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봉투’로 품어라, 노동자들의 생명을

김지환 기자

[주간경향] 하이트진로의 100% 자회사인 수양물류 소속 화물 노동자들은 지난 3월 노동조합(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을 만들었다. 기름값은 폭등하는데 운송료는 15년째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화물 노동자들이 지난 6월 2일부터 운송료 30% 인상을 요구하며 전면 파업에 돌입하자 사측은 손해배상·가압류 카드를 꺼내들었다. 손해배상 청구 액수는 무려 27억8000만원에 달했다.

박수동 하이트진로지부장은 지난 9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에 참석해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렸다. “파업 돌입 후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해고와 손배 청구가 진행됐고, 화물 노동자로서는 평생 만져볼 수도 없는 수십억원의 손배는 정말 절망 그 자체였다. 생계를 이어가는 유일한 수단인 화물차가 가압류됐을 때 눈앞이 캄캄했다. 파업 기간 내내 집을 떠나 있는 와중에도 집으로 송달된 손배·가압류 청구는 화물 노동자와 가족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와 압박으로 다가왔다.”

하이트진로지부는 지난 8월 16일 손배·가압류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 점거농성에 돌입했다. 농성 24일 만인 지난 9월 9일 노사는 운송료 5% 인상, 휴일 운송단가 150% 적용, 손배·가압류 취하 등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번엔 손배·가압류 취하가 이뤄졌지만 화물 노동자들은 앞으로 파업을 고려할 때마다 손배·가압류 가능성 때문에 위축될 수밖에 없다.

대우조선해양은 지난 8월 26일 김형수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장을 포함해 노조 간부 5명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소장에는 지난 6월 2일부터 51일간 이어진 하청노조의 파업으로 470억원의 손해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김형수 지회장은 “흔히들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470억원의 손배·가압류는 우리 노동자들에겐 죽으라고 하는 메시지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9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9월 14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 출범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확인된 손배액만 3160억원

시민단체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는 지난 6월 30일 지난해 4월부터 1년가량 수집한 소송기록 분석결과를 공개했다. 1989년부터 올해 5월까지 소송 중 기록이 확보된 197건(손해배상 185건·가압류 신청 12건)의 청구금액만 약 3160억원에 달한다. 손잡고는 “이 청구금액이 그대로 확정되진 않는다 해도, 이 숫자는 한 사람의 노동자에게 커다란 위협이자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운 것은 이 소송이 멈추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현장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밝혔다.

손배·가압류는 노조 무력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한다. 삼성그룹이 작성한 ‘2012년 S그룹 노사전략’ 문건이 대표적 사례다. 문건에는 “고액의 손해배상 및 가처분 신청 등을 통해 경제적 압박을 가중시켜 활동을 차단하고 식물노조로 만든 뒤 노조 해산 유도”라는 문구가 담겨 있다. 자동차 부품업체 유성기업에 금속노조 와해 전략을 자문했던 노무법인 창조컨설팅이 2011년 작성한 ‘유성노조(기업노조) 가입확대 전략’ 문건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징계 책임을 묻는 징계절차의 진행과 동시에 수천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되면 소송의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보는 일반 조합원들의 압박감이 더욱 커질 것으로 판단된다.”

회사는 손배·가압류 취하를 조건으로 희망퇴직, 노조 탈퇴 등을 요구하기도 한다. 손잡고가 분석한 197건 중 소 취하로 마무리된 35건을 회사 요구조건별로 살펴보면 희망퇴직이 11건, 노조 탈퇴가 5건,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포기가 17건, 기타(반성문 작성 등)가 2건이었다. 손잡고 법제도개선위원인 하태승 변호사(민주노총 법률원)는 “노조 탈퇴를 조건으로 한 소 취하 제안은 사실상 부당노동행위에 가깝다”고 설명했다.

최근 노동자들의 손발을 묶고 노조 와해 수단으로 악용되는 손배·가압류 남용을 막기 위해 노란봉투법(노조법 개정안)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이 노란봉투법을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8월 18일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고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공공운수노조 화물연대본부 하이트진로지부 조합원들이 지난 8월 18일 서울 청담동 하이트진로 본사 옥상에 대형 현수막을 설치하고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노동자 ‘방패’ 녹여버린 법원

헌법 제33조는 노동자의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을 보장한다. 헌법에 따라 파업을 벌이는 노동자들에게 ‘방패’를 제공하는 내용을 담은 그릇은 노조법이다. 노조법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는 “사용자는 이 법에 의한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로 인해 손해를 입은 경우에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에 대해 그 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른바 민사 면책조항이다.

