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뤄진 ‘자산 매각’…촉박한 ‘외교의 시간’

박용필 기자

대법, 강제동원 일 기업 배상 명령 ‘심리불속행’ 기간 내 결론 못 내

기각 땐 한·일 외교 갈등 우려…외교부 ‘의견서’ 제출이 영향 준 듯

일본 전범 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을 명령한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하기 위해 필요한 최종 결정을 미뤘다. 특별현금화 명령에 불복해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이 낸 재항고 사건을 심리 중인 대법원은 재항고를 ‘따져보지 않고’ 기각(심리불속행 기각)할 수 있는 마지막 날인 19일 결정을 내놓지 않았다.

외교부가 대법원에 ‘외교적 노력 중’이라며 사실상 결정을 보류해달라는 취지의 의견서를 보낸 것 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한국 정부는 대법원의 기각 결정 보류로 일본 전범 기업의 자산 현금화를 일단 피하고 일본과의 외교적 해결을 위한 시간을 벌게 됐다. 그러나 부정적인 국내 여론과 일본의 미온적 태도 등을 감안하면 전망이 낙관적이지는 않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미쓰비시중공업이 국내에 보유한 특허권 2건에 대해 내려진 특별현금화 명령에 불복해 낸 재항고 사건에 대해 이날까지 결정을 내리지 않았다. 이날은 ‘심리불속행 기각’이 가능한 마지막 날이다. ‘심리불속행 기각’이란 다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해 사안을 따져보지 않고 상고를 기각하는 결정으로, 재판기록이 전달된 이후 4개월 이내에 가능하다. 규정상 4개월의 기간이 지났기 때문에 대법원은 이제 사안을 따져보고 기각 또는 인용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 사건은 2012년 대법원이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사상 처음으로 인정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배상 청구권도 소멸했다고 본 하급심과 달리 개인의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본 것이다.

피해자들을 강제동원한 옛 일본제철의 채무는 그 후신인 신일철주금이 계승해야 한다는 판단도 내놨다. 이후 재상고심에서 전원합의체에 회부돼 2018년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확정됐다.

2012년 신일철주금 사건의 파기환송을 지켜본 양금덕 할머니와 김성주 할머니 등 5명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1·2심에서 모두 승소했고,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1억~1억5000만원씩을 배상하라는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미쓰비시 측은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원고들은 미쓰비시의 국내 특허권과 상표권에 대해 압류 신청을 했고, 2021년 대법원은 압류를 확정했다. 이를 바탕으로 양 할머니와 김 할머니는 5억여원 상당의 특허권과 상표권을 현금화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지난해 1심 법원이 매각 명령을 내렸지만 미쓰비시 측은 이에 불복해 항고했다. 지난 1월 항고가 기각되자 4월 대법원에 재항고했다.

김 할머니가 배상받을 수 있는 특허권 매각 명령에 대한 미쓰비시의 재항고는 이날이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 기한이었지만 재판부는 결정을 내놓지 않았다.

이 같은 결정 연기는 외교부가 지난달 26일 대법원에 제출한 의견서가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가 “강제 현금화 이전에 외교적인 해결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는 취지로 의견을 낸 상황에서 재판부가 이를 아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란 분석이다.

대법원이 심리불속행 기각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미쓰비시의 국내 자산이 강제매각되는데, 이는 한·일 간 외교적 마찰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Today`s HOT
UCLA 캠퍼스 쓰레기 치우는 인부들 호주 시드니 대학교 이-팔 맞불 시위 갱단 무법천지 아이티, 집 떠나는 주민들 폭우로 주민 대피령 내려진 텍사스주
불타는 해리포터 성 해리슨 튤립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