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이’, 잠재적 가해의 가능성을 살아내는 여성들의 이야기

칼럼니스트 위근우

의심과 확신

당신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든

범죄에 노출된 현실은 변함없다

경찰 출신 보험조사관 구경이(이영애)가 연쇄살인범 K이자 죽은 남편의 제자였던 송이경(김혜준)을 쫓는 JTBC 드라마 <구경이>.

경찰 출신 보험조사관 구경이(이영애)가 연쇄살인범 K이자 죽은 남편의 제자였던 송이경(김혜준)을 쫓는 JTBC 드라마 <구경이>.

구경이의 세계는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 누구든 잠재적 가해자일 수 있다는 의심. 송이경의 세계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다. 가해자를 골라낼 수 있다는 확신. 경이는 자신의 의심을 의심하면서 혼돈 속을 더듬으며 괴로워하지만, 이경에겐 모든 것이 쉽고 우습다. 경찰 출신 보험조사관 구경이(이영애)가 연쇄살인범 K이자 죽은 남편의 제자였던 송이경(김혜준)을 쫓는 JTBC 드라마 <구경이>는 경이, 이경이란 두 인물의 이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서로 닮되 대립하는 거울 이미지 구도를 만든다.

구경이의 남편 장성우(최영준)가 말했듯 둘은 닮았다. 참치 캔에 기름 대신 부동액을 따라 고양이를 죽인 범인을 추리할 때 이경의 활달한 표정은 미래의 연쇄살인마보다는 차라리 <여고추리반> 멤버에 가깝다. 마찬가지로 들키지 않을 살인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이경의 질문에 이후 K의 활동 지침이 될 주요 원칙들을 가설로 제시하는 구경이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섬뜩함을 느끼지 않기란 어렵다. 불법촬영 가해자를 죽이기 위해 섞였을 때만 독성이 생기는 각각의 약물을 몇 겹의 과정을 통해 주입하는 작전을 성공시킬 정도로 이경의 두뇌는 범상치 않고, 우연처럼 보이는 각각의 과정에서 이경의 ‘빅픽처’를 재구성하는 구경이의 추리력도 천재적이다.

경이와 이경, 이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서로 닮되 대립하는 거울 이미지 구도
경이의 의심으로 가득한 세계, 이경은 확신으로 가득한 세계
하지만 이들을 구분하기 위해 드라마는 정의감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둘을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한 가지다. 구경이는 이경에게 들키지 않고 살인하려면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만 그는 절대 배신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경은 누군가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을 죽여주는 대가로 그를 다음 살인의 장기짝으로 사용하면 배신당하지 않을 거라 믿는다. 즉 구경이는 타인을 통제할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이 차이 하나로 구경이는 의심으로 가득한, 이경은 확신으로 가득한 세계를 산다.

구경이의 의심은 종종 병적이지만 불가해한 것은 아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이 여성으로 구성된 이 드라마에서 K에게 살해당하는 악질적 인간 다수가 현실의 기사에서 숱하게 볼 수 있는 여성 착취 범죄자인 게 우연일 수는 없다.

실제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이 담긴 <구경이>의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는 백 가지가 넘는다. 제자 사망 연루와 그루밍 성범죄 가능성에 대한 의심을 품고 남편을 직접 취조했던 구경이라면 가짓수가 더 많을 것이다. 언니를 찾을 수 있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는 어린 여자아이조차 의심하는 이 의심의 대가에게, 상시적으로 잠재적 가해를 의심하고 대비하는 건 횡단보도를 건너기 전 좌우를 한 번 더 살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일이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누구든 거짓말을 할 수 있고, 모두가 가해자는 아니지만 누구든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잠재적 가해’라는 표현에 유독 민감한 일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이것은 가해자라는 확정이 아닌 불확정에 가깝다.

구경이가 비범한 것은 다른 사람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의심의 불확정성을 고스란히 감내하기 때문이다. 그는 남편을 의심했고, 또한 남편의 자살이 자신의 잘못된 의심 때문 아닐까 의심하며, 또한 자신의 의심이 옳았기에 자살한 건 아닌지 의심한다. 모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그의 삶은 무거울 수밖에 없다.

JTBC 드라마 <구경이>는 경이, 이경이란 두 인물의 이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서로 닮되 대립하는 거울 이미지 구도를 만든다.

JTBC 드라마 <구경이>는 경이, 이경이란 두 인물의 이름에서부터 노골적으로 서로 닮되 대립하는 거울 이미지 구도를 만든다.

