래 탐험기] (2) “향고래 잡으면 인생역전” 아메리칸 드림이 된 ‘양키 포경’

■고래의 복수극?

미국 포경 최전성기인 1857년 뉴 베드퍼드의 포경선은 등록된 것만 329척. 실제로는 500척이 넘었다. 향고래를 우선하되, 포경선들은 북극고래, 긴수염고래, 귀신고래 등 고래라면 보이는 대로 잡았다. 이들은 뉴 잉글랜드 앞바다에서 출발, 위로는 북극해, 아래로는 남북미 연안을 따라 내려가며 대서양의 고래를 사냥했다. 19세기 초반에는 남미 최남단을 돌아 남태평양으로 영역을 넓혔다. 고래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이미 남북미 연안의 향고래는 바닥났고, 20세기 초반에는 북극고래가 바닥을 보였다. 이로부터 100여년 뒤 국제포경위원회는 북극고래 등 5종의 고래가 과도한 포경으로 거의 멸종에 이른 것으로 판단하고, 1986년에는 대형 고래 13종에 대해 상업적 포경을 금지시킨다.

포경을 매개로 한 인간과 고래의 대면이 늘어나면서, 고래로부터 ‘공격받았다’는 보고도 늘기 시작했다. 가장 유명한 사건이 ‘에섹스호의 비극’이다. 1820년 낸터킷 항을 출발한 포경선 에섹스호는 태평양 적도 갈라파고스 서쪽 해상에서 정면으로 돌진해 온 향고래의 공격을 받고 산산이 부서졌다. 몸길이 24미터에 무게 80톤은 나갈 법한 대형 고래였다. 향고래 몸길이가 평균 15~18미터, 무게가 38~55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하게 큰 고래였다. 20명의 선원은 세 척의 보트에 나눠 타고 태평양을 떠돌았고, 식량과 먹이가 떨어지자 거북이를 잡아먹고, 동료의 시신을 나눠 먹었다. 그나마도 떨어지자 제비를 뽑아 동료를 죽인 뒤 그 시체를 아껴 나눠 먹으면서 목숨을 부지했다. 200여일의 항해 끝에 생존자 5명이 뼈와 가죽만 남은 채로 낸터킷으로 돌아왔다. 이 배의 일등 항해사였던 오웬 체이스는 다시 포경선을 탔고, 에섹스호를 박살낸 향고래를 찾아서 복수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졌다. 바로 이 이야기가 20여년 뒤 포경선을 탄 멜빌에게도 전해져 <모비딕>의 소재가 됐다.

에섹스호에 이어 1800년대 중반 낸터킷과 뉴 베드퍼드 선적의 포경선들은 잇달아 수컷 향고래의 공격을 받았다. 멜빌도 <모비딕>에서 “향고래는 계획적으로 큰 배에 구멍을 뚫어서 완전히 파괴해버리고 침몰시킬 수 있을 만큼 힘이 세고 지혜롭고 교활하다”고 쓰고 있다. 고래는 대체로 온순한 동물이다. 왜 향고래는 포경선만 골라서 정면으로 돌진해 왔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고래에게 가한 수백년의 약탈과 연결지어, 자연에 대한 원형적 공포와 경외를 담아 ‘고래의 복수’라고 이야기할 뿐이다.

양키 포경의 시대는 1925년 마지막 포경선이 뉴 베드퍼드항으로 돌아오면서 끝난다. 작살을 놓은 사람들은 ‘골드 러시’가 시작된 캘리포니아 금광으로 달려갔다. 고래에서 황금으로 약탈의 대상을 바꾼 것이다. 앞서 낸터킷의 포경업은 더욱 드라마틱하게 막을 내렸다. 1846년 낸터킷 시내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났다. 불은 고래 기름통 캐스크를 태우고 부두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수십년간 고래 기름에 절어 있는 부두는 아무리 모래를 퍼부어도 더욱 활활 타올랐다. 그리스 비극의 기계신의 강림처럼, 운명과 자연이 이 일확천금의 꿈에 종말을 선언한 것이다.

■ 콜 미 이슈마엘

‘콜 미 이슈마엘(Call me Ishumael)’은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모비딕>에 나오는 유명한 첫 문장. 이슈마엘(이스마엘)은 방랑자를 상징하는 구약성서 인물로, 포경선의 하급선원인 소설 속 주인공이 빌려 쓴 이름.

[콜 미 이슈마엘 - 최명애의 고래 탐험기] (2) “향고래 잡으면 인생역전” 아메리칸 드림이 된 ‘양키 포경’

■필자 최명애

인간과 동물·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연구하고 글을 쓰는 환경지리학자다. 2016년 영국 옥스퍼드대 지리학과에서 한국 생태관광의 통치성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앞서 경향신문에서 9년간 기자로 일하면서 여행·환경 분야를 취재,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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