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직장인 점심이 빨라졌다

이유진 기자

·직장인 점심 시간 카드 결제, 5년 전보다 30분 빨라져

·점심 커피 피크 타임도 11시~2시 분산

·탄력근무·거리두기·하루 두끼 문화도 영향

‘12시 점심’은 옛말이다. 직종과 일의 특성에 맞춰 점심시간이 유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권도현 기자

‘12시 점심’은 옛말이다. 직종과 일의 특성에 맞춰 점심시간이 유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권도현 기자

12시가 되면 우르르 나왔다 1시가 되면 우르르 들어가는 직장인들의 일사불란한 점심시간 풍경이 변하고 있다. 11시면 이른 점심을 먹는 여의도 증권맨, 1시가 훌쩍 넘어서야 점심을 먹는 판교의 개발자…. 직종과 일의 특성에 맞춰 점심시간이 유동적으로 바뀌고 있다. 효율을 강조하는 탄력근무의 영향일 수 있고, 3년간 우리 삶을 흔들었던 팬데믹의 흔적일 수 있다.

점심시간, 근무의 연장선? 개인의 자유시간!

“자, 이제 식사하러 갑시다!” 부서장 한마디에 모두가 정연하게 뒤를 따르고 한 가지 메뉴로 통일해야 하는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무한상사’ 같은 레트로 코미디에서나 유효한 듯하다. 직장인 온라인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회사 점심시간은 자유일까, 근무의 연속일까?’를 묻는 설문에 응답자 대부분(214명, 95.1%)이 회사 점심시간은 온전히 개인 시간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

대기업을 다니다 최근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한 30대 직장인 김주영씨는 한층 자유로워진 새 회사의 점심시간에 대한 만족도가 높다. 그는 “이전 회사는 다 같이 나가서 밥 먹고 티타임까지 갖고 들어왔는데 그런 획일적인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며 “옮긴 회사는 11시부터 1시 사이에 한 시간 동안 원하는 때 점심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혼밥’이라 편의점에서 때울 때도 있고 최근에는 다이어트 중이라 샐러드를 사서 회사 내 휴게실에서 먹지만 그는 점심시간이 매우 행복해졌다고 말한다.

점심 시간은 더이상 사내 인간관계 구축의 장이자 근무의 연장선이 아닌 개인의 자유시간이다.

점심 시간은 더이상 사내 인간관계 구축의 장이자 근무의 연장선이 아닌 개인의 자유시간이다.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부서원 간 업무 소통의 시간으로 통했다. 때로는 “내가 이 회사를 먹여 살렸다”는 상사의 ‘라떼’ 무용담과 신입사원의 영혼 없는 탄성이 무의미하게 오갔다. 사내 인간관계 구축의 장이자, 근무의 연장선이었던 셈이다.

2021년 엠브레인이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인 점심시간 인식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에게 점심시간이란 ‘휴식’의 의미가 가장 크다(78.3%·중복투표). ‘활력을 얻을 수 있는 시간’(38.5%), ‘회사 내 감정노동을 잠시라도 피할 수 있는 시간’(34.5%)이 뒤를 이었다. 또한 점심시간에 여유가 있다면 수면, 웹서핑을 한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무역회사에 다니며 해외 이직을 준비 중인 이수경씨는 영어 감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점심시간 중 20분간 전화영어 수업을 한다. 마케팅회사에 근무 중인 김경선씨는 점심시간도 바쁘다. 그는 새로운 식당을 방문하거나 식음료 신제품을 사 먹고 후기를 블로그에 소개하는 ‘n잡러’다. 그는 “점심시간을 활용해 간단히 사진과 품평을 올리면 하루에 피드 하나씩 완성할 수 있다”며 “새로운 메뉴를 찾는 것 자체가 일상의 활력이 된다”고 말했다.

