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유신시대 한국의 자살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죽음으로 ‘압축 성장’을 보이콧한 사람들

언젠가부터 박정희 시대가 무척 행복하고 살기 좋았던 시대인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이 퍼졌다. 누가 이런 거짓 신화를 만들어 유포했겠는가. 아무래도 공범 중 하나는 성장제일주의인 듯하다. 경제성장이 이뤄지면 ‘국민’이 (저절로) 행복해진다는 허구는, 평균 3%대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때문에 일제시대를 찬양하는 뉴라이트뿐만 아니라 ‘경제학 이데올로기’도 광범위하게 공유하고 있는 바다. 관료나 기업가뿐 아니라 국민들 중에도 이 선전에 감염돼 있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그러니까 이명박의 747공약 같은 사기술도 가능하지 않았겠는가.

성장은 물론 중요한 가치이지만, 문제는 성장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성장인가가 아닐까. ‘누구를 위한 어떤 성장인가’가 이슈가 아닐 때 성장의 의미는 퇴색한다. 경제학자 아마티아 센의 말대로 성장은 민주주의와 함께하지 않을 때, 진정한 삶의 질 향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니 결국 문제는 정치와 계급관계일지 모른다. 어떤 방향의 경제정책을 누구의 힘으로 결정하고, 성장의 과실 또는 손실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 바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금융이나 재벌이 유일한 갑(주권자)이면, 대다수 일자리를 비정규직화하고 철저히 1~10%의 인간만을 살찌우는 ‘성장’도 가능하다. 대다수 인간은 재벌이나 특권계급이 먹고 남은 성장의 부스러기를 떨어뜨려주기(trickle down)만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대신 경기후퇴나 불황의 혹독한 대가는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이 치른다.

박정희 정권은 노동자·청년학생·야당·지식인, 그리고 일반 시민들을 무지막지하게, 거의 북한이나 나치를 방불할 수준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유신시대의 사람들은 일상화된 억압과 감시, 그리고 상상을 초월하는 반공 공안통치뿐 아니라 가난과 사회변동 때문에도 허덕였다. 박정희는 유신 말기에 자신의 주종목이라는 경제에서도 크게 실패했다. 물론 박정희 통치기간을 통틀어 실질임금이나 실질소득이 증가했지만, 불행은 별로 개선되지 않았고 사람들의 마음은 피폐해졌다.

집단 자살하려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 죽음에서 벗어난 딸들(위·1963년 5월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집단 자살하려는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해 죽음에서 벗어난 딸들(위·1963년 5월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박정희 시대 사회 심층은 아노미 상태

놀랍게도, 1960~1970년대의 한국도 지금처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자살률을 유지했다. 실업률이 낮고 사회적 통제가 강력했는데도 말이다. 연세대 의대 신경정신과 이호영 교수팀은 1965년부터 1988년까지 치안본부가 집계한 총 21만6374명의 자살기록을 분석한 ‘한국의 경제발전 과정에 있어서 자살률의 추이’란 논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이에 따르면 박정희 집권 초기인 1965년의 자살률은 29.81명(이하 10만명당)으로 대단히 높았다가 1968년에는 24.56명으로 약간 떨어졌다. 그러나 박정희가 한 손에는 독재의 광기어린 칼을 휘두르고 다른 한손에는 공업화와 고도 경제성장을 구가한 유신시대에 오히려 자살률은 높아졌다. 1973년에는 자살률이 27.61명이었고 1975년에는 31.87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이는 극심한 양극화와 무한경쟁 때문에 세계에서 가장 자살률이 높은 오늘날의 통계(2011년 31.7명, 2012년 28.1명)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일반적인 자살 외에도 가족의 집단 동반자살 사건이 늘기 시작했다. 이는 대개 생활고나 가정불화에 지친 남성 가장이나 주부가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자살한 사건이다. 1976년 6월2일 서울 관악구 신림4동에 살던 야채행상 최모씨(32)의 부인 김모씨(26)가 각각 6·4·2세의 세 딸과 함께 쥐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쥐잡기날’을 맞아 통장에게 받은 쥐약을 카스텔라빵에 섞어 아이들에게 먹였다. 쥐잡기운동 때문에 정부가 전 국민에게 나눠준 쥐약은 곧잘 자살 도구로 사용되었다. 남편은 숨진 김씨가 평소 생활고에 시달려 고민해 왔다고 말했다.

