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어쩌다 지붕에 돔을 얹었나

배문규 기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이 ‘불혹’(不惑·마흔 살)을 맞았습니다.

국회는 국회의사당 준공 40주년을 맞은 지난 9월1일 기념행사를 열고 ‘국회의원 단체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1975년 9월1일 문을 연 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사당입니다. 의사당을 떠받치는 24개 팔각 기둥은 24절기를 의미합니다. 1년 24절기 국정에 진력하라는 의미입니다. 본회의장 천장 조명은 365개로 알려져 있는데 이 또한 1년 365일 일하라는 뜻이라네요.

무엇보다 국회의사당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라고 하면 지붕에 이고 있는 푸른 ‘돔’일것 같습니다. 서양 고전양식 건물에 주로 얹혀있는 커다란 돔, 어쩐지 쌩뚱맞다는 느낌 들지 않으셨나요. 박정희 정권이 지은 국회의사당은 터를 잡는 과정부터 사연이 많습니다. 지붕의 거대한 돔도 한국 현대사의 ‘우여곡절’을 담고 있는데요. 국회의사당의 돔이 ‘어쩌다’ 얹혔는지 읽어보시죠.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 국회 홈페이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 국회 홈페이지

정의화 국회의장, 여야 대표와 의원들이 1일 제19대 마지막 정기국회 개회식을 마친 뒤 본청 앞 계단에서 국회의사당 준공 40주년을 맞아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하자는 취지로 서로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정의화 국회의장, 여야 대표와 의원들이 1일 제19대 마지막 정기국회 개회식을 마친 뒤 본청 앞 계단에서 국회의사당 준공 40주년을 맞아 성숙한 민주주의를 추구하자는 취지로 서로 손을 잡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강윤중 기자

국회는 어쩌다 여의도로 왔나

국회는 1948년 제헌국회를 시작으로 19대에 이르고 있습니다. 1948년 제헌국회 의사당은 현재는 사라진 중앙청, 옛 일본 총독부 청사에 자리잡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는 경남도청 무덕전이 임시의사당으로 쓰였습니다. 1954년부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의회로 쓰이고 있는 옛 부민관에 자리를 잡습니다. 부민관은 일제시대 경성부민들을 위해 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다목적 회관입니다. 일종의 대형 공연장이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회의장이 협소하고 제반 시설이 불충분해 의사당으로 부적하다는 지적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자유당 독재 시절부터 건물 신축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됐습니다. 당초에는 국회 위치가 남산의 옛 조선신궁 터로 선정됐지만 정치적 혼란과 맞물려 혼선이 거듭됐습니다. 군사쿠데타 발발 후 제6대 국회가 개원하면서 의사당건립계획은 다시 추진됩니다.

국회의사당 변천 | 국회 홈페이지

국회의사당 변천 | 국회 홈페이지

이 즈음인 1965년부터 서울시는 제3한강교 건설계획과 함께 강남지구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1967년, 한강 전역에 견고한 제방을 구축하는 내용 등을 담은 대대적인 ‘한강종합개발계획’이 발표됩니다. 그 중 여의도개발은 이 계획의 핵심이었습니다. 1968년 2월에는 여의도가 국회의사당 입지로 선정됩니다. 여의도는 관청들이 들어선 세종로에서 반경 5㎞권내에 있고, 번잡한 도심에선 벗어나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텅 비어있었습니다. 새로운 구상을 실현하기 좋은 공간이었던거죠. 국회의사당 건립이 ‘개발독재’와 맞물려 본격 추진된 셈입니다.

1969년 5월 완성된 건축가 김수근씨의 마스터플랜은 여의도에 국회의사당과 외국공관, 시청과 대법원, 주거지를 망라하는 계획이었습니다. 공시기간만 20년, 투자금 1000억원이 필요했습니다. 한국판 ‘라데팡스’라 할만한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여의도 중앙 12만평 부지에 아스팔트 광장을 조성하라는 대통령 지시가 내려오면서 원안은 왜곡됩니다. 당초 구상도 현실과는 동떨어져있어 계획은 전면 재검토 됩니다.

산으로 간 설계

앞서 남산 국회의사당 공모에선 김수근씨가 1위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의사당 입지가 1968년 여의도로 옮겨지면서 정부는 새로운 현상설계 공모를 냅니다. 이 때부터 정부의 개입으로 의사당 건축은 ‘산으로 향합니다’. 주최 측의 지나친 관료주의가 건축가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요. 설계 공모는 완전한 공개도 아니고 지명 설계도 아닌 어정쩡한 방식으로 치뤄집니다. 처음 현상 설계 공모는 유명 건축가 김중업씨, 김수근씨 등 6명을 지명해 진행됐습니다. 하지만 몇 주 후에 또 다른 설계 공모가 이중으로 실시됩니다. 설계 기간은 단 2개월. 설계자에게는 저작권도 인정되지 않습니다.

