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잔에 1000원. 어려웠던 시절 주머니 가벼운 서민들의 애환을 달랬던 ‘잔술’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을 타고 ‘홈술’과 ‘혼술’이 유행한 가운데, 폭음과 폭탄주로 대변되는 음주문화가 희미해지고 ‘한 잔을 마셔도 가치 있는 술’을 마시려는 분위기가 확산되며 잔술은 애주가들의 일상에 자리 잡았다. 좋은 것을 적게, 취하지 않고 음미하며 마신다.
넘치지 않게 한 잔으로도 충분한 ‘잔술의 시대’가 열렸다.
잔술은 ‘무죄’…모든 식당서 허하라
이르면 이달부터 식당이나 술집에서 소주 등 모든 주류의 잔술 판매가 법적으로 가능해진다. 기획재정부가 최근 ‘주류 면허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하며 ‘주류를 술잔 등 빈 용기에 나누어 담아 판매하는 경우’, 즉 잔술 판매를 공식적으로 허용했기 때문이다.
외식 업장에서 와인과 막걸리, 위스키 등의 잔술이 흔히 판매돼온 것을 생각하면 어리둥절할 수 있지만 그간 생맥주와 칵테일을 제외한 잔술 판매는 불법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다. 주세법상 병이나 캔에 담아 출고된 술을 판매자가 임의로 가공·조작해 파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술을 잔으로 옮겨 판매하는 것도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잔술을 팔았다고 잡혀가거나 처벌이 이루어진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으나 잔술은 이제 완전한 ‘무죄’가 됐다.
왜 이런 법이 존재했던 것일까. 과거 식당들의 잔반 처리 문제나 양주에 이런저런 불법 첨가물을 넣어 판 ‘가짜 양주’가 사회문제로 떠들썩했던 시절이 있었으니, 이번 법률 개정은 달라진 시대에 맞춰 현실과 법리 간 괴리를 해소하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소주와 맥주를 병째 마시는 문화에서 위스키, 와인 등을 잔술로 즐기는 문화가 확산한 점도 배경이 됐다. 잔술 판매 허용이 주류시장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주류문화칼럼니스트인 명욱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교수는 “이미 다양한 주종의 잔술이 대중적으로 판매돼온 만큼 당장 큰 변화는 없을 것”이라면서도 “잔술을 어떻게 재밌게 즐길 수 있을지, 마케팅적인 측면에서 다양한 콘텐츠가 늘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1000원의 행복, 추억 담긴 서민들의 술
기성세대에게 잔술은 낯설지 않다. 가격이 싼 소주나 막걸리를 병이 아닌 잔 단위로 팔았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1960~1970년대 동네마다 있던 ‘점빵’에는 동네 술꾼들을 비롯해 일하다 잠시 목을 축이려는 이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곳은 서빙도 계산도 모두 셀프였다. 점빵 한쪽 쟁반 위에는 으레 소주병이나 막걸리 주전자가 놓여 있었는데, 가게 문을 열고 들어 온 손님들은 앉을 새도 없이 술잔에 소주나 막걸리를 가득 부어 단숨에 들이켠 후 동전 몇 개를 두고 다시 볼일을 보러 나갔다. 1980~1990년대 직장생활을 한 중년층이라면 왁자지껄한 포장마차에서 한 잔에 1000원이 넘지 않는 막걸리와 소주, 정종대포 잔술을 즐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고단한 퇴근길, 가볍게 주기(酒飢)를 달래기에 잔술만 한 것이 없었으니 서울 종로 낙원동 일대 고깃집과 선술집에서 직장인들이 선 채로 소주와 막걸리를 잔술로 마시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잔술은 파는 사람보다 마시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리는 술이었다. 시간도 주머니 사정도 넉넉지 못했던 시절, 풍족하게 술판을 벌일 처지가 되지 못했던 서민들은 잔술로 애환과 시름을 달랬다. 잔술은 주머니에 남은 잔돈을 기어이 술로 바꿔먹는 ‘찐’ 술꾼들의 술이기도 했다. 거나하게 취한 술꾼들은 마지막 ‘한 잔’을 외치며 잔술과 미련을 입안에 함께 털어 넣었다.