이러한 주인공의 태도가 스스로 부여한 윤리적 기준인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탐정 주인공과 그 맞수를 구분하기 위해 정의감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물론 구경이는 같이 게임을 하던 유저의 채팅에서 자살 징후를 읽어내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뛰어가는 사람이다. 연쇄살인을 벌이면서도 태연자약하고 자신을 두려워하는 동창의 심기를 눈치채지 못하는 이경은 타인을 연민하는 능력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의심이 폭발할 때의 구경이는 오랜 후배이자 현재 자신의 팀장인 나제희(곽선영)가 모욕감을 느낄 정도로 압박하는 데 거리낌이 없고, 이경은 K로서 적어도 누군가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준 가해자들만 살인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도덕적 감정의 정도 차이인가, 정의에 대한 기준의 차이인가. <구경이>는 이 부분을 모호하게 비워둔다.

연쇄살인마만 골라 죽이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인 미국 드라마 <덱스터>의 주인공 덱스터가 자신의 살인 본능을 통제하기 위해 도덕적 기준을 세웠다면, 이경의 사적 징벌이 어긋난 도덕 감정 때문인지 완전 범죄를 위해서인지 드라마는 적어도 아직까진(6회 방영 기준) 제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대신 구경이는 죽이고 싶을 만큼 나쁜 놈을 실제로 죽이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두 가지라 말한다. “멍청함과 오만함.” 의심으로 가득한 구경이의 세계에서 의심을 그만두고 확신에 차 살인을 저지르는 것만큼 멍청하고 오만한 일은 없다.

성착취 영상물을 찍어 공유하고도 반성하지 않는 가해자가, 타인의 죽음에 간접적 책임이 있고 가족과의 약속을 어기고 성매수를 한 사람이, 밖에선 정의로운 척하면서 불법촬영물 공유로 돈을 버는 IT 사업가에 대한 윤리적 판단과 분노가 성급하거나 틀릴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해당 범죄들이 여성에게 주는 고통에 비해 경찰의 수사나 사법부의 판결이 느슨하고 관대하다는 경험적 맥락 위에서 드라마 속 이경의 사적 응징은 상당 부분 정당화된다. 드라마는, 그리고 구경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하지 말아야 할 도덕적 원칙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구경이는 K에게 남편 살해를 사주한 윤재영(박예영)에게 양심의 가책을 묻지 않는다. 그가 궁금해하는 건 “죽이고 싶었고 그래서 당신 소원대로 죽어줬는데 왜 슬픈 척”하느냐는 것이다. 죽어도 싼 인간이 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누군가 죽어도 싸다고 그래서 죽일 정도로 철저한 확신을 갖는다면 그 결과는 완벽한 만족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내 평생이 부정당하는 그거, 그게 얼마나 지옥 같은 건지 당신이 알아?”라는 재영의 눈물 섞인 외침에 구경이는 싸늘히 답한다.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구경이에게 중요한 건 복수심의 이유가 아닌 확신의 이유다. 그의 질문은 너의 확신을 네가 증명해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재영을 거쳐 이경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 앞에서 구경이에겐 여전히 의심을 유지할 이유가 훨씬 많다.

드라마에서 구경이와 이경의 대립을 동일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공적이거나 사적인 정의관의 대립으로 볼 수 없는 건 그래서다. 이경은 선명한 인과의 세계에서 산다. 누군가 죽이고 싶어 하니 죽이고, 죽여줬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다. 원인을 통해 결과를 통제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반면 구경이는 원인과 결과가 단일하게 연결되지 않는 불확정성의 세계를 산다. 만약 정의로운 하나의 기준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정의로운 결과를 통제할 수는 없다. 하여 구경이에게 이경은 납득할 수 있는 도덕적 선을 넘은 존재가 아니라, 불가능한 걸 가능하다고 믿는 멍청하고 오만한 존재다. 이러한 대립이 반이나 더 남은 드라마에서 어떤 전망을 남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이 작품을 현실의 사건을 소재 삼아 구축한 장르적 세계가 아닌, 현실에 대한 반성적 재현으로 본다면 지금껏 비교 설명한 두 인물로부터 매우 허접한 해석과 그보단 훨씬 그럴듯한 해석 두 가지를 제시할 수 있겠다.

칼럼니스트 위근우

칼럼니스트 위근우

첫 번째는 여성 대상 범죄와 잠재적 가해에 대한 우려 앞에서 구경이처럼 합리적 의심을 유지해야 하지만, 현실의 여성 중엔 이경처럼 과격한 방법으로 남성 집단을 쉽게 단죄하고 세상을 통제하려 드는 잘못된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해석이다. 두 번째는 실제 여성들은 구경이처럼 의심에 대한 의심을 안고 무겁게 현실을 살고 있지만, 남성들은 그런 여성들을 이경 같은 존재로 보고 비난한다는 해석이다. 단지 잠재적 가해의 가능성을 줄여보자던 여성 연예인에게 온갖 비난이 쏟아지는 현실을 비춰보자면 과연 어떤 해석이 멍청하고 오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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