노동자들은 모든 쟁의행위 때마다 이 방패를 활용해 손해배상 청구를 막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법원으로부터 정당하다는 평가를 받은 쟁의행위, 다시 말해 ‘합법파업’인 경우에만 면책이 되기 때문이다. 1994년 대법원 판결은 면책 기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민사상 그 배상책임이 면제되는 손해는 정당한 쟁의행위로 인한 손해에 국한된다고 풀이해야 할 것이고, 정당성이 없는 쟁의행위는 불법행위를 구성하고 이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은 사용자는 노동조합이나 노동자에 대하여 그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조경배 순천향대 법학과 교수는 2018년 ‘노동 3권을 제한하는 소송남용에 대한 대책 토론회’에서 “(대법원은) 노조법엔 없는 정당성 요건을 면책의 근거로 제시했다. 따라서 쟁의행위의 정당성 여부가 면책의 요건이 되고, 정당성이 없으면 곧바로 불법행위가 된다는 논리”라고 짚었다.

정당하지 않은 쟁의행위는 면책되지 않기 때문에 ‘쟁의행위의 정당성 요건이 무엇인가’가 중요한 쟁점이 된다. 대법원이 이 요건을 명시적으로 제시한 것은 2011년 한국철도공사 파업 사건 선고 때였다. “정당한 쟁의행위라고 하기 위해서는 우선 주체가 단체교섭의 주체로 될 수 있는 자이어야 하고, 또 단체교섭과 관련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등을 목적으로 하는 것으로서 목적이 정당해야 하며, 시기와 절차가 법령의 규정에 따른 것으로서 정당해야 할 뿐 아니라 방법과 태양이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수반하는 등 반사회성을 띤 행위가 아닌 정당한 범위 내의 것이어야 한다.”

문제는 이 대법원 판결이 암묵적으로 쟁의행위를 위법행위로 전제한다는 점이다. 쟁의행위 자체를 위법한 것으로 간주한 뒤 주체·목적·시기·절차·방법 등 정당성 요건이 모두 충족될 경우에만 면책하는 논리 구조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폭행해도 정당행위, 정당방위, 피해자의 승낙 등의 사유가 있으면 위법성이 없어진다는 형법 해석론과 유사하다. 이 같은 논리 구조는 합법파업의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만들어 폭력·파괴행위가 없는 단순 노무 제공 거부도 불법파업이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노동자의 방패를 법원 판례가 축소해버린 셈이다. “적법한 쟁의행위를 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2009년 파업으로 경찰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지난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 취하를 촉구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2009년 파업으로 경찰로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지난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 취하를 촉구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정공법은 합법파업 범위 확장

법원 판례가 전향적으로 바뀌길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이 문제를 입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바로 노란봉투법이다. 현재 국회에 발의된 8건의 노조법 개정안이 중점적으로 손질하려는 조항은 제2조(정의)와 제3조(손해배상 청구의 제한)다.

제2조를 개정하려는 이유는 합법파업의 범위를 확대하기 위함이다. 노동권 사각지대에 있는 특수고용직을 노동자 범위에 포함시키고, 하청노동자의 근로조건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원청을 근로계약 체결 당사자가 아니라 해도 사용자 범위에 포함시키는 것이 하나의 축이다. 특히 사용자 범위를 확장하는 것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파업 이후 더 주목받고 있는 내용이다.

또 다른 축은 노동쟁의 개념을 넓혀 정당하다고 인정될 수 있는 쟁의행위를 다양화하는 것이다. 현재 노동쟁의 개념은 ‘임금·근로시간·복지 등 근로조건의 결정에 관한 노사 간 주장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분쟁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정리해고나 민영화 반대 파업은 근로조건의 결정에 해당하지 않아 불법파업이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노조법 개정안 중 일부는 노동쟁의 개념에 근로조건뿐 아니라 ‘노동관계 당사자 사이의 주장 불일치로 인한 분쟁’도 추가했다.

