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1300억 판정 결정타는 ‘국정농단 판결’···법무부, 판정문 공개·대응계획은 아직

이혜리 기자

PCA 중재판정부 판단 살펴보니

문형표·홍완선 직권남용 유죄 판결

배상 책임 인정의 주요 근거로 인용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 정부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개입으로 손해를 입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에 1300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 중재판정부의 판단에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유죄 판결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23일 확인됐다. 판정이 나온 지 3일이 지났지만 법무부는 이날까지 판정문 전문과 향후 대응 계획을 명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낸 ‘투자자-국가간 분쟁 해결 절차(ISDS)’ 사건에 대한 중재판정부의 판정 내용 일부를 이날 공개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 20일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배상 원금 690억원과 이자·법률비용을 합쳐 130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당초 엘리엇이 청구한 7억7000만달러(9917억원)의 약 7% 수준이다.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당시 대통령 박근혜씨와 보건복지부 등의 압박으로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했고, 이 때문에 삼성물산 주주였던 자신들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한국 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주주로서 행한 순수한 상업적 행위이므로 국가의 ‘조치’로 볼 수 없다고 반박했다. 또 복지부 등의 압박과 별개로 국민연금 투자위원회가 중장기적 수익성을 고려해 독립적으로 심의·표결했고, 약 11%의 주식을 보유한 국민연금의 의결권만으로 합병이 의결됐다거나 그로 인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한국 정부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중재판정부는 복지부 등이 국민연금의 표결에 개입한 행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상 국가 책임의 근거가 되는 ‘조치’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또 국민연금은 사실상의 국가기관이므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한국 정부에 귀속된다고 봤다. 국민연금이 국민연금기금을 관리·운용하면서 한국 정부와 기능적·재정적으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고 삼성 합병 과정에서도 복지부 지침과 지시에 따라 행동한 점을 고려한 것이다.

중재판정부는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과 홍완선 전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의 삼성 합병 관련 직권남용 유죄 확정 판결을 배상 책임 인정의 주요 근거로 들었다. 두 사람은 각각 대법원에서 징역 2년6월을 확정받았다. 문 전 장관은 홍 전 본부장 등에게 삼성 합병에 찬성하라고 지시하는 등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를 받았다. 홍 전 본부장은 국민연금의 손해를 막기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음에도 복지부 지시에 따라 투자위원회 등에서 합병 찬성을 유도한 혐의를 받았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한동훈 법무부 장관. 연합뉴스

중재판정부는 유죄 판결에서 인정된 사실관계를 인용하며 한국 정부가 한·미 FTA상의 ‘최소기준 대우 의무’를 어겼다고 판단했다. 최소기준 대우 의무란 공정·공평한 대우와 충분한 보호·안전 등 국제관습법상 외국인에게 인정되는 대우를 말한다.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이 합병의 ‘캐스팅 보터’였다는 점에서 문 전 장관 등의 행위와 엘리엇의 손해 사이에 인과관계도 인정된다고 했다. 엘리엇 측 주장을 대부분 받아들인 것이다.

다만 중재판정부는 손해액 산정에서는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엘리엇 측은 ‘두 회사 합병이 부결됐다면 실현됐을 것으로 예상되는 삼성물산 주식의 내재가치’를 손해액 산정 기준으로 삼아달라고 했지만 중재판정부는 ‘삼성물산의 실제 주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한국 정부 주장을 받아들였다.

법무부는 이날까지 판정문 전문과 향후 대응 계획을 명확히 공개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국민 세금이 불필요하게 지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정부 대리 로펌 및 전문가들과 함께 판정 내용을 면밀히 분석해 대응하겠다”며 “국민의 알권리 보장과 절차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판정문 등 정보를 최대한 공개할 예정”이라고만 했다. 그러면서 관할 흠결, 절차의 심각한 일탈, 법리 오해 등을 이유로 법정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선고일로부터 28일 이내(7월19일까지)에 중재판정 취소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송기호 변호사는 “취소소송은 실익이 낮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 회장에 대한 구상권 행사 법리 검토를 우선해야 한다”며 “합리적 여론 형성을 위해 법무부가 판정문을 신속히 공개해야 한다”고 했다.

삼성 합병과 관련해 또다른 미국계 헤지펀드인 메이슨이 2018년 9월 한국 정부를 상대로 2억달러(약 2565억원)를 물어내라고 청구한 사건 등 5건의 ISDS 사건도 판정을 앞두고 있어 한국 정부가 부담해야 할 배상액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Today`s HOT
올림픽 앞둔 프랑스 노동절 시위 케냐 유명 사파리 관광지 폭우로 침수 경찰과 충돌한 이스탄불 노동절 집회 시위대 마드리드에서 열린 국제 노동자의 날 집회
미국 캘리포니아대에서 이·팔 맞불 시위 인도 카사라, 마른땅 위 우물
인도 스리 파르타샤 전차 축제 체감 50도, 필리핀 덮친 폭염
시위대 향해 페퍼 스프레이 뿌리는 경관들 토네이도로 쑥대밭된 오클라호마 마을 페루 버스 계곡 아래로 추락 불타는 해리포터 성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