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이 노동·복지 전문가 정승국을 찾아간 이유

박은하 기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지난 2019년 10월17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가운데 대검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김영민 기자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가 지난 2019년 10월17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증인으로 출석한 가운데 대검 대회의실에서 열리고 있다. /김영민 기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1일 만난 정승국 중앙승가대 교수는 유럽 복지제도와 노동시장 전문가이다. 대통령 자문 위원회나 시민단체 활동에도 참여하고 정부 용역 연구를 활발하게 수행하면서도, 진보진영의 주된 노동·복지 문제 접근 방식에 쓴소리도 해 왔다.

정 교수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대목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이다. 노동시장이 ‘소수의 보호받는 일자리’와 ‘다수의 불안정한 일자리’로 나뉘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구조를 불평등과 청년 일자리 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으로 인식한다. 그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으로 분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자본 뿐 아니라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 역시 이 구조를 굳혀가는데 가담해왔다”며 민주노총 등에서 채택하는 ‘자본 대 노동’의 관점으로 경제 문제를 해석하는 관점을 비판해왔다. 학계에서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인 소득주도성장의 한계를 적확하게 포착해내는 연구자라고도 평가받는다. 사실상 정치인 행보를 해온 윤 전 총장이 정 교수를 ‘첫번째 정책 과외교사’로 선택한 것이 주목받는 이유이다.

1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윤 전 총장은 정 교수를 만나기 전 정 교수로부터 기존에 그가 쓴 연구보고서 등을 보내달라고 요청한 뒤 1주일 가량 시간을 들여 공부한 뒤 정 교수를 만났다. 윤 전 총장의 친구로 이 자리에 동석한 이철우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날 기자와 통화하면서 “평소 정 교수의 페이스북 글 등을 인상 깊게 보고 있었다. 해외 사례도 다양하게 알고 있고 의미있는 정책 제언을 한다고 생각해 2주 전쯤 윤 전 총장에게 알려줬더니 이미 정승국이란 이름을 알고 있더라”고 말했다. 정 교수는 지난해 9월 열린민주당 유튜브 채널인 <열린민주당TV>에서 청년실업의 원인을 두고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과 대담을 벌였는데 윤 전 총장이 이를 보고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인맥 등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고 이 교수는 전했다.

윤 전 총장은 “유연안정성 모델에 관심이 있다. 더 공부해 보고 싶다”며 이 교수를 통해 정 교수에게 연구보고서를 공유해달라고 부탁했다. 유연안정성 모델은 시간제 근로나 이직, 재취업을 쉽게 해 노동시장의 활발한 이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되 직업교육 기회를 효과적으로 제공하거나 사회보장제도를 두텁게 만들어 불안정성을 보완하는 방식으로 덴마크와 네덜란드 등이 채택한 모델이다. 정 교수는 “유연안정성 모델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라는 현실 속에서 봐야 한다“며 지난 5일 보고서를 보냈고, 윤 전 총장은 닷새 후인 지난 10일 정 교수에게 만나자고 연락했다.

▶관련영상 : [열린민주당TV]한국 노동구조의 특성 : 분절화된 노동시장과 연공급

정 교수가 보낸 보고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의 의미와 국내 현실, 역대 정부의 해결 노력과 부작용, 한계점 등을 담았다. 정 교수는 “광화문에서 (윤 전 총장을) 만났을 때 보고서 곳곳에 형광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이 2017년 낸 보고서에 관심을 보였다. 구매력평가 기준으로 환산했을 때 500인 이상 대기업의 임금은 한국이 프랑스, 미국보다 높고, 대·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도 한국이 제일 크다는 내용이다. 노 연구위원은 양극화를 개선하려면 재벌의 나홀로 성장 전략과 대기업 노조의 임금 극대화 전략을 함께 포기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2018년 11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연 토론회에서도 발표된 내용이다. 당시 진보언론은 대·중소기업의 격차에, 보수언론은 고임금에 주목해 보도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윤 전 총장은 구매력 평가 기준으로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한국이 미국보다 높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 “왜 (임금 격차) 숫자가 오랫동안 이렇게 유지되는가?” 등 주로 보고서에 실린 수치와 그래프의 의미를 물었다. 윤 전 총장은 정 교수가 대안으로 주장하는 연공제 해소 등 임금체계 개편에 대해 들으면서 “동일노동이면 동일임금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묻기도 했다.

문재인 정권 초기 뜨거운 이슈였던 최저임금 인상 정책에 대해서도 오랜 이야기를 나눴다. 정 교수는 “최저임금 노동자 가운데 빈곤층은 30% 미만으로 나머지 70% 이상은 최저임금은 받지만 중산층 이상 가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어서, 최저임금만으로는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윤 전 총장은 “최저임금을 급격하게 올리면 지지가 떨어진다”는 의견을 말했다고 전해졌다.

▶관련기사① : 대기업 513만원 - 중소기업 323만원…20년 새 14.4%P 벌어진 임금 격차

▶관련기사② : “자영업 안전망 보완해 을 대 을 갈등 막아야”

정 교수가 윤 전 총장에게 전한 내용은 대부분 연구자들의 논문과 각종 토론회 등에서 다뤄졌던 내용이다. 근로장려금(EITC) 확대 등 일부 정책은 현 정부에서도 시행하고 있는 내용이다. 적어도 학계에서는 정책이나 문제인식 차원에서 새로운 내용은 아니라는 의미다. ‘답은 아는데 정치적 리더십 문제로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 성격이 더 강하다.

정 교수는 “윤 전 총장에게 ‘스무디드 듀얼라이제이션(smoothed dualization)’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의 완만하고 점진적인 해결’을 의미한다”며 “문제가 심각하다 하더라도 급진적으로 해결할 수 없고 전 세계적으로도 급진적으로 해결한 사례가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박근혜 정부도 2015년 노동개혁을 추진한다며 ‘노동5법’(근로기준법, 기간제근로자법, 파견근로자법, 고용보험법, 산재보험법) 개정을 추진하다가 이듬해 총선 패배로 이어졌다. 비정규직으로라도 활발하게 취업하도록 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 담겼지만 한 번 비정규직으로 출발하면 영원히 비정규직이 되는 구조에서 청년들의 반발이 심했다. 정부가 해직교사의 노조 가입을 불허하는 등 국제 기준에 맞지 않는 노동정책을 펼치는 상황에서 노동의 불안정성도 높아지는 개혁이라며 노동계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 과정을 본 문재인 정부는 연공급 개혁 등은 손도 대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반면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등 부문에서 개혁을 이끌어냈지만 막대하게 재정이 드는 직업훈련 체계 구축이나 사회안전망 확충에는 미진했기 때문에 노조의 동의를 못 이끌어낸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정 교수는 적정한 임금 인상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복지급여 수급율 확대, 근로장려금 확대 등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 교수는 “(정 교수가) 어떤 정책이 대안이라고 열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으며, ‘개혁은 쉬운 일이 아니라 정말 많은 설득을 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며 “윤 전 총장은 대체로 경청했다”고 전했다. 윤 전 총장은 이날 대화를 마치면서 종합적인 소감으로 “청년들이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취업, 결혼, 출산을 할 수 있겠느냐”며 “청년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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