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주년 여성의날 : 공간의 공포 - 홀로 일하는 여성들

여성 가사도우미는 ‘그 집’이 두렵다

윤기은·김세훈 기자

① 가사 노동자

지난해 4월 23명의 가사도우미에게 수면유도제를 먹여 성추행한 40대 남성의 범죄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1월에는 ‘기부왕’으로 불리던 장학재단 이사장(99)이 가사도우미를 성추행한 혐의로 입건돼 경찰이 수사 중이다. 경향신문은 115번째 세계 여성의날(8일)을 맞아 가사노동자와 장애인활동지원사, 골프장 캐디 등 외부의 시선이 차단된 공간에서 홀로 일하는 여성 서비스업 노동자들의 성폭력 피해 실태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취재 결과 외부의 도움을 청할 수 없는 폐쇄된 공간은 가해자에게 무기로, 피해자에게 공포로 작용했다. 이들의 일은 서비스 이용자와 오랜 시간 머물거나 신체 접촉이 있는 것이었고, 서비스 이용자와의 관계는 대등하기보다 수직적이었다.

“ ‘성노예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회사에 컴플레인을 걸겠다. 일을 못하게 하겠다. 집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겠다.”

2020년 7월 한 남성은 가사노동자 A씨(48)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 청소 상태를 문제 삼으며 이같이 말했다. 계약서를 받아든 A씨는 경악했다. ‘지금부터 나는 죽을 때까지 시키는 대로 하며 몸과 육체를 바치며, 당신의 모든 명령을 절대 따르며 당신의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을 약속한다.’ 깜짝 놀란 A씨가 집 밖으로 나가려 하자 가해자는 손으로 A씨의 티셔츠를 잡아당기고 다리를 벽으로 밀쳤다. 가해자 부친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틈을 타 A씨는 집 밖으로 나갔지만, 가해자는 복도 계단까지 쫓아와 A씨를 막아섰다. 이 과정에서 A씨는 전치 2주의 허리뼈 염좌 상해를 입었다. 재판부는 “피해자는 범행 당시 상당한 충격과 공포심을 느낀 것으로 보이고,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서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A씨처럼 ‘남의 집’이라는 닫힌 공간에서 일하는 가사노동자들의 성폭력·성희롱 피해가 끊이지 않는다. 광주광역시가 지난해 가사노동자 67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사노동자 고용 및 노동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시각적, 언어적, 육체적 성희롱이나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한 사람이 14.9%에 달했다. 가사돌봄유니온 등이 지난 1월 발표한 ‘가사노동자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사례집’에서도 응답자 14.3%가 ‘성희롱당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내 육아 및 가사노동자는 10만7000명이고 99%가 여성이다(2022년 통계청 지역별 고용 조사).

꽉 막힌 일터 ‘남의 집’…성범죄에 맞설 수도 피할 수도 없었다

‘성폭력 사각지대’ 가사노동자

[제115주년 여성의날 : 공간의 공포 - 홀로 일하는 여성들] 여성 가사도우미는 ‘그 집’이 두렵다

7일 경향신문은 2018년 1월1일부터 2023년 2월28일까지 5년2개월간 선고된 가사노동자 성폭력 피해 사건 판결문 14건과 공판 기록 1건을 입수해 분석했다.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다. ‘도움 청할 데 없는 고립된 공간’ ‘가사노동자를 하대하는 태도’ ‘신체적·물리적 약자’라는 복합적인 요인이 맞물려 가사노동자들은 성범죄 피해에 내몰렸다.

도움 청할 수 없는 고립된 환경
냉장고 앞·안방·욕실·주방 등서
저항하지 못한 채 범죄 내몰려
자리를 피하려는 피해자들에
완력 센 가해자들 ‘2·3차 가해’도

“누가 죽어도 몰라”…‘나홀로’ 공포

도움을 청할 이도, 목격자가 될 만한 이도 없는 고립된 환경에서 일터는 ‘공포의 공간’이 됐다.

2018년 4월, 가사서비스를 신청한 한 남성은 주방에 있던 60대 가사노동자를 안방으로 끌고가 “누가 하나 죽어 나가도 몰라. 나무가 우거져서 안 들려”라며 피해자를 성폭행했다. 타인의 시선이 차단된 공간을 범죄에 이용하고 피해 여성의 저항을 꺾을 무기로 악용한 것이다.