MZ세대로 구분되는 요즘 직장인의 점심시간 활용이 자유로워지면서 ‘식후 커피’를 찾는 이들로 붐비던 커피전문점의 피크 타임도 바뀌었다. 서울 송파구 직장인 밀집 지역에서 테이크아웃 위주로 운영되는 ‘감성커피’ 테라스점 점장은 “2021년에는 고객 방문 시간대가 낮 12시에서 1시에 몰려 눈코 뜰 새 없이 주문이 밀렸는데 요즘은 특정 시간에 집중되기보다 11시부터 2시까지 고르게 주문이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KB국민카드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연도별 직장인 점심식사 이용 시간대 추세를 분석했다. 2019년에 비해 2023년 점심 시간 ‘카드 긁는 시간’이 30분 빨라졌다.

KB국민카드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연도별 직장인 점심식사 이용 시간대 추세를 분석했다. 2019년에 비해 2023년 점심 시간 ‘카드 긁는 시간’이 30분 빨라졌다.

점심시간 ‘카드 긁는 시간’이 바뀌었다

점심시간 변화는 직장인의 카드 결제 시간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KB국민카드는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연도별 직장인 점심식사 이용 시간대 추세를 분석했다. 광화문, 강남, 여의도, 구로, 판교 등 직장인 밀집 지역 내 음식점, 카페, 편의점을 포함한 식음료업장의 점심 매출 시간대(오전 11시30분~오후 1시30분) 중 ‘카드 결제가 가장 많은 시간대’(주말 제외) 통계를 살펴본 결과 2019년과 2023년 사이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가장 많은 점심 매출이 발생한 시간은 낮 12시40분대(13.1%)였다. 2023년은 낮 12시10분대(12.5%) 구간에서 가장 많은 카드 결제가 이뤄졌다. 무려 30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여의도의 결제 시간이 가장 일렀다.

‘오전 11시’ 직장인 점심이 빨라졌다

KB국민카드는 “분석 시간 내 연도별 점심식사 평균 결제 시각은 점차 빨라지는 추세”이며 “연령대별 점심식사 평균 결제 시각을 보면 40대의 결제 시간대가 가장 빠른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점심시간이 이처럼 빨라진 이유의 답은 먼저 ‘거리두기’의 흔적에서 찾을 수 있다. 3년간 이어졌던 코로나19 거리두기 정책으로 대중교통이나 식당의 밀집 시간대를 피하다 보니 직장인들의 점심시간이 한층 당겨졌다. 여의도 금융가로 출근하는 한지원씨는 “오전 8시 출근자가 많은 여의도는 11시면 점심시간 무드가 흐르기 시작한다”며 “코로나19는 끝났지만 출퇴근 시간이 빠른 탄력근무를 선호하는 직원들이 많아서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젊은 직장인들이 이른 점심을 반기는 이유는 또 있다. ‘하루 두 끼’ 습관 때문이다. 지난해 9월 롯데멤버스가 리서치 플랫폼 ‘라임’을 통해 성인 남녀 7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한국인의 하루 취식 횟수는 평균 2.4회였다. ‘삼시 세 끼’는 이미 옛말이 됐다. 응답자의 53.7%가 “하루 두 끼를 먹는다”고 답했다. 세 끼를 먹는다는 답변은 40.4%였다. 식사 횟수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적었고, 젊은층일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 아침을 먹지 않거나 집에서 취식 자체를 하지 않는 젊은 직장인이 늘다 보니 이른 점심시간은 회사의 ‘워라밸’ 복지로도 통한다.

직장 위치의 환경적인 요인으로 이른 점심시간을 택하는 회사도 증가하고 있다. 직장 소재지가 소위 ‘핫플’인 경우 ‘맛집’마다 늘어선 줄로 제시간에 점심을 먹기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 새 ‘용리단길’로 뜬 신용산의 한 화장품업체도 11시부터 2시까지 자율 점심시간을 적용했다. 단 한 시간을 넘기면 근무시간을 초과 시간만큼 늘린다는 조건이 있다.

