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한반도 포경 100년, 시작과 끝 장생포

최명애 문화생태지리학 박사

한국 근대 포경

러시아·일본·노르웨이·조선이 만난 19~20세기 글로벌 비즈니스

1970년대 장생포에서는 음파 탐지장치와 철선을 이용해 한 해 700~800마리의 밍크고래를 포획했다. ‘울산시지’ 1987년판에 실린 장생포항. 2  2013년 울산고래축제 행사로 고래공원에서 러시아 포경회사와 대한제국의 포경기지 조인식을 재현하고 있다. 포경선 진양6호가 뒤로 보인다. 3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의 고래 해체장 모습. 해방 후 포경 시절을 영화 세트장처럼 재현해 놓았다. 4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작살포와 포수의 모습.

1970년대 장생포에서는 음파 탐지장치와 철선을 이용해 한 해 700~800마리의 밍크고래를 포획했다. ‘울산시지’ 1987년판에 실린 장생포항. 2 2013년 울산고래축제 행사로 고래공원에서 러시아 포경회사와 대한제국의 포경기지 조인식을 재현하고 있다. 포경선 진양6호가 뒤로 보인다. 3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의 고래 해체장 모습. 해방 후 포경 시절을 영화 세트장처럼 재현해 놓았다. 4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작살포와 포수의 모습.

울산 시내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의 장생포는 2009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고래관광을 시작한 곳이다. 보트를 타고 울산 앞바다에 나타나는 돌고래 떼와 밍크고래를 본다. 그 전에는 우리나라 고래고기의 ‘메카’였다. 가까운 울산이나, 멀리는 부산이나 포항에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려고, 혹은 ‘별미’를 맛보려고 오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최대의 포경항이었다. 한국 근대 포경은 러시아 포경업자들이 장생포에 포경기지를 건설한 1899년 시작해, 마지막 포경선이 장생포항으로 돌아온 1985년 끝난다.

■ 포경이란 이름의 다국적 산업

우리나라의 포경이 언제부터 본격화했는지는 논란거리다. 포경에 찬성하는 이들은 포경이 신석기 시대 반구대 암각화 때부터 이어져온 전통문화라고 주장하고, 포경에 반대하는 쪽에서는 고래가 해변에 자주 출몰한 것은 사실이지만 조직적인 사냥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부정한다. 어쨌거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근대적 형태의 포경이 시작됐다는 점은 양측 모두 부인하지 않는다.

2013년 울산고래축제 행사로 고래공원에서 러시아 포경회사와 대한제국의 포경기지 조인식을 재현하고 있다. 포경선 진양6호가 뒤로 보인다.

2013년 울산고래축제 행사로 고래공원에서 러시아 포경회사와 대한제국의 포경기지 조인식을 재현하고 있다. 포경선 진양6호가 뒤로 보인다.

바야흐로 포경이 ‘글로벌 비즈니스’로 거듭나던 시기였다. 미국 동부에서 향고래를 잡던 ‘양키 포경’은 북극해로 영역을 넓혔고, 이따금 태평양을 건너 동해까지 출몰했다. 국사책에 등장하는 조선 후기 이양선의 상당수가 고래를 쫓아 온 포경선들이었다.

유럽에서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가 포경업에 뛰어들었다. 해안에서 그물로 고래를 잡던 일본도 태평양의 고래에 눈을 돌리고 잇달아 포경회사를 세웠다. 기술의 발달, 포경 대상과 지역의 확장. 이 20세기 포경업이 긴수염고래, 향고래, 북극고래에 이어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명체인 대왕고래를 포경선으로 쓸어담았다. 한국 포경 100년은 세계로 확장된 20세기 포경업의 지형도 속에서 봐야 한다. 러시아인들이 동해의 풍부한 고래 자원에 주목했고, 일본 포경업자들이 배를 띄웠고, 노르웨이 기술과 조선의 인력이 동원됐다. 포경은 ‘다국적 산업’으로 재편되고 있었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의 고래 해체장 모습. 해방 후 포경 시절을 영화 세트장처럼 재현해 놓았다.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의 고래 해체장 모습. 해방 후 포경 시절을 영화 세트장처럼 재현해 놓았다.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러시아인들이 세운 한반도의 포경기지를 접수한다. 한반도 포경을 독점한 동양포경주식회사는 장생포, 서귀포, 대흑산도, 어청도 등 6곳에 포경기지를 세웠다. 그 중에서도 장생포 기지가 전체 포획량의 60% 이상을 담당할 만큼 가장 규모가 컸다. 인구 300명의 작은 어촌 마을 장생포는 1000여명이 북적거리는 항구로 변했다.