가해자들은 자리를 피하는 피해자들을 쫓아 2차, 3차 가해를 이어갔다. 2017년 6월 세탁기를 쓰던 가사노동자 B씨(42)에게 벌거벗은 채 다가간 가해자는 “엉덩이 좀 만져보자, XX를 만져보자”며 피해자 엉덩이에 성기를 문질렀다. 집 안의 다른 장소로 도망간 B씨를 뒤따라간 가해자는 그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치마를 들추고 추행했다. 다시 세탁기 쪽으로 도망간 B씨를 끌어안고 가해자는 “입술 빨아보자. 얼마면 돼. 5만원이면 돼, 10만원이면 돼?”라며 또 추행했다.

한국가사노동자협회와 인천여성연대, 한국노총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26일 인천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사노동자 성추행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노총 제공

한국가사노동자협회와 인천여성연대, 한국노총 관계자들이 지난해 4월26일 인천지법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사노동자 성추행에 대한 강력한 처벌과 재발 방지 대책을 촉구하고 있다. 한국노총 제공

가해 남성들은 피해 여성보다 완력이 셌다. 피해 여성들은 물리적·신체적 위력에 저항하지 못하거나, 저항하더라도 크게 다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강간치상·강제추행으로 징역 3년형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C씨는 63세 가사노동자를 뒤에서 강하게 끌어안았다. 피해자는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고, 갈비뼈와 허리뼈를 다쳤다. 강간미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6개월형을 받은 또 다른 가해자는 청소를 마치고 귀가하던 47세 가사노동자를 강제로 침대에 눕히고 손과 다리로 피해자 팔과 다리를 누른 후 강간을 시도했다.

갖은 수모를 겪고도 ‘먹고살 길이 막막해서’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어서’ 피해 여성들은 남의 집을 떠나지 못했다. 경제적인 여유가 없는 고령 여성이 전문적인 기술이나 지식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52세 피해자 D씨는 법정에서 “천식을 앓고 있었고, 식당 운영이 안 돼 개인 파산을 한 상황에서 일을 알아보던 중 숙식이 제공되고 아무 기술 없이도 300만원이라는 월급을 받을 수 있어 좋았다. 피해를 보면서도 쉽게 그만두지 못했다”고 진술했다. D씨의 고용인이자 가해자는 대기업집단으로 분류된 기업의 총수였다.

순식간에 일어나는 강제추행
현장 녹음·녹화하기엔 ‘한계’
보호 책임 있는 중개업체·플랫폼
가해자 관리 규정 등 곳곳 구멍
“성폭력 예방교육 한번도 못 받아”

“한순간 일어나는 피해, 문제 제기 어려워”

가사노동자들은 이같은 피해를 겪고도 신고를 주저했다. 15년간 가사노동자로 일해온 김재순 전국가정관리사협회 회장은 “성추행·성희롱은 순식간에 일어나는데, 그 찰나를 녹음하거나 카메라로 녹화하기엔 한계가 있다”며 “이용자가 뒷목 근처에서 갑자기 말을 걸거나, 팬티 바람으로 있는 등의 상황에 부딪혔을 때 ‘이걸 문제 제기해도 되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자 산업재해 예방을 위한 사례집’에서 가사노동자들은 ‘몸을 훑는 시선’ ‘어깨에 손을 올릴 때’ ‘노래방 가자 할 때’와 같이 법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려운 피해도 당했다고 토로했다.

‘피해자 처신’을 문제 삼는 사회적 시선도 가사노동자들이 침묵을 택하는 이유 중 하나다. 판결문에서 한 피해 여성은 성추행 피해를 본 뒤 지인에게 보낸 문자에서 “자칫 ‘처신을 어떻게 했으면 그럴까’ (남들이) 생각할 수도 있어서 고민이 많아”라고 했다.

최영미 한국가사노동자협회 대표는 “나이가 많을수록 ‘남부끄럽다’며 피해 사실을 말 못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23명의 가사노동자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성추행한 ‘졸피뎀 사건’ 공판을 네 차례 찾아갔지만 23명 중 단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고 했다.

이들을 1차적으로 보호해야 할 중개업체·플랫폼 기업은 각종 매뉴얼과 규정을 구비하고 있지만, 곳곳에 구멍이 뚫려 있다. 업체마다 제각각인 성폭력 예방 교육, 사후 대응 매뉴얼, 가해자 관리 규정은 현실에서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빈번했다. 한 중개업체는 “성폭력 예방 교육을 하고, 근무 전 서비스 이용 신청자와 상담을 통해 근무환경을 파악한다”고 했다. 하지만 6년간 가사노동자로 일해온 E씨(58)는 “한 번도 중개업체에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고, 사후 대응 매뉴얼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다른 가사노동자 플랫폼 업체 관계자는 “서비스 제공자는 범죄 조회를 하지만 이용자는 하지 않는다”며 “성폭력 가해자에게는 강제 이용 정지를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약관에 있지만,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다른 업체와 ‘블랙리스트’를 공유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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