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포럼

기고 - 철저하게 희생당하고 있는 돌봄노동자들, 그것도 자본주의에

김은희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소장
김은희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소장

김은희 에코페미니즘연구센터 달과나무 소장

지난 4월 동료들과 경북 상주로 ‘농활(농촌봉사활동)’을 갔다. 상주 봉강공동체는 여성 농민 주도로 언니네텃밭을 꾸리고 농생태학에 터잡아 유기농사를 짓는다. 첫날 어설픈 손놀림으로 모판 만들기를 거들었다. 몇 년 전만 해도 모판에서 볍씨들이 자라는 데 걱정이 없었지만, 심해진 일교차로 냉해를 방지하려면 이제 비닐 멀칭을 씌워야 한단다. 농촌은 이미 기후위기로 인한 일상적 재난을 최일선에서 경험하고 있다. 이튿날에는 보리가 뿌려진 생강밭에 씨생강을 심었다. 보리와 생강이 한 밭에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면서 자라도록 하는 농법이다. 더 많은 수확량을 추구하는 생산주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땅과 보리, 생강 등 각기 다른 생물종의 삶의 주기를 고려해 보살피는 일종의 ‘다종 돌봄’인지도 모르겠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 잠시 들러본 언니네텃밭 한쪽에는 토종 종자 보관함이 있었다. 뚜껑에 “저 집 호박이 실하면 거기서 호박씨 받아다 심고 우리 집 콩이 잘되면 내 씨앗 갖다주지. 옛날부터 씨앗은 서로 나눠 갖는 거야”라고 적혀 있었다. 철저하게 시장의 원리가 적용되는 자본주의 사회에 예외는 없는 것 같지만, 지구행성을 돌보면서 대문자 자본주의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비자본주의적 실천이 존재하고 있었다.

라즈 파텔을 처음 접한 것은 <먹거리 반란>(2011)이었는데, 지속 가능성을 핵심에 두고 생태농업을 강조한 그의 주장은 에코페미니즘 관점에서도 낯설지 않다. 제이슨 W 무어와 함께 쓴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2020)에서 파텔과 무어는 이 시대를 인류세보다 자본세로 불러야 한다는 관점을 통해 인간·자연의 이분법을 거부하는 관점을 제시했다. 특히 자연·돈·노동·돌봄·식량·에너지·생명 7가지를 값싸게 후려쳐온 것이 자본주의의 오랜 전략이었다고 강조한다. 7가지는 서로 연결돼 있으며, 기후위기와 극단적 불평등, 금융불안과 같은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가 감춰온 비용에 대해 값을 치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개별적 해법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로운 논의는 아니다. 일찍이 에코페미니즘 연구자이자 활동가인 마리아 미즈(1931~2023)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와 결탁해 여성과 자연과 식민지를 수탈하는 것에 기초해왔음을 밝히고, 이를 넘어서기 위한 생존의 방안으로 ‘자급(subsistence)’ 관점을 제시했다. 자급은 개별적인 ‘자급자족’이 아니라 상호의존적 관계와 돌봄을 강조하는 생존의 정치경제학 관점으로 욕망과 필요를 구분하면서 필요의 원칙을 강조한다.

코로나19를 경험하는 과정에서 감춰져왔던 ‘돌봄 위기’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뒤늦게 ‘필수노동자’에 주목하는 듯했지만 얼마나 달라지고 있는지 되묻게 된다. 대표적 필수노동자로 여성화·고령화가 뚜렷한 돌봄노동자들이 노동의 정당한 대가로 제값을 받고 있는지 또 노동조건은 얼마나 달라졌는지 말이다.

기후위기로 극지방의 빙하만 녹아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 자체가 녹아내리고 있고, 세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현장과 이론가들이 ‘돌봄 중심 전환’을 제안하고 있다. 돌봄 중심 전환은 돌봄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봄’을 세계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원칙으로 삼고, 존재의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이 약점이 되지 않는 관계를 만들고, 사회의 돌봄 역량을 키우는 것을 말한다. 더 이상 저렴한 값에 돌봄을 외부화하겠다는 방식은 불가능하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안타깝게도 지난달 15일 마리아 미즈가 세상을 떠났다. 미즈가 밝혀온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수탈 체제에 관한 정치적이고 지적인 작업이 지금 여기에서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살리고 나아가 지구행성을 돌볼 필요성으로 환기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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