1917년 인구통계를 보면, 한국인 498명, 일본인 407명, 노르웨이인 2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온다. 지구 반대편까지 온 두 사람의 노르웨이인은 포경선의 포수였을 것이다. 러일전쟁을 통해 노르웨이식 포경을 접한 일본은 거금을 들여 노르웨이 포경선을 주문하고, 노르웨이 포수들을 잇달아 고용했다. 20세기 초의 노르웨이는 지금의 실리콘밸리쯤 될 세계 포경기술의 전진기지였다. 증기선과 총처럼 작살을 쏘는 작살포가 핵심이었다. 작살이 고래의 몸에 박히면 날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고정되는데, 도망가는 고래를 속도가 빠른 증기선으로 잽싸게 따라가 잡는 방식이었다. 작살포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노르웨이 포수는 요즘의 메이저리거처럼 높은 몸값을 받고 러시아와 일본의 선사들을 옮겨다녔다. 이 다국적 포경선의 하급 선원으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탔다.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작살포와 포수의 모습.

고래박물관에 전시된 작살포와 포수의 모습.

포경선의 민족적 위계는 분명했다. 노르웨이인 포수, 일본인 선주에 기관장과 항해사는 일본인들이 맡고, 조선인들은 요리를 담당하는 화장이나 잔심부름을 도맡은 ‘도방세라’ 역할이었다. 포경 기술은 어깨너머로 눈치껏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이들 선원은 포경이라는 이름의 ‘근대’를 - 기술문명을, 자연 착취를 통한 자본의 축적을, 조선반도와 일본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를 - 만났다. 장생포에는 일제하 포경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10대 소년 화장으로 일본 포경선을 타고 남극까지 다녀온 이들이 있었다. 한 퇴역 포경선장은 “외삼촌이 일본 포경선을 타고 북해도에서 조업을 하다 향고래가 배를 들이받아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비딕’의 복수 같은 이야기다.

■ 일본과 닮은꼴의 한국 포경

해방과 함께 일본 포경업자들은 다급히 조선을 떠났다. 작살을 다시 잡은 것은 장생포의 선원들이었다. 포경선 경험이 있는 이들이, 일본에서 구해온 포경선 두 척으로 동해의 고래를 잡기 시작했다. 직업이랄 것도, 먹을 것도 없던 시절이었다. 이들이 잡아온 고래는 한국전쟁과 전후 복구기에 값싼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할머니들은 짚으로 묶은 고래고기를 대야에 담아 머리에 이고 마을과 마을로 팔러 다녔다. 한·일 외교관계가 복구된 1965년부터는 일본으로 고래고기를 수출했다. 국내 공급가의 5배를 쳐 줘서 수입이 좋았다. 질 좋은 살코기는 일본으로 보내고, 남은 고기는 울산, 경남, 부산 지역에 공급했다. 고래 껍질이나 일부 부위는 기름을 만드는 데 쓰였다. 이 기름은 공장이나 가정에서 썼다. 고래뼈는 갈아서 과수원이나 밭의 비료로 뿌렸다. 그래서 외국 포경항과 달리 장생포에는 고래뼈가 거의 남아있지 않다.

장생포는 해방 후 사실상 유일한 포경항이었다. 지금 관광객들은 고래박물관 주변에 모이지만, 포경 시절의 중심지는 500여m 거슬러 올라간 장생포 치안센터 일대다. 당시엔 식당과 술집, 고래고기를 삶는 고래막으로 북적거리던 곳이었다. 선원들은 여기서 시간을 보내다, 고래가 잡히는 철이면 바다로 나갔다. 빨리 잡히면 당일치기도 가능했지만, 보통 2~3일은 걸렸다. 포경선은 50~100t급의 작은 배였다. 선원은 12~14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꽃’은 포수였다. 월급도 있었지만, 고래가 잡힐 때마다 받는 보너스가 선원들의 큰 수입원이어서, 정확히 작살을 꽂는 포수의 능력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2013년 고래관광 자료 조사 중 만난 손남수옹은 경력 40년의 베테랑 포수였다. 열여섯 살에 화장으로 시작해, 갑판원을 거쳐, 서른 살에 포수가 됐다. “1973년에 독도 옆에서 72자(약 22m)짜리 참고래를 잡았지. 45t짜리. 배 세 척이 끌고 오는데도 하루가 꼬박 걸렸어. ‘한국에서 제일 큰 고래’라고 했는데, 다 썩어버려서 돈은 얼마 못 받았지.” 이 고래의 사진은 지금도 장생포 고래고기 식당 곳곳에 걸려 있다.

