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피해자에 ‘정조 수호’ 요구 부당”…구시대 관념에 제동

김희진 기자

‘강제추행’ 성립 요건 완화

범죄 판단 기준 ‘피해자 상태’서 ‘가해자 행위’로 이동
“기존 판례,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부정하는 결과 초래”
노정희 주심 “동의 부재도 헤아려야” 보충의견 내기도

<b>24일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마지막 전합 선고</b>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24일 퇴임하는 김명수 대법원장, 마지막 전합 선고 김명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21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아 있다. 한수빈 기자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21일 판결은 강제추행죄 판단 기준의 초점을 ‘피해자의 상태’에서 ‘가해자의 행위’로 옮겨놓았다는 데 의미가 있다. 법원은 앞으로 강제추행죄를 심리할 때 ‘피해자가 저항하기 곤란했는지’가 아니라 ‘가해자가 유형력을 행사(폭행)하거나 공포심을 일으킬 정도의 해악을 고지(협박)했는가’를 따져보게 된다. 대법원이 새 기준을 제시함에 따라 처벌 범위가 보다 명확해질 것으로 보인다.

■ 피해자의 사각지대 ‘항거 곤란’

피해자가 얼마나 저항해야 가해자의 죄가 인정될까. 이 질문은 지난 40년간 숱한 강제추행 사건에서 되풀이됐다. 법원은 다수 강제추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필사적 저항이 입증되지 않으면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누르기만 했다’ ‘몸 위에 올라타기만 했다’ ‘공포심을 주는 언행은 아니었다’고 했다.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제추행죄 구성 요건인 폭행과 협박을 매우 좁게 해석하는 ‘최협의설’은 40년 전인 1983년 대법원 판례에서 비롯됐다. 당시 대법원은 강제추행죄가 성립하려면 상대방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가해자의 유형력에 대한 저항 여부에 따라 피해자인지 아닌지 판단한 것이다.

최협의설은 처벌 공백을 만들었다. 피해자의 ‘항거 곤란’(저항하기 곤란함)에만 초점을 둔 탓에 권력관계 등 다른 요인으로 발생하는 성폭력 사건은 처벌의 사각지대에 놓였다. 전원합의체가 심리한 이번 사건의 피해자는 당시 15세 미성년자, 가해자는 성인 남성인 사촌이었다. 그런데도 원심은 이런 요인을 고려하지 않고 ‘저항이 곤란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없었다’고 봤다.

■ “기존 판례 ‘정조’ 관념 기반”

대법 “피해자에 ‘정조 수호’ 요구 부당”…구시대 관념에 제동

대법원은 이날 선고에서 “ ‘강제’의 사전적 의미는 ‘권력이나 위력으로 남의 자유의사를 억눌러 원치 않는 일을 억지로 시키는 것’으로서, 반드시 상대방의 항거가 곤란할 것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없다”며 “ ‘항거 곤란’을 요구하는 것은 피해자에게 정조를 수호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입장을 전제하고 있어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강제추행죄는 1995년 형법 개정 이전 ‘정조에 관한 죄’였다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보호법익으로 삼는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조 관념에 기반한 성적 자기결정권 개념의 해석·적용이 성범죄 재판에서 가해자의 처벌 범위를 축소한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법원이 피해자는 ‘정조’를 지키기 위해 가해자에게 강하게 저항해야 마땅하다고 전제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셈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항거 곤란’을 범죄 구성 요건에 포함하는 기존 판례는 폭행·협박의 정도가 일반적인 수준보다 더 높을 것을 요구하고, 피해자가 어떤 저항을 했는지 살펴보게 했다고 지적했다. 또 저항이 없었다는 이유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를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했다.

■ 시대에 발맞춰 변해온 판결들

대법원은 최근 판결에서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판례 변경 이유 중 하나로 들었다. 자칫 피해자에게 이른바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거나 2차 피해를 야기할 수 있어 이미 수사기관과 법원이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항거 곤란’이라는 기존 법리를 엄격히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기존 법리의 의미가 상당 부분 퇴색한 상황이라고 했다.

대법원 역시 기존 법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의 행위가 폭행죄에서 정한 폭행이나 협박죄에서 정한 협박 정도에 이르렀다면 사실상 상대방의 저항을 곤란하게 할 정도라고 해석하는 방향으로 옮겨왔다. 예컨대 혼인 외 성관계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해 추행한 경우, 종업원인 피해자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대표자와의 친분을 내세워 이른바 ‘러브샷’을 한 경우에 대해 강제추행죄 성립을 인정했다.

대법원은 이날 “해석 기준을 명확히 해 사실상 변화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재판 실무와 판례 법리 사이 불일치를 해소하고 혼란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떤 행위가 ‘폭행 또는 협박’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행위의 목적과 의도, 구체적 행위 태양과 내용, 행위의 경위와 행위 당시 정황, 행위자와 상대방의 관계 등을 종합해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 “피해자 ‘동의부재’ 헤아려야”

대법원은 이번 판결이 ‘비동의 추행죄’를 인정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강제추행죄 성립 여부를 현행 ‘폭행 또는 협박’ 대신 ‘상대방 동의 없이’ 등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자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동의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래전부터 제기돼왔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1월 비동의 강간죄 신설을 추진하겠다고 했다가 정부·여당이 반대하자 9시간 만에 번복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비동의 강간죄를 신설하는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은 국회에 계류돼 있다.

이번 사건의 주심을 맡은 노정희 대법관은 이날 보충의견에서 “성범죄를 규율하는 세계 주요 국가의 법률이나 판례법 등은 피해자의 ‘저항’을 요구하던 데에서 피해자의 ‘동의부재(결여)’를 본질적 기준으로 파악하는 것으로 전환하고 있다”며 “강간과 추행의 죄의 보호법익인 성적 자유나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본질이 피해자의 ‘동의부재’에 있다는 점은 현행법상 범죄 구성 요건인 ‘폭행 또는 협박’의 의미를 해석하는 데도 헤아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독일과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은 의사에 반하는 성적 침해행위를 처벌하되 폭행이나 협박이 개입된 경우 가중처벌하는 태도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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