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부채질하는 영재학교

강사가 말했다 “늦어도 중2까지 고교수학 마스터”···학원에서 무장한 영재들

김나연 기자
지난 9일 인천 송도에서 영재학교 입시전문학원의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김나연 기자

지난 9일 인천 송도에서 영재학교 입시전문학원의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김나연 기자

“어머님들, ‘나보다 공부 못했던 애가 영재학교 준비한다’는 원망 듣지 않으려면 중1 때 3학년 과정까지 마무리해주세요. 그게 막차예요.”

전국 8개 영재학교의 입학 전형이 한참 진행 중이던 지난 9일, 인천 송도에서 영재학교 입시전문학원 설명회가 열렸다. 강의실에는 학원에서 만든 입시전략서를 나눠 받은 학부모 300여명이 들어찼다. 설명회가 시작되자 화면에는 ‘2023학년도 영재학교 합격자 789명 중 (해당 학원) 301명’ ‘상위 3개 영재학교 중 (해당 학원) 출신 비율 49%’라는 내용이 떴다.

연단에 오른 강사는 “초등에서 연산 못 잡으면 ‘수포자’ 된다”는 말을 시작으로 고등 수학까지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그는 “늦어도 중2까지 (고등학교 교육과정인) 공통수학1, 2 마무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학부모들에게 ‘약속하자’는 손동작까지 보였다. 학원이 만든 학년별 로드맵이 화면에 뜰 때마다 학부모들은 이를 놓칠세라 사진을 찍고 받아 적었다. 이날 학원 원장이 가장 강조한 점은 “우리만 잘 따라주면 된다”는 것. 설명회가 끝나자 몇몇 학부모들은 이날 참석자에게만 무료로 제공되는 1만5000원 상당의 입학테스트 신청서를 제출했다.

영재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의존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 학생이 21일 서울 강남구 소재 영재교육 학원으로 등원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영재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의존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 학생이 21일 서울 강남구 소재 영재교육 학원으로 등원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영재학교는 재능이 뛰어난 ‘영재’의 잠재력을 길러내기 위해 영재교육진흥법에 따라 설립됐다. 정부는 올해 영재학교에 학교별로 최대 190억원(한국과학영재학교)까지 지원했다. 영재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투입하는 1인당 교육비는 인천영재학교 1057만원, 세종영재학교 1275만원 등이다. 일반고는 보통 300만원대를 넘지 않는다. 일부 영재학교는 대학 연구소에서 쓸 법한 고급 현미경 등 질 좋은 실험 장비와 학습 환경까지 갖췄다. 그러나 정작 영재학교에는 어릴 때부터 사교육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모인다. 입학생 절반가량이 특정 학원 출신일 정도다.

[사교육 부채질하는 영재학교]강사가 말했다 “늦어도 중2까지 고교수학 마스터”···학원에서 무장한 영재들

영재학교 입시도 카르텔?···학원·수도권 쏠림↑

2023학년도 대학입시에서는 전국 의대 정시모집 합격자의 절반이 서울 대치동의 한 대형입시학원을 거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됐다. 최상위권 대입처럼 영재학교 입시에서도 일부 대형학원이 다수의 합격자를 배출한다.

매년 전국 영재학교 신입생 절반가량을 배출하는 것으로 알려진 한 학원은 서울 대치동과 목동 등 서울 주요 학군지에 센터를 두고 수학·과학 선행학습부터 자기소개서와 추천서 준비 등을 도맡는다. 수험생들이 1단계 서류전형과 2단계 지필고사, 3단계 캠프 등으로 진행되는 영재학교 입시에 맞춤형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영재학교 입시는 창의적 문제해결력 등 ‘영재성’을 측정한다고 하지만, 실제 영재학교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학원이 뽑아준 예상문제를 통해 ‘영재성 평가’를 준비한다.

영재학교 진학을 목표로 한 학생과 학부모는 이를 ‘필수 코스’로 여긴다. 이날 설명회가 끝나고 만난 초등학교 4학년생 학부모 윤소희씨(37)는 “(영재학교를) 목표로 하는 애들은 다 여기 다닌다고 유명하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6학년생 자녀를 이 학원에 보내고 있는 한 학부모도 “큰애를 학원 없이 영재학교에 보냈더니 너무 고생시킨 것 같아서 둘째는 학원에 다니게 하고 있다”며 “학원 도움 없이 영재학교 가는 아이들은 소수”라고 말했다. 영재학교 진학을 준비하는 중3 학생 4명 중 1명은 사교육비로 매월 300만원 이상 지출한다는 통계도 있다.

