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교포,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냈을까?…이매뉴얼 한의 ‘코리아타운 드리밍’

이유진 기자
이매뉴얼 한의 포토북 ‘코리아타운 드리밍’에 소개된 코리아타운에서 꿈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재미한인들. (왼쪽부터)존 한, 이진경, 문용, 김도현 씨.

이매뉴얼 한의 포토북 ‘코리아타운 드리밍’에 소개된 코리아타운에서 꿈을 잃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는 재미한인들. (왼쪽부터)존 한, 이진경, 문용, 김도현 씨.

재미교포라고 하면 누군가는 철마다 미제 연필이며 폴로 원피스를 사서 보내주던 ‘미국 고모’를, 또 다른 누군가는 하버드대나 UCLA에 입학했다는 ‘엄친아’ 사촌형을 떠올릴 것이다. 25평 시장 옷가게에서 시작해 ‘포에버21’이라는 글로벌 의류 브랜드를 세운 재미교포 부부의 성공신화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수 있다(지금은 파산했지만). 재미교포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는 가난했던 시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낯선 땅을 밟고 억척같이 일어선 자수성가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한국계 미국인 포토그래퍼 이매뉴얼 한(Emanuel Hahn)은 LA 한인타운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재미한인 40여명의 사진과 이야기를 담은 <코리아타운 드리밍(Koreatown Dreaming)>을 출간했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 또 다른 이민자의 삶이란 늘 흥미로운 소재다. abc뉴스, 버즈피드 등 미국 유력 매체들이 그의 책을 주목했다.

<코리아타운 드리밍>에는 이국적인 풍경이나 찬란한 성공담 따윈 없다. 소박하지만 묵묵하게 자신의 일터를 지켜나가는 우리와 별다르지 않은 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코로나19 팬데믹과 젠트리피케이션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인타운의 어두운 면도 가감없이 그려냈다. 저자는 책 제목에 ‘Dream’이 아닌 ‘Dreaming’을 붙였다. ‘꿈을 꾸고 있다’는 현재 진행형을 쓴 이유에 대해 “LA 한인들에게 보다 진보적인 시제를 부여하고 싶었다. 내가 본 그들의 꿈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외교부 조사에 따르면 한국계 미국인은 시민권자 기준 254만6982명이다. 국내 제3도시인 대구광역시 인구에 육박하는 숫자다. 우리가 잘 몰랐던, 혹은 평면적으로만 인식했던 재미한인의 진짜 모습을 이매뉴얼 한의 시선으로 엿본다.

포토그래퍼이자 작가 이매뉴얼 한과 그의 책 ‘코리아 타운 드리밍’. 이매뉴얼 한 제공

포토그래퍼이자 작가 이매뉴얼 한과 그의 책 ‘코리아 타운 드리밍’. 이매뉴얼 한 제공

■이민자의 눈으로 본 코리아타운

이매뉴얼 한은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재미한인이다. 그는 뉴욕대에서 금융학을 공부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다 20대 중반 사진의 스토리텔링에 매료되어 포토그래퍼로 전향했다. 사진가로서 커리어는 성공적이다. 그는 월마트나 구글, 맥도널드 같은 다국적 대기업의 광고 사진을 찍는다. ‘이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사진으로 담아내는 기록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이어오고 있는 작업이다.

<코리아타운 드리밍> 이전에는 미시시피 삼각주에 모여 사는 중국인 커뮤니티나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한국계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이매뉴얼 한의 관심사는 자신이 자라온 배경과도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아버지가 관광업을 운영하던 사이판에서 태어났어요. 이후 한국에서 IMF(외환위기)가 터지면서 아버지는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죠. 부모를 따라 싱가포르와 캄보디아를 오가면서 살았어요. 싱가포르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뉴욕대에 입학해 10년 넘게 미국에서 살고 있어요.”

다양한 문화권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그가 미국에서 거주하는 이민족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흐름인지도 모른다. 그가 LA 코리아타운을 주목하게 된 계기는 그곳에 불어닥친 변화의 바람이었다. 기록하지 않으면 곧 사라질 거란 위기감이 그를 움직였다.

“10년 전만 해도 탄탄하게 운영하던 한인 가게들이 최근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어요. 코로나19 팬데믹 영향도 있고, 부동산 개발로 꾸준히 상승하는 임대료 탓이기도 해요. 혹은 1980~1990년대에 장사를 시작한 사장님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폐업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고요. 처음에는 코리아타운 건축물들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기록하고 싶었는데 한인 소상공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들의 내면을 담아내고 싶은 욕심이 커졌죠.”

그는 한때 ‘아메리칸드림’으로만 대변됐던 그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고 싶었다. 빛이든, 그림자든 말이다.

“우리는 늘 듣기 좋은 성공담에만 집중하죠. 물론 이곳에서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 한인들도 있어요. 그렇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매우 평범한 삶을 살고 있고 하루벌이를 위해 일하며 살고 있죠. ‘돈 많이 벌었다’는 한인조차 미국 주류 사회에 속하지 못한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사람이 태반이에요. 한인들 중에는 불법체류자나 빈민층 집단도 있지만, 우리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보려 하지 않죠.”

<코리아타운 드리밍> 이후 이매뉴얼 한의 다음 작업은 사진을 넘어 단편영화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는 실제 미국에서 만난 한국인 불법체류 가족의 삶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밭 설렁탕’ 존 한 씨와 ‘해피 노래 음악원’ 김도현 씨. 이매뉴얼 한 제공.

‘한밭 설렁탕’ 존 한 씨와 ‘해피 노래 음악원’ 김도현 씨. 이매뉴얼 한 제공.

■한인타운 사람들 이야기

“설렁탕, 미국 사람들이 더 잘 먹어요.”

