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바바 사주로, 에도시대 일본이 낳은 천재

글·사진 김시덕 |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일본 근대화 촉매 ‘난학’, 중심엔 불세출의 언어학자가 있었다

오가타 고안이 창설한 난학 의학 학원 데키주쿠에서 교재로 쓴 네덜란드어 문법책 <화란문전(和蘭文典)>. 데키주쿠 학생들은 이 책을 반년 정도에 마스터했다. 필자가 소장한 <화란문전>에 남아 있는 당시 난학자들의 공부 흔적이 눈길을 끈다. 사진 속 동그라미에는 사과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단어 ‘appel’ 아래에 ‘임금 (林檎·능금 )’이라는 단어 풀이가 적혀 있다.

오가타 고안이 창설한 난학 의학 학원 데키주쿠에서 교재로 쓴 네덜란드어 문법책 <화란문전(和蘭文典)>. 데키주쿠 학생들은 이 책을 반년 정도에 마스터했다. 필자가 소장한 <화란문전>에 남아 있는 당시 난학자들의 공부 흔적이 눈길을 끈다. 사진 속 동그라미에는 사과를 뜻하는 네덜란드어 단어 ‘appel’ 아래에 ‘임금 (林檎·능금 )’이라는 단어 풀이가 적혀 있다.

한국 사회에 떠도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 “왜 19세기에 서구권이 아닌 국가들 가운데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질문의 내용이 정확해야 한다. 이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면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질 수 있다. 첫째, ‘근대화’란 과연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고도의 공업화가 이루어지면 근대를 맞이한 것일까?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면 근대적 국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식민지를 차지한 제국이 되어야 근대국가일까? 이처럼 근대화라는 개념에 대해 사람들은 서로 다른 정의를 내린다.

둘째, 근대화가 ‘성공’했다는 건 어느 시점까지를 보고 내리는 결론인가? 흔히 서구권이 아닌 국가들 가운데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가 일본뿐이라고 하는 건, 20세기 전기에 일본이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나란히 식민지를 거느린 열강이 되었다는 뜻인 것 같다.

그러나 시간 단위를 20세기 후기까지로 보면, 대만과 한국이 이른바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라고 평가받을 수 있고, 21세기 초기까지로 보면 중국과 인도가 이 반열에 들어올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필자의 궤변이 아니라 실제로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좀 더 깊이 알고 싶다면 박훈 교수의 <메이지 유신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라는 책이 참고가 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왜 19세기에 서구권이 아닌 국가들 가운데 일본만 근대화에 성공했을까?”라는 질문에는 생각보다 따져봐야 할 점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질문에 대해 일본과 서구 학계 일각에서는 이런 답을 내놓아왔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부터 비교적 일찍 국가로서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어 있었다. 국민의 문자 해독률이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고, 명분보다는 실리를 우선하는 막부(幕府)라는 군사정권이 나라를 통제하고 있었다. 비서구권에서는 독특하게 유럽의 봉건주의와 비슷한 국가 체제를 경험했고, 자본주의 초기 단계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조선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고학(古學)’과 ‘국학(國學)’이라고 하는 독특한 학문 형태가 등장했고,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학문이 발달해 서구권의 상황에 일찍부터 눈떴다는 것이다. 요컨대, 일본은 이미 근대화를 위한 준비가 잘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또 조선이나 청나라와는 달리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 진행될 당시에도 국민들이 분열되지 않고 근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일치단결했기 때문에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뒤따른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니콜라스 비천이 출간한 <북동 타타르지>(왼쪽 사진)와 책 속에 소개된 쿠릴열도 남부 우루프섬의 모습(오른쪽).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 니콜라스 비천이 출간한 <북동 타타르지>(왼쪽 사진)와 책 속에 소개된 쿠릴열도 남부 우루프섬의 모습(오른쪽).

하지만 이런 주장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조선처럼 멸망하거나 중국처럼 분열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유라시아 대륙 동부에서 서구 열강들의 최종 목표는 중국의 분할이었고, 일본에는 그들의 사활적인 이익이 달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큰 위기를 맞지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기존에 제기된 이런저런 주장은 이러한 지리적인 우연의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사후적으로 제기된 것이라고 본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일본은 섬나라이기에 유라시아 대륙 동부의 크고 작은 정치적 격변으로부터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지 않았고, 그러한 지리적인 우연이 19세기에도 작용했다. 이들 요인은 조선을 포함해 당시 세계 여러 지역에서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확인된다.

물론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에서 확인되는 독특하고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조짐까지 부정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조선의 연행 사절들이 감탄한 청나라의 고증학과 비슷한 실증주의적 학문이 같은 시기에 일본에서도 발생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나가사키(長崎)라는 항구도시를 통해 전해진 서구 세계의 사정을 열심히 배워 ‘네덜란드 학문’이라는 뜻의 난학(蘭學)을 성립시킨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런 조건들 때문에 일본만이 독특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주장은 인정할 수 없지만, 이런 조건이 있었기에 일본인들이 역사적 우연을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고는 생각한다.

