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루도 노래가 되는 무등(無等)의 풍류

광주 | 글·사진 최병준 선임기자

‘놀 줄 아는’ 사람들의 도시 광주에서 놀다

전라도 광주? 적어도 두 가지를 기억해 두는 게 좋다. 하나는 예향이다. 거긴 풍류가 몸에 밴 동네다. ‘놀 줄 아는 것’을 꽤 중요하게 생각한다. 둘째는 5·18민주화운동이다. 광주 사람들의 피에 ‘끼’가 흐른다면, 뇌에는 5·18이 각인돼 있다. “그냥, 바람 쐬러 가는 건데 5·18?” 광주시청사는 의회동이 5층, 행정동이 18층으로 돼 있다. 5·18을 상징한다. 도심 한복판에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10년 공사 끝에 올해 문을 여는데, 5·18의 현장인 옛 전남도청을 허물지 않고 만들었다. 디자인, 규모 면에서도 광주의 랜드마크가 될 게 뻔하다. 5·18은 시공간을 초월해서 광주를 관통한다.

서석대에서 내려다본 무등산 줄기. 정상에는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주상절리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산세가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하다.

서석대에서 내려다본 무등산 줄기. 정상에는 용암이 굳어 만들어진 주상절리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산세가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하다.

■ 무등산: 푸근하다

무등산(1187m)을 먼저 찾았다. 광주의 명소가 어디냐고 물으면 광주시민 10명 중 예닐곱은 무등산을 꼽는다. 원효사에서 무등산에 올랐다. 들머리부터 눈이 많았다. 지난해 12월 한 달 동안 광주에 눈이 내린 날은 20일, 1월에는 12일까지 4일이나 됐다. 원래 남도땅은 기후는 포근해도 눈은 많이 내린다. 서석대까지 오르는 데 1시간30분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어렵지 않은 중급 코스다. 오후에 시작한 산행이라, 해지기 전까지 내려오려니 마음이 급했다. 서둘렀다.

산행 들머리에서 10여명의 30~50대 등산객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산행 후 식사는 뭐가 좋겄소?” “오리탕에 쇠고기를 좀 더 할까…” “오리탕에 떡갈비는…” 산행을 시작한 지 겨우 10분. 이 사람들, 벌써 뒤풀이 생각에 흥이 나 있다. 이들을 지나쳐 속도를 냈다. 5분 후 뒤에 있던 ‘오리탕 일행’의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목소리들이 힘차고 맑았다. 좋았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앞에 가던 여성들이 소리를 듣기 위해 걸음을 멈췄다. “창 하는 사람들인 모양인디, 소리 좀 하네.” 성주풀이에 진도아리랑이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산등을 타고 넘었다. 발걸음보다 노래가 늘 앞섰다. 놀 줄 아는 사람들이다. 한 사람이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노래를 받았다. 민요 가락이 등을 밀어줘 나 홀로 산행이 심심치 않았다. 전라도에서 ‘논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풍경과 사람이 따로 놀지 않는다. 산에 노래를 보태든, 그림을 그리든, 흥을 어깨에 얹어주는 것이 남도인들의 노는 법이다. 예술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다. 놀기의 연장선에 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삶을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다. 산행 에티켓이 아니라고? 물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막무가내 뽕짝’으로 인상 찌푸리는 것하고는 비교할 수 없다. 주말 산은 붐빈다. 2003년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전국팔도에서 사람들이 줄지어 산에 오른다. 원효사 주차장은 아침부터 ‘만차’였다. 관광버스와 승용차 갓길주차 꼬리가 1㎞는 훨씬 넘었다. 주말 산에 ‘고요’는 없다.

혼자 산길을 묵묵하게 가던 50줄의 여성에게 물었다. 무등산이 어디가 좋아요? 이름을 밝히기 싫다는 그는 “그냥 좋지라!”고 했다. 그가 대뜸 되묻는다. “아저씨는 안 좋소?”

어느 도시를 가든 큰 산이 그 동네의 얼굴 역할을 한다. 초·중·고 교가 가사에 산 이름 안 집어 넣으면 처벌하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부분 사람들은 학창시절 “OO산 정기 받고…”식의 교가를 부르며 큰다. 그만큼 한국인에게 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뜻일 터. 그런데 그중에서도 광주 시민들의 무등산 사랑은 유별난 편이다. 왜? 전라도 사람들은 지역차별 등 피해의식이 있다. 전라도의 중심 도시 광주 사람들은 답답했던 시절 “무등산은 알고 있다”고 말하곤 했다. “간첩들이 내려와 5·18무장봉기를 일으켰네” 등 소문들이 무성했을 때도 그랬다. “무등산은 알고 있다!”