이처럼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잔술은 90년대 이후 대한민국이 경기 호황을 맞으며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동네에서 잔술을 팔던 구멍가게나 대폿집은 번듯한 주점이나 프랜차이즈 호프집으로 바뀌었고 포장마차에서도 잔술을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한 잔을 마셔도 가치 있게, 코로나 타고 수요 증가
잊혔던 잔술이 부활한 건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면서다. 회식과 술자리가 금지되며 ‘홈술’(집에서 마시는 술)과 ‘혼술’(혼자 마시는 술)이 새로운 음주문화로 자리 잡았다. 여기에 폭음하는 문화가 줄어들고 MZ세대를 중심으로 와인과 위스키 등 고가 주류를 잔술로 마시는 이들이 많아졌다.
소주와 맥주 위주이던 주종도 위스키, 와인, 전통주, 칵테일 등으로 다양화·고급화됐다. 특히 거실 한편 굳게 잠긴 수집장에서 고고한 자태를 뽐내던 ‘아빠의 술’ 위스키가 MZ세대의 술로 떠올랐다. 관세청 무역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위스키 수입량은 3만586t으로 전년 대비 13.1% 증가했는데 이는 사상 최대치다.
홍준의 한국주류수입협회 홍보고문은 “코로나19를 지나며 한국인들의 위스키 입맛도 다양해졌다”며 “예전엔 스카치(스코틀랜드산) 위스키를 주로 찾았는데 요즘에는 싱글몰트, 블렌디드, 지역별 다양한 위스키를 맛보려는 사람이 늘었다”고 전했다.
섞어 마시는 트렌드도 달라졌다. 소주 ‘알잔’이 기본으로 투여되는 ‘폭탄주’가 대세였다면 이제 취향에 맞게 술을 직접 섞고 만들어 즐기는 ‘믹솔로지(Mixology)’, 집에서 스스로 하이볼 등 칵테일을 만들어 먹는 ‘홈텐딩’(홈+바텐딩)이 보편화됐다.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8년 차 직장인 황우진씨(가명)는 입사 후 주 4회 이상 만취할 때까지 술을 마셔온 자칭 ‘주당’이었지만 코로나19 유행 이후 집에서 잔술을 즐기는 혼술족이 됐다. “집에서 혼자 마시다 보니 폭탄주보다 싱글몰트 위스키나 와인, 하이볼을 마시게 되더라고요. 요즘은 하이볼을 즐겨 마시는데 그날그날 컨디션과 기분에 맞게 만들어 먹을 수 있어 좋아요. 보통 한 잔을 넘기지 않는 편이에요.”
음주 패턴이 달라진 건 중년들도 마찬가지. 대기업에 다니는 50대 최하영씨(가명)는 요즘 서울 서촌과 한남동 일대 위스키 바를 돌며 ‘바 호핑’(바를 옮겨가며 한 잔씩 술을 맛보는 것) 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며 수많은 회식을 했지만 주로 폭탄주를 마시다 보니 술이 무슨 맛인지 몰랐어요. 맛있는 술이 정말 많더라고요. 예전만큼 폭음을 강제하는 분위기도 아니라 요즘은 팀 직원들과 위스키 바에서 각자 좋아하는 위스키나 와인 한 잔씩 마시며 회식을 하기도 해요.”
200만원짜리 와인, 수백종 전통주도 잔으로 즐긴다
잔술이 주목받으며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미식 공간도 생겨나고 있다. 지난해 말 서울 송파구 잠실에 문을 연 ‘클럽 코라빈’은 전 세계 500여종 와인을 글라스(잔)로 판다. 글라스 와인을 전문으로 다루는 곳 가운데 국내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최대 규모의 업장이다.
이곳에서는 캐주얼하게 즐길 수 있는 중저가 와인부터 ‘5대 샤또’로 일컬어지는 프랑스 보르도 그랑 크뤼 와인, ‘돔 페리뇽’ 등 유명 샴페인, ‘솔라이아’ 같은 이탈리아 슈퍼 터스컨까지 고가 와인도 잔으로 판매된다. 글라스당 가격은 최저 6000원에서 최고 25만원대. 보틀(병) 가격 10분의 1 수준이다. 살면서 한번 맛볼 수 있을까 싶은 수백만원 호가 와인을 잔으로 마실 수 있다니 호기심이 생긴다.