1977년 11월24일에는 부산 동래구 칠산동에 살던 이모씨(38)의 부인 장모씨(30)가 여섯 살인 장녀, 네 살배기 딸, 그리고 한 살배기 아들에게 극약을 먹여 죽이고 자기도 자살했다. 장씨는 무려 일곱 가구가 함께 세든 집에 살고 있었는데, 생활고 때문에 다른 셋방 이웃들의 물건을 훔치곤 했던 모양이다. 죽기 이틀 전에는 콩 몇 되를 훔쳤다가 들켜 죄를 자인했다 한다. 1978년 4월28일에는 경기 평택군 팽성면 이모씨(56) 집 건넌방에 세들어 사는 이모씨(45)가 방에다 연탄불을 피워놓고 큰딸(10), 둘째딸(8), 셋째딸(4), 막내아들(2)과 집단자살을 기도했다. 아버지는 자식들을 먼저 연탄가스로 죽게 하고 자신은 목매 자살했다. 죽은 이씨는 2개월 전에 실직했고, 가정불화 끝에 부인 최모씨(34)가 3일 전 가출하자 이를 비관해왔다 한다.

박정희 정권 통치 전 기간에 자살률은 상당히 높았지만, 정권은 이 문제에 대해 정책 수준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사회학자 정승화의 연구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유신정권은 자살률을 숨겼다. 자살률을 감추는 것은 냉전기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이 한 일과 같다. 전체주의는 자살을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고 국가에 저항하는 행위로 간주하고, 자살사건의 통계나 사건 자체를 숨기려 들었다.

자살률이 높은 만큼 사회사업 차원에서 자살 예방과 상담 등에 대한 관심과 실행은 늘었다. 가톨릭교단은 1960년대부터 상담센터를 설립해 자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도왔다. 1976년 9월 ‘서울 생명의 전화’가 설립되면서 처음 상담전화가 설치되고 1978년에는 ‘도움의 전화’와 코미디언 심철호가 만든 ‘사랑의 전화’가 설치되었다.

직장 연애를 금지하자 함께 죽은 기업의 남녀 동료(아래 왼쪽·1963년 11월19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직장 연애를 금지하자 함께 죽은 기업의 남녀 동료(아래 왼쪽·1963년 11월19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사랑’이나 완성하려했던 정사(情死)

1960~1970년대의 사회에서 오늘날과 확연히 다른 자살의 상황이 있다면, 비극적인 사랑에 빠진 남녀가 동반자살하는 정사다. 1963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박정희 각하가 대통령이 되어 힘차게 새 출발한 바로 그 해에 정사 사건이 많았다. 다양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들이 ‘민족중흥’과 ‘경제개발’에 나서지 않고, 죽어서 ‘사랑’이나 완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해 2월9일자 경향신문에 의하면, 유부녀이며 무려 “5남매의 어머니인” 34세의 정금자씨와 그의 어린 정부 21세의 대학생 이모군이 정사했다. 반대로 그해 11월에는 4남매의 아버지인 30대 중반의 직장인이 20대 초의 “바 걸”과 정사한 사건도 있었다. 또한 “처가 버젓이 있는 30대 남자가 그의 6촌 처제와 서로 사랑해오다가 결혼 못함을 비관 끝에” 같이 음독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65년에는 현직 검사가 다방 마담과 함께 정사한 사건이 일어나 꽤 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서울지검 수원지청에 근무하던 33세의 김모 검사는 대구 경북고와 고려대 법대를 나와서 사시 8회로 임관했고 6년 전에 중매 결혼한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두 살 연상이며 다방을 경영하던 ‘애인’이 있었다.