코리아타운의 대표적인 한식당 ‘한밭설렁탕’은 3대째 이어온 설렁탕 전문점이다. 현 사장인 존 한(John Han)의 할머니가 1953년 대전에서 가게 문을 열면서 ‘한밭’이라는 이름이 붙였다. 이후 서울에서 설렁탕집을 열었던 존의 부모님이 1987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한밭설렁탕은 34년째 LA 한인타운에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당시 한인타운에 식당 문을 열자마자 빠르게 입소문이 퍼졌다. 소뼈를 푹 고아낸 뽀얀 설렁탕은 한국인들에게는 고향의 맛이자 솔푸드다. 부모님과 존은 지금껏 한 번도 가게 일을 쉰 적이 없다. 육수를 내기 위해 새벽 4시30분이면 가게에 도착한다. 그의 부모는 은퇴할 나이가 훌쩍 지났지만 ‘손맛’을 낸다는 일념으로 이 과정만은 직접 하기를 고집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설렁탕집을 찾는 손님들은 다양해졌다. 고객의 절반이 비한국인이다. 존은 “미국 사람들에게 우리 설렁탕 맛을 소개한 점”을 자신이 남긴 가장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꼽았다.

변함 없는 육수의 맛을 지키는 동안 세월은 흘렀고 자녀들은 커버렸다. 3대째 사랑받아온 한밭설렁탕이 4대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 존은 고개를 젓는다. 십수 시간씩 뼈를 고아 만드는 설렁탕이 얼마나 공력을 쏟아야 하는 음식인 줄 알기에 자녀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으려 한다. 그의 바람은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고객들에게 따뜻한 설렁탕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이다.

“갈 곳 없는 한인 노인들, 즐길 곳 만들었죠.”

이매뉴얼 한이 ‘해피노래음악원’이란 간판에 이끌려 방문했을 때는 어르신들이 노래방에서 팝가수 본 조비의 ‘Living on a Prayer’를 열창하고 있었다고 한다.

해피노래음악원을 운영하는 김도현씨는 10년 전 미국으로 이주했다. 노래와 색소폰, 드럼이 특기였던 그는 음악 관련 사업을 생각하다가 코리아타운에 생각보다 많은 노인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르신을 위한 파티홀이자 음악원을 열었다. 음악원은 다양한 악기를 가르치지만 가장 반응이 좋은 것은 역시 노래방이다.

코리아타운에 한인 노인이 즐길 수 있는 장소는 거의 없다. 그들은 친목 모임, 생일 파티, 미팅 장소로 해피노래음악원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김씨는 “우리 한국인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지만 일상에서는 그걸 쉽게 표현할 수 없다”며 “이곳은 단 몇 시간이나마 그들 자신이 될 수 있게 해주는 곳”이라고 말한다.

한인타운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일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젊음을 바쳤다. 비로소 뒤를 돌아볼 수 있는 나이가 되자 그들은 갈 곳 없는 노인이 돼 있었다. 해피노래음악원은 그런 한인 노인들의 편안한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1-2-3 유치원’ 이진경 씨와 무도가 문용 씨. 이매뉴얼 한 제공

‘1-2-3 유치원’ 이진경 씨와 무도가 문용 씨. 이매뉴얼 한 제공

“K유치원 바람이 불고 있어요.”

LA 한인타운 ‘1-2-3유치원’은 자녀를 두고 일터로 나가는 한인 맞벌이 부부들에게는 구원의 존재 같은 곳이다. ‘1-2-3유치원’ 이진경 원장은 1980년 이직하는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이 원장의 눈에 비친 한인 아이들은 끊임없이 일하는 부모들 밑에서 고아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동네에 유치원은 전무했고 지역 교회나 자원봉사자들이 부모를 대신해 최소한의 돌봄 활동을 할 뿐이었다.

이 원장은 교회나 비공식 보육원에서 소외된 아이들을 돌보다가 1987년 자신의 힘으로 유치원을 열기로 결심했다. 전문지식도 없었고 또 적은 인원으로 많은 아이들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는 매년 아이들의 반응을 보고 연구를 거듭하며 자신만의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했다. 그는 “기본적인 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에게 수업은 재미있고 감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몸을 통해 활동하고 경험하는 감각은 아이들의 일생을 좌우하는 핵심 기억이 된다”고 강조한다.

최근 유치원에는 비한국계 아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비한국계 부모와 자녀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음식을 먹는 것을 선호하면서 부쩍 원생이 늘었다. 이 원장은 의심할 여지없이 “K드라마나 K팝 같은 K컬처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그는 여러 민족 아이들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는 것은 공감과 다양성을 배우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이 원장은 “내 에너지는 충분하다”며 “할 수 있는 한 유치원 일을 오래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메리칸드리밍’ 중이다.”

무술가 집안에서 자란 문용씨는 1979년 뉴올리언스 시장의 초청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해 무술학교를 설립했다. 이후 10년 전 LA로 이주한 그는 이웃집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는 것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고 한인타운에 무술학교를 세웠다. 그의 무술학교에서는 무술을 가르치는 것 외에 지역사회 10대들이 마약과 갱단 활동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인성 캠페인’도 벌여왔다. 수많은 학생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하도록 도운 건 그의 큰 자부심이다.

이제 그의 사명이기도 한 ‘아메리칸드림’은 아들 데이비드 문이 잇는다. 데이비드 문은 쿵후와 태권도의 기술을 혼합한 ‘무림도’를 주종목으로 MMA나 UFC 진출을 노리는 이들을 유치해 훈련시킬 계획을 갖고 있다. 무술학교는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다양한 연령대의 훈련생을 받아 현대화된 시스템으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문용씨는 “내가 일생을 바친 유산을 아들이 기꺼이 이어받는 것은 더없는 축복”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아메리칸드림은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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