한번 열면 맛이 변하기 쉬운 와인을 글라스로 판매하면서도 대규모 와인 리스트를 유지·보유할 수 있는 건 코르크(병마개)를 뽑지 않고 와인을 추출할 수 있는 특수 와인보존장비 ‘코라빈’을 사용하기 때문. 코로나19 유행 시기 기록적인 성장세를 이룬 와인시장은 와인보존장비 도입으로 잔술 고객 흡수에 나서고 있다.
클럽 코라빈을 운영하는 아영FBC의 변원규 홍보팀장은 “국내 와인시장이 성숙기로 접어들며 자신의 취향에 맞는 중고가 와인을 찾는 분들이 늘어나는 추세”라면서 “잔술 판매 허용과 맞물려 다양한 와인 경험을 제공하는 글라스 와인 시장이 활발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양한 전통주를 잔으로 즐길 수 있는 ‘전통주 바’로도 새로운 경험을 찾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바 ‘작(酌)’은 50여종 전통주를 잔술로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한국식 증류주를 기반으로 다양한 위스키와 칵테일을 선보이며 전통술을 모던하게 풀어낸 것이 특징. 정보기술(IT) 업계에 종사하던 강병구 대표는 술 빚는 재미에 푹 빠져 2016년 국내 최초 전통주 잔술 바를 열었다.
당시만 해도 ‘전통주’ 하면 전통주점이나 토속적 느낌을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전통주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도자기 잔이 아닌 유리잔에 술을 담았다. “여기는 뭐 하는 집이에요?”하며 들어왔다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냐며 눌러앉아 단골이 된 손님들이 많다.
직장인들의 성지인 강남 역삼동에서 8년 가까이 잔술 바를 운영해온 강 대표는 최근 달라진 트렌드를 체감한다. 기존 30~40대 직장인 남성 손님이 대부분이었다면 팬데믹 이후 연령층이 낮아지고 여성 손님들이 많아졌다. “술을 소비하는 패턴이나 관심 분야가 전과는 달라졌어요. 요즘 오시는 손님들은 새로운 것에 거부감이 적고 호기심이 강해요. 바로 취하기보다 경험하기 위해 마시는 분들이 많고요.”
강 대표는 잔술의 유행이 전통주 시장의 저변을 넓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잔술로 접하는 전통주의 매력이 크다는 것.
“위스키, 코냑, 와인 등은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전통주는 주종과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보니 어떤 맛일지 상상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아요. 잔으로 마시면서 내가 어떤 스타일의 전통주를 좋아하는지 경험하고 취향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어요. 과일 베이스의 과실주부터 탁·약주, 소주, 위스키, 브랜디, 보드카 등 웬만한 주종이 다 있어요. 한 잔씩 잔술로 먼저 경험해보시길 권해요.”
고물가·불경기 시대, 가성비·프리미엄 동시 챙겨
잔술 유행의 배경에는 건강과 개인 시간을 우선시하는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술 소비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내내 세계 최상위권이었던 대한민국 술 소비량은 2010년대 중반 이후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 1인당 연간 주류 소비량은 1981년(14.2ℓ)과 비교해 2021년(7.7ℓ) 절반(45.7%) 가까이 줄었다.
음주문화 변화와 함께 ‘애주가’의 정의도 달라졌다. 명욱 교수는 예전에는 한 가지 술을 많이 마시는 게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여러 가지 술을 다양하게 맛보는 게 진정한 애주가의 모습으로 일컬어진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술을 맛본다는 것은 계속해서 경험을 쌓아간다는 거잖아요. 잔술은 MZ세대뿐 아니라 경험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딱 맞는 술이에요. 술을 마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기록하고 수많은 사람과 소통하는 문화도 잔술 유행에 영향을 줬다고 봐요.”
소주 한 병에 6000원이 넘는 고물가 시대, 잔술은 요즘 같은 불경기에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도 폼 나게 마실 수 있는 ‘가성비·프리미엄’을 즐기기에도 좋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인근, 막걸리 한 사발과 소주 한 컵을 1000원에 파는 노포 ‘부자촌’에서 만난 한 20대 커플은 “SNS에서 보고 찾아왔다. 비싼 술보다 맛있는 것 같다”며 가득 담긴 뽀얀 막걸리 한 사발을 조심스럽게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