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화합’ 앞세워 사면권 남용 반복…대통령 특사제도 손질해야

허진무 기자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왼쪽)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왼쪽)와 한명숙 전 국무총리.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국정농단으로 징역 22년을 선고받은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를 특별사면하고,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징역 2년을 복역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복권한 것에 대해 ‘사면권 남용’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대통령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원칙 없이 이뤄지는 사면이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사회 공동체의 기본 규범과 법치주의를 흔든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이 26일 법무부의 사면 내역 자료를 분석한 결과 한국 정부는 1987년 민주화 이후 44회에 걸쳐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반사면은 1996년 이후 실시된 적이 없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불완전한 입법이나 불공정한 재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권한이다. 사법권의 독립과 법치주의에 대한 예외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행사돼야 한다. 박근혜씨는 뇌물을, 한명숙 전 총리는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부패범죄자다. 문 대통령은 ‘부패범죄는 사면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어기고 사회적 논의도 생략한 채 지난 24일 사면을 전격 발표했다.

한국은 대통령의 사면권을 ‘고도의 정치적 결단에 의한 통치행위’로 간주해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다. 2007년 사면법을 개정해 법무부에 설치한 사면심사위원회가 유일한 제한 장치이지만 심사의 구속력이 없다. 특별 사면·복권의 대상이나 요건도 관한 규정도 없다. 역대 대통령은 ‘사회 통합’을 명분 삼아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정치인, 경제인, 공직자를 특별사면했다. 문 대통령도 박씨와 한 전 총리를 사면·복권하며 ‘국민 화합’이란 명분을 내세웠지만 부패범죄를 저지른 정치인의 사면·복권이 어떻게 국민을 화합하게 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사면권 남용을 막기 위해선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을 통해 사면심사위원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국회, 대법원, 헌법재판소 등이 추천한 위원으로 위원회를 구성해 외부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심의서와 회의록을 공개해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도 있다. 현재는 위원장인 법무부 장관이 위원을 임명·위촉하며 회의는 비공개로 진행된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사면 발표 일주일 전쯤 문 대통령으로부터 박씨의 사면과 한 전 총리의 복권 의견을 전해듣고 지난 21일 사면심사위원회에 안건으로 올려 위원들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사면 대상자를 일방적으로 선정하는 방식은 공정성에 의문을 품게 한다. 한국은 법무부가 요청하면 검찰총장이 전국 검찰청과 교정시설의 보고를 받아 사면을 신청한다. 해외 입법례를 참고해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수형자 본인이 사면을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사면 대상에서 범죄를 제한(부패범죄나 성폭력범죄 제외)하거나, 인물을 제한(대통령의 친인척이나 고위공직자 제외)하거나, 일정 형기를 채우도록 제한하는 방안도 있다.

사면권을 제한한 다른 국가였다면 박씨의 사면은 불가능했다. 미국은 사면 절차를 미국연방규칙(CFR)에 규정해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을 간접적으로 통제한다. 수형자 본인이 법무부 사면국에 사면을 신청할 수 있고, 결과도 통지받는다. 다만 유죄 선고를 받은 날부터 최소 5년이 지나야 사면을 신청할 수 있다. 사면국은 수형자를 심사할 때 해당 사건을 담당한 판사와 검사의 의견을 듣는다. 탄핵을 당한 공무원은 사면 대상에서 제외된다.

일본은 유기징역의 경우 형기의 3분의 1, 무기징역의 경우 10년이 지난 이후에야 사면 신청이 가능하다. 일본에서 사면을 심사하는 중앙갱생보호심사회는 정치적 중립을 위해 법무부 장관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위원을 임명한다. 프랑스는 부패범죄, 선거범죄, 테러범죄 등에 대해선 사면을 금지한다. 독일은 사면에 앞서 법원, 행형위원회, 보호관찰관 등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대통령이 사면권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국회의원은 사면의 실질적 수혜자여서 국회가 사면권 제한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며 “통제받지 않는 사면제도가 권력층에게 ‘불법을 저질러도 몇년 버티면 복권된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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