엄혹했던 시절, 무등산이 곧 광주였고, 광주시민이었다. 5·18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6월2일, 광주일보는 김준태 시인의 시를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아아, 광주여 무등산이여/ 죽음과 죽음 사이에/ 피눈물을 흘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청춘의 도시여…”(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

산 이름은 그 산의 특성을 말해준다. 무등산(無等山)은 등급을 매길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높다는 뜻도 있지만, 평등하다는 의미도 있다. 산은 광주를 안을 정도로 거대하지만 막상 산줄기는 날카롭지 않고 둥글둥글하다. 푸근하다. 해서 서정주 시인은 ‘무등을 보며’에서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또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 / 목숨이 가다 가다 농울쳐 휘어드는/ 오후의 때가 오거든/ 내외(內外)들이여 그대들도/ 더러는 앉고/ 더러는 차라리 그 곁에 누워라’고 했다.

능선이 보이는 개활지가 나오면 산행의 80%는 한 셈이다. 여기서 서석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서석대는 주상절리다. 주상절리는 용암이 굳어져 생긴 6각형, 3각형 모양의 돌기둥이다. 제주도 주상절리는 바닷가에 있다. 그런데 무등산에는 특이하게도 산꼭대기에 주상절리가 있다. 산에 가면 팔도 사투리로 “좋다”는 얘기가 들린다.

산의 크기, 규모, 기암을 따진다면 무등산은 전국의 명산 앞줄에 끼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등산은 사람들을 안아주는 푸근함 같은 게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옛 도청사를 부수지 않고 만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5·18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마지막까지 저항한 옛 도청사를 부수지 않고 만든 국립아시아문화전당.

■ 아시아문화전당: 특이하다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특이했다. 정면에서 보면 옛 전남도청의 모습을 그대로 남겨뒀다. 바뀐 것은 별관 일부를 헐어내고 철골 트러스트 구조물을 세운 것 하나다. 여기가 입구다.

이 건축물의 가장 큰 특이한 점은 지하에 모든 시설을 갖췄다는 점이다. 설계자는 서울대, 컬럼비아대, 하버드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우규승씨다. 규모는 예상외로 크다. 지하 4층 규모로 13만㎡다. 국립중앙박물관보다 1.2배 크다. 지하인데 어둡지 않다. 곳곳에 빛을 끌어들이는 4각형 빛우물을 지상에 세웠다. 자연광을 그대로 살렸다. 단순히 도청사가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뛰어나서 광주의 상징물이 될 가능성이 높다. 내부는 문화정보원, 문화창조원, 예술극장, 민주평화교류원, 어린이문화원으로 나뉜다. 왜 문화전당에 아시아란 이름을 붙였을까.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가 식민지배를 받은 아픈 경험이 있고, 민주화를 위해 전진해온 역사가 있기 때문이란다.

문화전당을 놓고 끝없이 광주시민들 사이에서 논쟁이 있었다. “5·18의 상징인 옛 도청사를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 “아니다. 부수고 새로운 랜드마크를 만들자” 등등. 결국 희생자들을 보관했던 상무관, 전남도경, 도청 일부 등 6개 동을 보존키로 했다. 도청 별관 54m 중 24m만 부쉈다. 이곳의 고정식 극장 하나의 좌석은 518석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상징한다.

광주 시내 곳곳에 있는 예술가들이 만든 광주 폴리. 이 작품은 한국 작가 정세훈, 김세진의 ‘열린 장벽’이다.

광주 시내 곳곳에 있는 예술가들이 만든 광주 폴리. 이 작품은 한국 작가 정세훈, 김세진의 ‘열린 장벽’이다.

광주에서 또 다른 볼거리는 광주 폴리다. 폴리(folly)는 일종의 장식용 건물이다. 승효상 감독이 2011년 디자인 비엔날레 총감독을 할 당시 광주를 기억할 만한 작은 상징물들을 만들어보자는 뜻에서 기획됐다. 이후 세계적인 작가들이 디자인료, 설계료를 받지 않고 19개의 폴리를 만들어 광주 곳곳에 세웠다. 폴리를 보기 위해 건축학도들이 많이 찾아온다. 아시아문화전당은 앞으로 전시물 설치작업 등을 마친 뒤 여름에 개관한다. 내부는 볼 수 없어도 지상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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