검찰·군·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남성 관료란, 남성들 중에서도 가장 자살할 확률이 낮은 부류가 아닐까. 웬만해서는 자기를 방기하지 않는, 자기관리와 보신에 확고한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오늘날 지배계급 남성이 룸살롱 마담 같은 애인과의 사랑 때문에 목숨을 함께 버리는 사건을 상상하기란 어렵다. 물론 가정을 가진 고위관료나 현직 검사, 또는 중년의 교육자 중에 ‘이루어질 수 없는’ 진실되고도 비극적인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 상식에 가까운 것은, 사랑은커녕 성상납 받는 검사와 경찰, 술자리 후 함께 성매매에 나서는 관료와 장교, 부하직원이나 제자를 성추행하는 공직자와 교육자들이다.

분명한 것은 정사한 남성들에게 규범을 벗어난 ‘사랑’과, 그것을 고통으로 화하게 했을 ‘가정’은 오늘날의 그것과 의미가 미묘하게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런 시대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진다. 1966년 1월 부인과 5남매를 둔 집권 공화당의 경상남도지부 사무장(당 42세)이 애인과 함께 자살했고, 1971년 11월에는 50대 초의 초등학교 교감이 딸뻘인 20대 여교사와 함께 학교에서, 1971년 8월에는 사랑에 빠진 40대 교사와 여고생이 함께 설악산에서 정사한 일도 있었다.

다방 마담과 함께 죽은 현직 검사(1965년 5월3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다방 마담과 함께 죽은 현직 검사(1965년 5월31일자)에 관한 당시 보도. | 경향신문 자료사진

■ 인간적 삶의 비상 상태가 만들어낸 ‘탈락 인간’

1974년 2월15일의 경향신문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인식의 역사와 관련된 중요한 자료 하나를 보여준다. 고려대 교육대학원이 서울과 경북 상주의 남녀 고교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결과이다. ‘부모가 결혼을 반대할 경우 어떻게 하겠느냐’는 설문에 약 33%의 고교생이 “단념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 “집을 떠나서 결혼” 등 부모의 뜻을 거역하겠다는 취지의 답도 꽤 많아 46.24%였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정사한다”는 답변이다. 설문 대상 전체 청소년의 4.54%, 그 중 특히 경북지역 여성 청소년들이 8.2%나 “정사한다”고 답을 했다는 것이다.

2008년에도 비슷한 설문조사가 있다. 오늘날 대학생은 결혼을 부모가 반대할 경우 “반대를 무릅쓰고 한다”(43%)는 대답이 “끝까지 설득해 보고 안되면 포기한다”(40%)는 응답보다 조금 많았다. 여기까지는 비슷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사한다”는 설문 문항 자체가 없다. 단지 이 차이는 10대들 사이의 차이가 아니라 총체적인 것일 터이다. 사랑과 삶에 관한 태도가 한 세대 전과 확연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고도성장과 함께한 초고도 자살률은, 박정희식 근대화가 ‘인간의 피’를 동력으로 했으며, 정치적으로 북한과 다를 바 없는 전체주의나 전전 일본식 총동원 체제와 유사한 통제 상황이 펼쳐졌지만, 기실 사회의 심층에서는 ‘아노미’적 상황이 존재했음을 재확인해주는 수치가 아닌가 싶다. <자살론>의 사회학자 뒤르켐은 “사회질서가 심각하게 재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것이 갑작스러운 성장이든 예기치 않은 재난이든 사람들이 자살하기 쉽다”며 자살이 증가하는 이유는 “위기(고비)” 때문이라 했다. 유신시대에는 자살률뿐만 아니라 살인·강도·강간 등 강력범죄 발생률도 1960년대보다 훨씬 높아졌다. 경제 문제 때문이든, 가족이나 농촌 전통사회의 해체 때문이든, 유신시대는 일종의 위기국면이자 인간적 삶의 ‘비상상태’였던 것이다. 그런데 마음 좋은 사회과학자들은 그것을 ‘압축 성장’이라 부르고, 박정희의 리더십이 성장의 가장 중요한 견인차였던 것처럼 찬양한다. 압축성장과 박정희 리더십은 수많은 ‘탈락-인간’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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