일반공모와 지명공모를 병행하는 데 대해 반발이 일면서 지명 건축가들의 의견이 갈렸습니다. 당시 김정수씨, 이광노씨, 김중업씨는 응모하기로 하고, 김수근씨, 강명구씨, 이해성씨는 불참하기로 합니다. 일반 공모에선 안영배씨가 우수작으로 뽑힙니다. 이제 당선안이 나올 것 같지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네 사람이 다시 공동 안을 제출해야 했습니다. 당초부터 이런 과정이 명확했던 것도 아니었던 듯 합니다. 건축가를 기술자로만 생각한 관료들의 오만함때문이었을까요.

1968년 6월3일 서울 여의도 ‘윤중제’ 준공 푯돌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8년 6월3일 서울 여의도 ‘윤중제’ 준공 푯돌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 | 경향신문 자료사진

“왜 여긴 돔이 없냐”

설계에 참여했던 건축가 안영배씨의 구술집(안영배 구술집, 마티)을 보면 당시의 우여곡절이 잘 나와있습니다. 이들은 공동안을 만들기로 하고 1차 설계를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나온 설계안은 캐노피가 중층으로 되어있고 기둥이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 반응이 좋지 않았습니다. 안영배씨의 말을 보시죠. “‘의사당이라고 하면 미국 국회의사당의 큰 돔이나 유럽의 돔이 있는 건물 같아야지, 왜 여긴 돔이 없냐’는 불만이었어요. 그렇게 만들지 않고 왜 현대식만 좇느냐고 했었죠” 하지만 ‘현대 건축’을 하는 건축가들이 더구나 국가상징 건물을 수백년전 서양 건물의 모방으로 지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안씨는 “지금 시대에 옛날 르네상스 시대의 돔이라든가, 이런 양식을 어떻게 건축가들이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우린 현대적인 안을 원하고 옛날 양식은 원치 않는다고 그랬어요”라고 회고합니다.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 경향신문 자료사진

미국 워싱턴DC 국회의사당 | 경향신문 자료사진

하지만 돔에 대한 집착은 꺾이지 않습니다. “한번은 국회의원들이 하도 높은 돔을 원하기에 일부러 보기 싫게 돔을 크게 설계해서 일단 투시도를 보여준 적이 있어요. 이렇게 비교해보자는 식으로요. 그랬더니 의외로 우리가 보기 싫게 하려고 그린 설계를 더 좋아하더라구요. (웃음) 그래서 곤혹스러웠죠.” 결국 하부를 단순하게 처리했던 김정수씨의 안에 나지막한 돔을 씌우는 것으로 합의를 봅니다. 다른 안들은 저층부가 복잡했기 때문이랍니다.

국회는 넘었지만 다음에는 청와대 재가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브리핑에 건축가들은 들어가지 못했고, 국회의장 등 고위인사들만 참석했다고 하네요. “가서 한 얘기가…. “건물이 몇 층이냐?” “5층입니다.” 이렇게 대답했다고 하더군요. 그랬더니 “중앙청 건물은 몇층이냐?” “5층입니다.” “그보단 더 커야, 높아야 하지 않냐, 한층 더 높여라.”” 군인 출신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물은 규모(스케일)의 문제였나 봅니다. 일제의 상징이던 중앙청 건물보다는 더 높고 웅장해야 했던 겁니다. 다시 한번 건축가들은 ‘멘붕’에 빠집니다. 계획안도 완성되고 스케줄까지 나왔는데 설계를 변경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더해 예산 문제로 면적은 그대로인데 층수만 올려야 했답니다. 안씨는 “그때 나는 큰 비애감을 느꼈어요. 처음에는 매우 중요한 건물이라고 보아서 나도 상당히 의욕적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정치가들의 입김이 크게 영향을 주는 이러한 건물설계에는 건축가로 참여하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죠” 결국 의사당은 전체 넓이를 축소하고 한 층을 올립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 1차 기본 설계안. 당시 국회의원들이 돔을 요구하자 설계에 참여한 김정수씨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베를린 갤러리’처럼 네 기둥이 앞에 있고, 돔이 아주 납작한 안을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 마티 제공

