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무게 7 t·하루 식사량 220㎏…북극해 위협하는 ‘최강 포식자’

이정호 기자

기후변화로 베링 해협 중심까지 진출한 범고래…생태계 타격 주나

미국 알래스카 바다를 헤엄치는 범고래. 범고래는 숨을 쉬려고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최대 길이 1.8m인 ‘등지느러미’도 함께 노출된다. 이 때문에 등지느러미를 가로막을 두꺼운 얼음이 낀 북극 바다에선 범고래가 살기 어려웠는데, 최근 온난화로 얼음이 대거 녹으며 범고래의 서식 기간과 영역이 넓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제공

미국 알래스카 바다를 헤엄치는 범고래. 범고래는 숨을 쉬려고 수면 위로 떠오를 때 최대 길이 1.8m인 ‘등지느러미’도 함께 노출된다. 이 때문에 등지느러미를 가로막을 두꺼운 얼음이 낀 북극 바다에선 범고래가 살기 어려웠는데, 최근 온난화로 얼음이 대거 녹으며 범고래의 서식 기간과 영역이 넓어졌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제공

1994년 개봉한 미국 영화 <프리윌리>는 12세 소년 ‘제시’와 수족관에 갇혀 사는 범고래 ‘윌리’의 우정을 소재로 한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거리를 전전하던 제시는 어느 날 동네 수족관에 들어가 낙서를 한 일이 들키면서 수족관에서 청소를 해야 하는 벌을 받는다. 그런 제시의 눈에 띈 것이 바로 윌리였다. 바다에서 잡혀 온 윌리는 갇혀 사는 처지인데도 ‘동물 쇼’를 거부해 수족관 경영진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순탄치 않은 삶을 살고 있는 제시와 윌리는 자신의 상처를 상대에게 치유받으며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사실 범고래는 그리 착하거나 친절한 동물이 아니다. 범고래의 영어 명칭만 해도 ‘킬러 웨일(killer whale)’이다. 강력한 공격성을 지녔으며, 단독 또는 집단으로 사냥한다. 상어까지 먹어치울 만큼 해양 생태계의 최고 포식자이다. 이런 범고래가 그동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던 북극 중심부 바다에까지 출몰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범고래의 진출을 막던 바다 위 얼음이 최근 기후변화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에 없던 강력한 포식자가 북극 해양 생태계에 등장하면서 기후변화로 인한 또 다른 재앙이 시작된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 북극 바다 습격한 범고래

북극 얼음 줄며 숨쉬기 용이해져
유입 빨라지고 서식 기간 늘어

미국 과학전문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 따르면 이달 초 미국 음향학회 연례회의에서 워싱턴대 소속의 브린 킴버 박사팀은 범고래가 북극 바다로 진입하는 일이 최근 갑자기 늘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북극 근처인 미국 알래스카 주변 바다에서 범고래 존재 유무를 탐지하는 음향 연구를 했다. 수중에 녹음 장치를 넣고, 범고래가 수영할 때 내는 독특한 소리를 추적한 것이다.

분석 결과, 범고래가 알래스카와 러시아 사이에 있는 북극 바다인 베링 해협에 해가 갈수록 이른 시기에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012년에는 6월부터 베링 해협에 나타났던 범고래가 2019년에는 이보다 한 달 앞서 출현한 것이다. 단 7년 만에 일어난 주목할 만한 변화였다.

베링 해협 인근인 북부 축치해(Chukchi Sea)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이곳에선 그동안 범고래가 나타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2018년과 2019년에 처음으로 범고래가 발견됐다. 최근 몇 년 새 갑자기 북극 바다에서 범고래 서식 기간이 늘어나고 활동 영역이 넓어진 것이다.

물범 사냥을 준비하는 범고래 떼. 과학계에선 해양 생태계 최고 포식자인 범고래가 북극 바다 깊숙이 진출하면 기존 먹이그물에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한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제공

물범 사냥을 준비하는 범고래 떼. 과학계에선 해양 생태계 최고 포식자인 범고래가 북극 바다 깊숙이 진출하면 기존 먹이그물에 충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한다. 미국 해양대기청(NOAA) 제공

■ ‘등지느러미’ 지키며 수영 가능해져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연구팀은 최근 베링 해협과 북부 축치해의 바다 위 얼음이 기후변화 때문에 이전보다 줄어들거나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바다 위 얼음은 범고래를 막는 일종의 바리케이드였다. 이유는 범고래의 신체 특징에 있다. 범고래는 등에 기다란 지느러미가 솟아 있는데, 길이가 최대 1.8m에 이른다. 숨을 쉬려고 해수면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자연스럽게 등지느러미도 같이 물 밖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꽁꽁 언 바다에선 등지느러미가 얼음에 가로막힌다. 이렇게 되면 범고래는 머리를 내밀어 숨을 쉴 수 없다. 억지로 물 밖으로 몸을 내밀다가는 등지느러미가 얼음과 충돌하며 구겨지거나 꺾인다. 이젠 얼음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면서 범고래가 그런 걱정을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북극 바다에서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는 판이 깔린 셈이다.

■ 북극 ‘먹이그물’ 훼손 위기

고래 잡아 생계 유지하는 거주민
범고래와 생물자원 놓고 다툴 수도

문제는 범고래의 포식성이다. 연구진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을 통해 “범고래는 숙련된 사냥꾼”이라며 “북극의 먹이그물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범고래 성체는 최대 7t에 이르는데, 하루에 무려 220㎏의 해양 생물체를 섭취한다. 물고기부터 연체동물, 물범, 고래, 상어까지 먹어치운다. 북극 해양 생태계에 충격파를 던질 수 있는 것이다.

인간과 범고래가 해양자원을 두고 다투는 일도 배제할 수 없다.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의 일부 토착민들은 고래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김현우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센터 박사는 “물범을 두고 이누이트 등과 범고래가 경쟁할 가능성도 살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인간에 의해 빚어진 기후변화가 해양 생태계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방아쇠가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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