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밈노동'에서 '다꾸' '휠꾸'까지···진화하는 단어 ‘꾸미기’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 '꾸밈노동'에서 '다꾸' '휠꾸'까지···진화하는 단어 ‘꾸미기’

‘꾸미기’는 단어에 생명이 있음을 믿게 해준다. 한 단어가 시대에 따라 그 뜻을 유연하게 바꾸기 때문이다. 그의 다채로운 모험엔 우리 사회의 젠더, 세대, 시대, 인권의 갈등과 진화가 다 있다. 한 단어가 단 기간에 이토록 굵직한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까?

모험의 시작은 ‘꾸밈 노동’이었다. 과거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돌봄 노동’ ‘가사 노동’과 같은 행위가 새롭게 노동의 지위를 얻던 시기, ‘꾸밈 노동’은 그 전환의 역사를 함께했다. 이때 ‘꾸밈’은 형식의 강요, 더 정확히는 ‘형식미’의 강요였다. 화장이나 불편한 옷차림처럼 강요된 ‘꾸밈 노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형식의 해방이자 아름다워야 한다는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투쟁이었다.

투쟁 대상이던 꾸밈은 ‘세대’라는 화제를 만나 다시 일상으로 들어온다. 다이어리를 꾸미는 ‘다꾸’라는 행위의 핵심은 ‘다이어리’가 아니라 ‘꾸미기’다. 다꾸, 폰꾸(휴대폰 꾸미기)는 기성품에 개인적 취향을 더하는 새로운 세대의 자기표현 행위다. 그 세대론의 중심에서 ‘꾸’는 ‘표현’ 언어로서 기호성을 갖추며 ‘나다움’을 추구하는 세대 특징을 함축한다.

세대 특성을 소비 동기로 활용하기 좋아하는 마케팅 언어가 백꾸, 신(신발)꾸처럼 ‘꾸’ 앞으로 오는 소비재를 활발히 확장하며 ‘꾸미기’를 소비 촉진 언어로 물들이던 찰나, 이 단어는 새로운 ‘시대’에 맞서 그의 역할을 소비로부터 해방시킨다. ‘뇌꾸’ ‘통꾸’라는 단어 덕분이다. ‘뇌꾸’(뇌 꾸미기)는 공부 같은 자기계발을 의미하고 ‘통꾸’(통장 꾸미기)는 돈을 열심히 벌자는 의미다. 공부나 노동이라 생각하면 하기 싫은 일을 뇌꾸와 통꾸라고 생각하면 덜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인식 전환은 ‘꾸미기’의 본질이 즐거운 과정이라는 시대적 합의를 바탕으로 한다. 무엇보다 자신을 최고의 자산으로 삼아야만 생존 가능한 가혹한 자기계발의 시대상을 뇌꾸와 통꾸로 유쾌하게 극복하려는 태도가 ‘꾸미기’라는 단어에 품위와 유머를 두루 더한다.

어디로든 확장할 수 있을 것 같은 ‘꾸미기’의 가장 최신 도전은 더 넓은 우리를 품는 일이다. ‘휠체어 꾸미기’라는 뜻의 ‘휠꾸’는 2022년 유튜브 채널 ‘굴러라 구루님’(사진)의 김지우씨가 처음 소개하며 휠체어를 꾸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하지만 가격과 안전성 문제로 누구나 쉽고 저렴하게 휠꾸를 할 수는 없었다. 이런 문제에 맞선 대학생 김보민·손선인씨는 쉽고 안전하게 휠꾸를 할 수 있도록 ‘휠크록스’라는 제품을 디자인했다. 신발과 휠체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는 그 마음이 ‘꾸미기’를 권리의 언어로 승격시켰다. 누구나 꾸미지 않아도 되지만, 원한다면 누구나 꾸밀 수도 있다는 권리의 확장이었다. 이제 ‘꾸미기’는 고정된 형식을 따르는 근대적 요구를 거부하고, 누구나 자신만의 시스템과 인프라를 만들 수 있다는 현대적 대안을 제시한다.

짧고 굵었던 ‘꾸미기’의 모험은 때론 뜨겁고 때론 가벼웠다. 그 입체적인 여정이 동시대의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한 단어에 담길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기대하게 했다. ‘꾸미기’가 꾸밀 또 다른 모험과 그 모험에 담길 우리의 새로운 이야기를. 아마 그 모험에서도 ‘꾸미기’는 또 주인공을 맡고 있을 것이다.

■정유라

[언어의 업데이트] '꾸밈노동'에서 '다꾸' '휠꾸'까지···진화하는 단어 ‘꾸미기’

2015년부터 빅데이터로 라이프스타일과 트렌드를 분석하는 일을 해오고 있다. <넥스트밸류>(공저), <말의 트렌드>(2022)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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