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소주(燒酎)는 소주(燒酒)가 아니다

허시명 | 술평론가·<술의 여행> 저자

소매점에서 1200원 하는 소주를 사서 상표를 살펴보면 한문으로 희석식소주(稀釋式燒酎)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희석식은 무엇이며, 소주는 왜 한문으로 소주(燒酒)가 아니고, 소주(燒酎)일까? 이런 의문을 품어본 이라면, 조지훈 시인이 말한 술을 배우는 학주(學酒)의 수준은 되는 사람이다. 주(酎)자를 탐구하다 보면 한국 소주의 근현대사가 읽힌다. 옥편은 주(酎)자를 세 번 빚는 술 또는 물을 타지 않은 진한 술로 풀이하고 있다. 소주를 얻으려면 발효주를 빚고, 이를 증류하는 과정을 거친다. 한 번만 증류하는 게 아니라 두세 번 증류하니 소주를 두고 세 번 빚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글자에 맞춘 해석일 뿐이다. 소주(燒酎)라는 단어에는 지역성과 역사성이 담겨 있다.

전통소주의 원리를 알 수 있는 옹기로 만든 소줏고리의 단면도.

전통소주의 원리를 알 수 있는 옹기로 만든 소줏고리의 단면도.

소주(燒酎)는 일본식 조어다. 우리 역사에 처음으로 소주(燒酒)가 등장한 것은 <고려사> 우왕 원년(1375)의 일이다. ‘사람들이 검소할 줄 모르고 소주나 비단 또는 금이나 옥 그릇에 재산을 탕진하니 앞으로 일절 금한다’고 했다. 우왕 2년에는 경상도 원사 김진의 무리가 임지에서 기생을 불러다놓고 주야로 술을 즐기는데, 소주를 좋아하여 군중에서 소주도(燒酒徒)라 불렸다고 한다. 이때 소주는 소주(燒酒)였다. 조선 후기까지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소주는 모두 소주(燒酒)였다.

그런데 1909년에 일본인의 주도로 주세법이 만들어지면서, 증류주로 소주(燒酎)가 등장했다. 일본인이 법을 만들면서, 일본인의 잣대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조선 소주를 아우르는 개념이었지만 차츰 일본식 소주가 보급되면서, 이름처럼 일본식 소주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10년대에는 전통 소줏고리 대신에 일본식 양조용 시루가 보급되었다. 1920년대에는 일본에서 검은 누룩(흑국)이 들어와 전통 누룩과 반반씩 사용되더니, 점차 흑국이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다. 전통누룩은 단단한 떡누룩이고, 흑국은 균을 배양한 가루누룩이었다. 흑국의 보급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1923년에는 흑국 소주와 전통누룩 소주의 비율이 1 대 99였는데, 1932년에는 95 대 5로 역전되었다. 소주회사끼리 경쟁하면서 채산성을 따지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개발되어 일본을 거쳐 들어온 주정회사가 1919년 평양에 건립된 상태였다.

주정(酒精)으로 만든 소주는 전통소주와 전혀 다른 개념이었다. 주정은 술의 정수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에틸알코올이다. 기계 안에서 연속 증류하여 순도 높은 95% 에틸알코올을 만들어내면 주정이 된다. 에틸알코올은 술뿐만 아니라 약품, 식품, 폭약을 만들 때도 사용된다. 95% 알코올에 물을 희석하고 탈취와 감미 과정을 거쳐 20% 알코올을 만들면, 지금 우리가 가장 즐겨 마시는 희석식 소주가 된다.

주정식 소주, 즉 희석식 소주가 1919년 평양에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인기가 없었다. 전통소주의 원료에 현대식 기술이 접목된 증류식 소주가 오래도록 소주 시장을 주도하였다. 그러다가 1965년 양곡정책으로 쌀로 소주를 못 빚게 되면서, 증류식 소주가 몰락하고 희석식 소주가 주도권을 잡았다. 희석식 소주의 승리는 미각의 승리가 아니라, 제도의 승리였던 것이다.

1857년에 파스퇴르가 효모를 발견한 이후, 술은 주술적 단계에서 과학의 단계로 들어왔다. 한국 술의 과학화와 근대화 과정은 일본화 과정이었다. 일본 또는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기술들이 한국 전통 도구와 기법을 대체하였다. 그런 과정에서 조선 시대에 사용했던 소주(燒酒)라는 개념은 희미해지고, 일본식 조어인 소주(燒酎)가 주인 행세를 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시계바늘을 그리니치 천문대를 기준으로 동경시를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우리 스스로 기준을 잡지 않고, 손쉽고 편리한 것을 따라가다 보니 빚어진 일이다. 하지만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고, 소주(燒酒)는 단절되지 않았다. 증류식 소주로 분류되거나 민속주로 지정된 증류주들이 전통 소주(燒酒)의 계보를 잇고 있다. 안동소주, 진도홍주, 불소곡주, 계룡백일주, 송화백일주, 죽력고, 추성주, 금산 인삼주가 그런 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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