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항쟁 25년

그때 그 ‘꼬마 상주’ 조천호씨

“이젠 ‘5·18’에서 자유롭고 싶다.”

[5·18광주항쟁 25년] 그때 그 ‘꼬마 상주’ 조천호씨

그는 대뜸 “앞으로는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며 “언제까지 저에게 5·18의 가치를 말해보라고 할 거냐”고 따졌다.

“광주항쟁정신을 ‘민주·평화·인권’ 등으로 정의해 놓고 그냥 먼지 덮인 유물처럼 보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면서 “‘5·18정신’은 그렇게 거창한 것만이 아니라, 생활속에서 바로 실천할 수 있는 ‘나눔 정신’에 있다”고 말했다.

“그렇게 쉬운 것을 언론이나 정치권이 풀어 얘기하지 않고 구구단 외우듯 ‘민주·평화·인권’만을 외치는 바람에 5·18이 오히려 외면받고 있다”며 “유리상자 속에 들어있는 5·18을 꺼내 마음 깊숙이 스며들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이 서른에 펼치는 그의 다그침이 무척 구체적이고 강단졌다.

그는 80년 5월21일 금남로 시위에 나섰다가 총탄에 맞아 숨진 조사천씨(당시 34세)의 2남1녀중 장남.

“건축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51)가 온갖 궂은 일을 하면서 할머니를 돌보고 우리 3남매를 키웠다”면서 영정을 든 것에 대해서는 “너무 어려 가물가물한데 어렴풋이 영정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그가 ‘화제의 사진’을 처음 본 것은 87년 6·29선언 이후. ‘5·18’이 본격 사회적으로 공론화하면서 ‘꼬마 상주’ 사진이 곳곳에 뿌려졌다. 그러나 조씨는 “그 사진을 본 할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5·18광주항쟁 25년] 그때 그 ‘꼬마 상주’ 조천호씨

그의 공직생활은 98년 8월 시립묘지 관리인으로 시작됐다. 현장에서 ‘5·18 전도사’ 역할을 할 수 있게 해달라는 유족회의 요청을 광주시가 받아들인 것이다. ‘5·18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해 보훈처가 관리를 맡게 되자 그는 자리를 광주시청으로 옮겼다.

그러나 최근 그는 다시 주말이면 묘지로 달려간다. 드라마 ‘제5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전두환 팬클럽’까지 생겼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있을 수만 없더란다. 청소년 참배객에게 당시 군부세력의 죄악상을 낱낱이 알려주고 아직도 ‘계엄군’을 ‘일본군’으로 잘못 알고 있는 어린이들을 만나러 간다. “‘국군이 우리 시민에게 총을 쏠 리가 있느냐’고 되묻는 어린이들을 이해시키는 일이 여전히 어렵다”고 말하는 그는 보다 철저한 ‘5·18 교육’을 당부했다.

5공 세력의 ‘광주 진압’을 묵인한 미국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운 가치도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준 미국은 분명 고마운 나라다.”

〈광주|배명재기자 ninapl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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