식민지 시절과 해방 후 형성된 한국 포경은 2~3년 원양포경을 실시하는 ‘양키 포경’과도, 공장식 모선으로 고래를 대량 처리하는 남극해 포경과도 다르다. 소규모 선박과 선원을 이용해 연안에서 포경하는 이 방식은 일본이 ‘소규모 연안 포경’이라고 부르는 것과 유사하다. 일본 연근해에서 돌고래나 길잡이고래 같은 소형 고래를 잡을 때 쓰는 방식이다. 포경 용어에도 일본의 흔적이 남아 있다. 울산대 사학과 허영란 교수가 장생포 주민들의 이야기를 채록해 정리한 <장생포 이야기>를 보면, 포경 선원들이 ‘사이수’ ‘시탄바이’ ‘코쿠’ 같은 용어들을 썼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영어 남동향(Southeast), 스탠바이(Standby), 요리사(Cook)를 일본 포경 선원들이 일본 발음으로 옮겨서 쓰고, 이를 해방 후 한국 포경에서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한국 포경은 일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했다. 일본인들에 의해 시작해, 일본 시스템과 기술을 이용해, 일본으로 고기를 수출하기 위한 포경. 이식된 문화를 독자적으로 발전시키기엔 40년이란 시간(해방 후에서 국제 상업포경 유예로 포경이 금지된 1986년까지)은 짧았다.

■ 개체수 감소로 포경 내리막길

1978년 한국 정부가 국제포경위원회(IWC)에 가입하면서, 우리나라 포경에는 빨간불이 켜졌다. 포경업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곧 상업포경 금지를 발효할 예정인 국제기구에 가입한 것이다. 직접적 이유는 고래고기 수출 때문이었다. IWC가 회원국과 비회원국 간의 거래를 금지하면서, 회원국인 일본으로 수출을 계속하려면 IWC에 가입해야 했다. 장생포 일부 주민들은 한국의 포경 금지가 ‘외세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지금도 통탄한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반포경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던 미국이 IWC 비회원국에 대해 미국 수역 내 조업권을 축소하겠다고 압력을 행사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고래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수산당국의 결정은 ‘압력에 굴복했다’기보다는, 경제적 합리성에 기반한 것으로 보인다. ‘고래’ 대신 베링해의 ‘명태’를 선택한 것이다.

100년간의 강도높은 포경은 동해 고래의 씨를 말렸다. 포경으로 특정 고래종이 멸종한 것은 멀리 대서양이나 북극해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짧은 기간에 한국 포경은 ‘귀신고래(grey whale) 포경’에서 ‘참고래(fin whale) 포경’으로, 다시 ‘밍크고래 포경’으로 바뀌어 왔다. 개체수가 줄어 더 이상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하 식민지 포경은 귀신고래를 사실상 멸종시켰다. 해안가를 따라 미역을 뜯어먹으며 천천히 이동하는 귀신고래는 연안 포경의 손쉬운 타깃이었다. 1910년대 한 해 100마리 이상 잡히던 귀신고래는, 1920년대 수십마리로 줄었고, 1933년 이후로는 드물게 잡혔다. 마지막 두 마리가 1977년 울산 앞바다에서 목격된 뒤 귀신고래는 더 이상 우리 바다에 나타나지 않는다. 참고래도 같은 길을 걸었다. 1910년대부터 해방 후까지 매년 100마리 이상 잡히던 참고래는 196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수십마리로 포획량이 줄었다. 몸길이 20여m. 대왕고래 다음으로 큰 대형 고래다.

밍크고래를 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밍크는 6~8m로 크기가 작아 고기나 기름양에서 참고래에 비교할 바가 못 됐다. 그래도 아쉬우니 잡았다. 매년 수백마리, 철선과 음파탐지기가 도입된 1970년대 이후에는 매년 700~800마리를 잡았다. 1977년과 1978년엔 한 해 1000마리 이상 잡기도 했다. 그 밍크도 지금은 귀하다. 포경 시작에서 특정 종의 멸종, 포경 금지까지 300여년에 걸친 서구 포경의 역사를 우리는 100년에 걸쳐 ‘압축적’으로 겪었던 것이다. 1970년대 말이 되면서 만선 깃발을 올린 포경선이 의기양양하게 항구로 돌아오던 풍경은 과거의 일이 됐다. 고래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국제 포경 금지가 아니었어도, 포경산업은 조만간 종말을 맞을 것이었다.

1985년 말, 장생포의 포경 선원들은 3개월치 월급을 보상금으로 받아들고 포경선에서 내렸다. 일부는 원양어선을 탔고, 일부는 장생포에 지어진 울산미포국가산업단지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또 일부는 새로운 인생을 찾아 장생포를 떠났다. 21척의 포경선은 채낚기 어선 등으로 어업 종목을 변경했지만, 몇몇은 항구에 그대로 정박돼 있었다. 그 중 한 척이 지금 장생포 고래박물관 앞에 전시된 진양6호다. 1977년 진수된 이 배는 울산 앞바다와 서해 어청도에서 밍크고래를 잡았다. 지금은 수족관과 야생의 고래를 보러 온 아이들이 갑판에 올라 뛰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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