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졸한 공평이 아니라 고결한 공정을 추구해야 한다. 여러분의 선배들은 입으로 번드레하게 공정을 말하지만 너무나 자주 실천하지 않는다.”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가 29일 제77회 서울대 학위수여식 축사에서 학생들에게 “불공정한 공평이 아닌 속 깊고 따뜻한 공정이 표준이 되는 세상”을 만들어가 달라고 당부했다.
최 교수는 자신의 대학시절 회고하며 “수업 빼먹기를 밥 먹듯 하며 대학 생활을 거의 허송세월했다. (유학을 하러 간) 미국 대학에서 화려하게 ‘학점 세탁’에 성공하며 그야말로 개과천선한 사람”이라고 했다. 또 “살다 보니 저 같은 사람에게도 (축사하는) 영광스러운 기회가 찾아온다”며 “인생 퍽 길다”고 했다.
생태학자이자 사회활동가인 최 교수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동강댐 계획 백지화를 호소하는 신문 기고문을 써 댐 건설이 마지막 순간에 극적으로 백지화된 것,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4대강 사업에 항거했던 것, 호주제 폐지 운동에서 과학자의 의견을 변론해 위헌 판정이 내려진 것, 제돌이 등 고래들을 제주바다로 돌려보낸 것’ 등을 열거했다.
그러면서 “왜 온갖 다양한 사회적 부름에 종종 제 목까지 내걸고 참여했을까를 스스로 물었을 때 ‘양심’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고 했다. 그는 “저는 사실 태생적으로 비겁한 사람이다. 우선 숨었다. 솔직히 다치고 싶지 않았다”며 “그러나 언제나 그놈의 얼어 죽을 양심 때문에 결국 나서고 말았다. 제 마음 깊숙한 곳에 아주 작지만 끝내 꺼지지 않는 촛불같은 그놈의 양심을 어쩌지 못해 늘 결국 일어서고 말았다”고 했다.
최 교수는 졸업을 앞둔 학생들에게 공정한 삶을 당부했다. 그는 “공정은 가진 자의 잣대로 재는 게 아니다. 가진 자들은 별 생각 없이 키 차이가 나는 사람들에게 똑같은 의자를 나눠주고 공정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그저 공평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키가 작은 이들에게는 더 높은 의자를 제공해야 비로소 공정”이라며 “공평이 양심이 만날 때 비로소 공정이 된다”고 했다.
최 교수는 “여러분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에서는 종종 무감각한, 때로는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밀어붙이는 불공정한 공평이 아니라, 속 깊고 따뜻한 공정이 우리 사회의 표준이 되기를 기대한다”며 “평생 관찰한 자연에도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더라. 부디 혼자만 잘살지 말고 모두 함께 잘 사는 세상을 이끌어달라”고 당부했다.
이날 오전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에서 개최된 서울대 후기학위수여식에서는 학사 978명, 석사 1200명, 박사 656명에게 학위가 수여됐다.
최 교수는 새로운 학문의 흐름인 통섭을 제기한 생태학자로 유명하다. 서울대 동물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생태학 석사 학위를,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4년 귀국해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하다 2006년부터 이화여대 석좌교수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