제3조를 개정하려는 이유는 민사 면책 범위를 확대하기 위함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수많은 쟁의행위를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수 있는, ‘이 법에 의한’이란 문구를 삭제해 법원이 쟁의행위 합법성 범위를 넓히는 해석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1953년 노조법을 처음 제정할 때 손해배상 청구 제한 조항엔 ‘이 법에 의한’이란 문구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 5·16 군사쿠데타 2년 뒤인 1963년 노조법 개정을 통해 해당 문구를 삽입했다. 민주화 이후 삭제됐어야 할 규정이 현재까지 유지돼 노동 3권의 실질적 보장을 막고 있다는 게 노동계 입장이다.

다만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제외하곤 쟁의행위가 합법이든 아니든 원칙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도록 하는 방식으로 제3조를 손질할 경우 위헌 시비에 휘말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프랑스에서 1982년 쟁의 관련 당사자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을 원칙적으로 제한하는 입법이 이뤄졌지만 위헌 판정을 받았다. 이 때문에 대통령실, 국민의힘, 한국경영자총협회(경총) 등도 프랑스 사례를 지속적으로 거론하고 있다.

손해배상 청구의 원칙적 제한이 쉽지 않다면 합법적 쟁의행위를 넓히는 ‘정공법’을 택할 필요가 있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부 교수의 말이다. “‘불법파업’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불법파업이라도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해야 한다라는 방식을 고집할 경우 국회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파업의 정당성을 확장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물론 손해배상액을 산정할 때 감정인의 감정을 거치도록 하거나 위법행위와 손해 간 인과관계 증명을 엄격하게 하고, 노조와 개별 조합원의 배상책임을 개별화해 연대책임을 제한하는 입법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 사용자가 소송제도를 남용하는 걸 금지하는 규정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조경배 교수도 폭력·파괴 행위를 제외한 모든 쟁의행위의 배상 책임을 부정하는 것과는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파업이 정상적으로 이뤄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통상의 손해에 대해선 배상 책임을 인정해선 안 되고, 비정상적인 파업수단을 사용한 경우로 손해 범위를 한정해야 한다. 또 쟁의 참가자의 구체적인 위법 행동이나 파업권의 남용으로 인한 손해에 대해서만 배상을 인정해야 한다.”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가 지난 9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노란봉투법을 비판하는 국민의힘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문재원 기자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가 지난 9월 21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 앞에서 노란봉투법을 비판하는 국민의힘에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문재원 기자

노란봉투법, 이번엔 통과될까

노란봉투법은 19대와 20대 국회 때도 발의됐지만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문턱도 넘지 못한 채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선 현재 8건의 노란봉투법이 발의돼 있을 정도로 관심이 커지면서 이번 정기국회 쟁점 법안으로 떠올랐다.

김성환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지난 9월 20일 기자간담회에서 “정기국회 22대 민생 입법 과제 중 7개 법안을 좀더 중점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7개 법안에는 노란봉투법이 포함돼 있다. 김 정책위의장은 “과대한 손배소를 적정 수준에서 하자는 큰 틀의 취지는 전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소위 불법 노동쟁의까지 보호하는 법률이 돼서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정의당은 지난 9월 15일 노란봉투법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이은주 정의당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을 제외한 모든 정당 의원이 노란봉투법을 공동 발의했다. 그만큼 노조법 2·3조 개정이 시급하다고 다들 인정하는 것이다. 올겨울 꼭 이 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93개 시민사회단체·노조와 정의당·진보당·노동당·녹색당 등 4개 정당이 참여하고 있는 ‘노조법 2·3조 개정 운동본부’는 노란봉투법에 동의하는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대중 캠페인을 전개할 계획이다.

국민의힘이 노란봉투법을 총력을 다해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어 국회 통과가 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민의힘에선 노란봉투법을 두고 “포퓰리즘”(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황건적 보호법”(권성동 전 원내대표), “민주노총 방탄법”(성일종 정책위의장) 등의 반응을 내놓고 있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 이야기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2009년 이후 13년 동안 손해배상 소송 ‘피고’로 고통을 겪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 채희국씨는 지난 8월 30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앞에서 열린 소 취하 촉구 기자회견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의 말을 빌리겠다”며 이같이 말했다. “해고로 한 번 죽였으면 됐지 손배·가압류로 한 번 더 죽이진 말라.” 21대 국회는 이 노동자의 간절한 호소에 응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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