난학이라고 하면 낯설게 느끼는 사람도 ‘쇄국(鎖國)’이라는 말은 들어봤을 것이다. 쇄국이라는 단어는 독일학자 엥겔베르트 캠페르(Engelbert Kaempfer)가 1690~1692년 나가사키에 머문 경험을 바탕으로 1727년에 출판한 <일본사(History of Japan)>를, 난학자 시즈키 다다오(志筑忠雄)가 발췌 번역하면서 책 제목을 ‘쇄국론(鎖國論)’이라고 붙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이 쇄국이라는 개념이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일본 사회에 정착한 결과, 얼마 전까지도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전의 일본 사회를 ‘쇄국체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는 했다. 요즘에는 쇄국은 유럽 국가들에 대해서만 그랬던 것이고, 조선·청나라·유구·아이누 등과는 활발한 정치·경제적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쇄국체제라는 개념은 적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 사회의 난학 이해는 단편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난학자들이 독일의 해부학 서적을 번역해서 <해체신서(解體新書)>를 출판하는 등 의학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는 사실이 주로 알려져 있다. 난학자 오가타 고안(緖方洪庵)이 1838년 오사카에 개설한 의학 학원 데키주쿠(適塾)처럼, 난학의 주축 가운데 하나가 의학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가사키를 통해 들어온 유럽 학문은 의학뿐이 아니었고, 일본인 난학자들 또한 의학만 공부한 것이 아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시즈키 다다오의 제자였던 바바 사다요시(馬場貞由·1787~1822), 통칭 바바 사주로(馬場佐十郞), 또는 네덜란드어 이름 아브하람(Abraham)이라 불린 인물이다. 바바의 탁월한 어학적 재능과 일본 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현대 일본의 언어학자 스기모토 쓰토무(杉本つとむ)가 <서양문화 기원 십강(西洋文化事始め十講)>이라는 책에서 상세히 다룬 바 있다. 필자는 약 15년 전에 이 책을 읽고 바바라는 사람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언젠가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다.

서른다섯 살의 나이로 요절한 바바는 에도시대 일본이 낳은 최고의 어학 천재라 할 만하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어 통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시즈키 다다오와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 대표였던 헨드릭 두프(Hendrik Doeff)에게서 네덜란드어, 프랑스어, 영어를 배웠다. 그의 어학 실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도쿠가와 막부는 1808년에 스물두 살의 그를 에도(江戶)로 불렀고, 1811년에는 유럽 문헌을 번역하는 부서인 ‘화란서적화해어용(和蘭書籍和解御用)’을 설치해 그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막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바바는 프랑스의 놀 쇼멜(Nol Chomel)이 집필한 백과사전을 <후생신편(厚生新編)>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독일학자 엥겔베르트 캠페르가 지은 <일본사> 영어 번역본 표지.

독일학자 엥겔베르트 캠페르가 지은 <일본사> 영어 번역본 표지.

또 1818년과 1822년에 영국 배가 에도 근처에 나타나자 그 대응을 담당하고,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어·네덜란드어·일본어 3개국어 대조 회화집인 <통역관필수영어집성(譯司必用厄利亞語集成)>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예를 들어 “How do you do”라는 영어 인사말과 이에 해당하는 네덜란드어 “Hoe vaart u”, 일본어 “汝等無事ナル哉”를 나란히 배치하는 식이다.

그는 러시아어 문법책 <노어문법규범(魯語文法規範)>과 러·일 단어집 <아라사어소성(俄羅斯語小成)>을 집필하는 등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원이었던 니콜라스 비천(Nicolaes Witsen)이 1692년에 출간한 유라시아 대륙의 역사지리지 <북동 타타르지(Noord en Oost Tartarye)> 가운데 일본·아이누·만주 지역에 대한 내용을 <동북달단제국도지 에조잡기역설(東北 諸國圖誌野作雜記譯說)>이라는 제목으로 1809년에 발췌 번역하기도 했다.

이 책에는 <하멜 표류기>로 유명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들에게서 청취한 조선 정보와 한국어 단어집이 실려 있다.

바바는 또 북아메리카의 러시아령을 관리하던 러시아 아메리카 상회의 대표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가 일본과의 통상을 희망하며 1804년에 전달한 국서(國書) 가운데 만주어로 적힌 내용을 독학으로 해독해 <노서아국정서만문훈역강해(魯西亞國呈書滿文訓譯强解)>라는 책을 막부에 제출했다. 러시아는 1689년에 청나라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으면서 러시아어·라틴어·만주어로 조약문을 작성했다. 이때부터 러시아는 유라시아 동북부에선 ‘문어 중국어’, 즉 한문이 아니라 만주어가 국제어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이 국서가 전달되었을 당시 일본에는 만주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오사카 난학 의학 학원 데키주쿠를 창설한 오가타 고안의 초상.

오사카 난학 의학 학원 데키주쿠를 창설한 오가타 고안의 초상.

바바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만주어 사전을 독학으로 공부해 일본에 만주학을 탄생시켰다.

막부로부터 통상 요청을 거절당한 레자노프는 부하들을 시켜 1806~1807년에 사할린과 쿠릴열도 남부를 보복 공격하게 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 측은 쿠릴열도의 지리를 조사하던 바실리 골로브닌(Василий Головнин)을 납치했다. 바바는 일본에 억류 중인 골로브닌에게서 2년간 러시아어를 배우고 종두법 책을 일본어로 번역했다. 바바는 이렇게 해서 일본에 러시아학도 확립시켰다.

이처럼 전방위로 활약한 바바는 그 능력을 전부 소진해버린 탓인지 서른다섯 살에 사망한다. 하지만 평민 신분인 통역관이 어학 능력을 인정받아 사무라이 지위를 받고, 훗날 도쿄대학이 되는 정부부처가 오로지 그를 위해 설치되는 등 그는 사회로부터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고 사회를 위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했다. 바바와 같은 인물의 존재는 동시대 비서구권의 다른 지역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렵다.

바바의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난학이란 단순히 네덜란드어로 된 유럽 의학 서적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학은 역사지리와 군사학을 포괄하는 방대한 학문 체계였다. 의학이 질병과 싸우기 위한 학문이라면, 군사학은 일본이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필요로 한 학문이었다. 그리고 난학이 융성한 배경에는 세상을 이념의 스펙트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한 공부를 중시하고,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은 신분을 막론하고 대우하는 사회구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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