황성욱 교수는 “젊은 세대는 비자율적 점심이 직장 내 사소한 갈등이 누적되면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도현 기자

황성욱 교수는 “젊은 세대는 비자율적 점심이 직장 내 사소한 갈등이 누적되면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권도현 기자

점심 자율성은 곧 일의 효율

점심시간 사용을 사원 재량에 맡기는 회사도 많아지고 있다. 주로 자유로운 업무 분위기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정보기술(IT) 업계가 선호한다.

한 종합금융플랫폼 IT기업은 점심시간을 100% 직원 자율로 운영하고 있다. 정해진 출퇴근 시간이 딱히 없으니 점심시간도 자유롭다. 오전 재택 후 오후 출근할 수도 있고 업무를 빨리 마친 오후에는 사내 헬스장을 이용해도 된다. 해당 기업에 근무하는 한 직원은 “작은 스타트업 시절부터 개발자 위주로 업무 환경이 조성돼 시간 활용이 자유롭다”고 회사 분위기를 전했다.

점심시간의 자율성이 근무 효율을 높여준다는 통계 결과가 있다. 영국 버밍엄대학 대니얼 휘틀리 교수(경제학)는 직장인 2만명을 대상으로 한 데이터 연구를 통해 “일이나 직장 문화에서 더 높은 수준의 자율성이 주어진 사람들의 직업적 만족도가 높다”는 결과를 얻었다. 그는 “스스로 삶과 일을 통제하고 결정할 수 있다면 더 큰 웰빙을 느낄 수 있다”고 전했다. “직원이 더 큰 재량권을 갖는 게 회사에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그의 연구 결과를 ‘사장님’이 듣는다면 점심시간 운영 정책에 긍정적인 변화가 올까.

부산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황성욱 교수는 “직장 내 점심시간을 바라보는 관점이 MZ세대와 기성세대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기성세대는 점심시간을 상사나 주변인 네트워크를 넓히는 근무의 연장선으로 보고 있으나 젊은 직장인들은 상사보다 친소 관계에 의한 자유로운 시간을 원한다”는 것이다. 황 교수는 “최근 젊은 세대는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과 관련해 직장 내 사소한 갈등이 누적되면 생산성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며 “회사 관리자도 구성원이 업무 영역 내에서 충분히 소통하되, 점심시간은 자유롭고 유연하게 지낼 수 있는 방향성의 정책을 택하고 있다”고 전했다.

휴식시간과 점심시간은 성과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조직에 대한 태도나 인식·감정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도현 기자

휴식시간과 점심시간은 성과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조직에 대한 태도나 인식·감정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권도현 기자

점심시간 사각지대도 있다

일의 성격에 따라 자율적인 점심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직종도 있다. 대표적으로 대민 업무가 필수인 은행 직원이나 공무원이다. 부서별 상황은 조금씩 다르나 보통 11시30분부터 1시30분까지 3교대로 나눠 점심시간을 갖는다. 이들에게 점심 자율화는 꿈같은 이야기다.

민원 업무를 담당하는 한 공무원은 “점심시간에도 ‘여기 사람이 왜 없느냐, 한참 기다렸다’며 화내는 주민들이 있다. 식사로 인한 교대근무 중이라고 설명해도 ‘공무원이 무슨 밥을 먹으러 가느냐’며 ‘저 뒤에 직원들 노는 것 같다’고 민원을 제기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교대근무로 11시에 식사하러 나서는 걸 보고 ‘벌써 점심시간이냐’며 눈에 불을 켜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면서 “차라리 점심시간을 12시로 통일하고 창구 운영을 중지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고도 했다.

외근이 많은 영업직 사원은 점심을 챙겨 먹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의료 영업직 사원 이경영씨는 “눈치껏 시간을 만들어 먹고 정 시간이 없으면 차에서 김밥을 먹으며 이동할 때도 많다”며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점심을 포기하는 격”이라고 했다.

직장인은 하루의 적지 않은 시간을 근무지에서 보낸다. 황성욱 교수는 “휴식시간과 점심시간은 성과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조직에 대한 태도나 인식·감정을 형성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며 “업무 특성에 맞게 점심·휴식 시간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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