[사교육 부채질하는 영재학교]강사가 말했다 “늦어도 중2까지 고교수학 마스터”···학원에서 무장한 영재들
[사교육 부채질하는 영재학교]강사가 말했다 “늦어도 중2까지 고교수학 마스터”···학원에서 무장한 영재들

영재학교는 전국 단위로 학생을 선발한다. 지방에 있는 영재학교에도 수도권 학생들이 몰린다. 강득구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영재학교 합격자(838명) 중 66.5%(557명)가 수도권 출신이었다.

입시 체계 없고, 정보 없고···기댈 곳은 학원뿐

사교육 의존을 줄이기 위해 2022년 입학전형 영향평가가 시행되기 전까지 영재학교의 기출문제, 면접문항 공개는 학교 재량에 달려 있었다. 입학전형 영향평가에서도 영재학교가 단순히 문제지만 공개하면서 실효성 지적이 나왔다. 문제 풀이법을 알려면 결국 학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과학영재학교처럼 경쟁률 자체를 비공개하는 사례도 있다.

이렇다 보니 학생과 학부모가 기댈 곳은 입시 정보가 축적된 사교육 시장뿐이다. 지난 9일 설명회에서 학원 원장은 “정형화된 시험 준비는 우리가 제일 잘하지 않을까”라며 전형이 채 끝나지도 않은 영재학교들의 올해 기출문제 정보를 공유했다. 학부모들은 화면에 기출문제가 나올 때마다 바삐 사진을 찍었다. 윤소희씨는 “설명회를 들으니 (학원에) 막 보내고 싶어지던데요”라며 “준비해주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고 말했다. 정미라 교육정책디자인연구소 부소장은 “일부 학원이 기출문제들을 다 분석해서 적중률을 상당히 높였는데, 이 학원에 다니지 않는 학생들은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접근조차 어렵다”라고 말했다.

영재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의존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 학생이 2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각자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영재학교 입시를 위한 사교육 의존 현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 학생이 21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에서 학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각자 학원으로 향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대학 수준 교육과정에 재학생도 학원으로···사교육 악순환 고리

영재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교육과정을 따라가기 위해 사교육의 도움을 받는 학생들이 많다. 초중등교육법이 적용되지 않는 영재학교는 교육과정을 자유롭게 편성할 수 있다. 학생들이 대학 수준의 과정을 따라가야 하는 경우도 많다. 대학 교재로 수업을 진행하거나 대학 학점을 미리 인정받을 수 있는 과목도 있다.

영재학교 1학년 재학생 이도현군(16)은 “수업을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학원이 (영재학교 내신) 시험 대비를 해주다 보니 친구들 대부분이 학원에 다닌다”고 말했다. 서울과학고 졸업생 A씨(25)는 “학교가 자체적으로 만든 교과서를 썼는데, 대부분이 대학교 1학년 때 교양으로 듣던 일반화학 같은 내용이었다”라며 “내용이 어렵다 보니 다시 학원에 다니는 친구들이 절반을 훨씬 넘었다”고 말했다.

시험에 합격하면 중학교 1~2학년도 영재학교에 바로 진학할 수 있다. 선행학습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다 뗀 뒤 영재학교에서는 대학 수준의 수업을 듣기도 한다. 지난 18일 서울과학고 내 학교폭력을 폭로한 백강현군(11)도 중학교 1힉년 재학 중 합격했다. 구본창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소장은 “(영재학교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건너뛰고 가르치기 때문에 (준비 과정에서) 고등학교 선행까지 해야 하고, 입학 지필고사 대비 선행도 필요하고, 영재학교 내신 대비 사교육도 하게 돼 악순환 고리”라고 말했다. 이어 “가장 잘못된 점은 마치 중학생들한테 대학 과정 가르치는 게 영재교육인 줄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사교육 부채질하는 영재학교]강사가 말했다 “늦어도 중2까지 고교수학 마스터”···학원에서 무장한 영재들

부적응 등의 이유로 영재학교를 그만두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 학교알리미와 종로학원에 따르면 올해(이하 공시 연도 기준) 7개 영재학교(한국과학영재학교 제외)에서 중도 이탈한 학생은 18명이었다. 2015년~2017년에는 한 자릿수였다가 최근 5년 사이 87명이 중도 이탈했다. 올해 중도 이탈 학생의 절반(9명)은 1학년이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수는 “사교육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고교체제”라면서 “사교육의 정점이자 명문대 패스트트랙이라고 볼 가능성이 높은 고교들에 대해서는 (정부가) 강한 규제를 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영재학교는 별도 법의 적용을 받고 있어서 많은 규제를 빠져나가고 있는데, 이런 학교들의 공공성을 어떻게 강화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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