여의도 국회의사당 1차 기본 설계안. 당시 국회의원들이 돔을 요구하자 설계에 참여한 김정수씨는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베를린 갤러리’처럼 네 기둥이 앞에 있고, 돔이 아주 납작한 안을 주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부당했다. | 마티 제공

1982년 촬영한 여의도 국회의사당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2년 촬영한 여의도 국회의사당 | 경향신문 자료사진

서양식 돔과 한국적 미

국회의사당은 다양한 ‘한국적 미’도 담았습니다. 중앙 원형홀 바닥은 석굴암 천장 주변의 무늬를 본뜬 한국적 문양의 대리석 모자이크입니다. 건물을 둘러싼 24개 기둥은 경회루 석주를 본 떴습니다. 안영배씨의 설명을 보시죠. “우리나라 전통건축물은 사방에 주랑이 있는 형태인데, 그 가운데 경복궁의 경회루가 가장 아름다운 건물로 꼽혀요. 그래서 여의도 의사당 설계 때 이런 점을 참조하기도 했죠. 또 평면의 비례를 5:8로 하는 것이 황금비이기도 하고, 전면 기둥을 8개로 한데는 팔도강산이라는 의미도 담았어요. 그리고 외부의 기둥들에는 전국의 국회의원들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대립되는 의견을 원만하게 타결한다는 뜻에서 중앙에 원형돔을 배치하기도 했지요. 이러한 개념은 좋았던 것 같아요. 그걸 형태로 조형하는 게 문제였죠.”

아무튼 국회의사당은 1975년 여의도 양말산(羊馬山) 일대 부지에 2만1881㎡ 면적과 높이 70m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지름 64m, 높이 20m, 무게 1000t의 거대한 르네상스식 돔을 머리에 얹은 채로 말이죠. 안씨는 “원안대로라면 납작하고 길어서 상당히 안정되고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길이가 짧아지고 높아지니까 프로포션이 영 맘에 안 들었어요. 그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 중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이었어요”라고 말합니다.

공허한 권력의 기념비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의 <상상의 아테네, 베를린·도쿄·서울>(천년의 상상)에서는 국회의사당을 두고 “중앙집권적 권력의지로 텅 빈 공간에 세운 권력의 기념비”라고 표현합니다. 전 교수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를 동경한 독일, 동양의 독일이 되고자 했던 일본, 일본 제국주의가 이식된 식민지 조선을 계보학적 관점에서 엮어냅니다. 특히 서울의 변천사를 통해 식민지의 경험과 근대화의 열망이 교차하는 모습을 드러내는데요. 전 교수는 식민통치의 총본산인 옛 총독부 청사(중앙청)가 어떻게 오래도록 남아있을 수 있었는지 묻습니다. 이유는 “건물의 모습이 ‘왜색’을 띠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서울 시민들이 건물에서 수치스러운 식민지 과거보다는 서구적이며 ‘근대적인’ 측면을 보았기에 굳이 서둘러 건물을 파괴할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 전 교수는 시민들이 ‘근대적 건축물’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광화문과 경복궁을 복원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 것을 두고 “식민지배는 혐오하지만 그것에 내포된 근대화에는 열광”했다고 봅니다. 그는 “광화문과 경복궁의 복원이 그러한 장기적 근대화 프로젝트의 완성이라면 이는 불가항력적이던 식민주의와의 단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논리적 귀결이라 보아야 마땅하다”고 밝힙니다.

여의도 국회의사당도 그러한 관점에서 확장해 볼 수 있을까요. 포스트식민도시 서울을 현대도시로 창조하는 과정에서 파괴와 망각을 시도했지만, 아직까지도 과거의 망령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죠. 식민화와 근대화가 ‘착종’되어 있어 끊임없이 균열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일제 식민통치 본부가 국회·중앙행정관청으로 쓰였던 일이나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사가 이를 예증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전 교수는 여의도 개발계획이 “국체의 ‘중심핵’을 구축한다는 꿈을 식민지 과거의 망령이 어른거리는 도심부에서 벗어나 아예 ‘빈 땅’에서 새롭게 펼쳐보”려는 시도였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이 새로운 시도조차 벗어나고자 했던 식민지의 기억을 반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 6월 일본 전국에서 운집한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60년 6월 일본 전국에서 운집한 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미·일 안보조약 체결을 반대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국회의사당 앞에 지난달 30일 오후 12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모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한 안보법안의 폐기와 아베 신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AP교도연합뉴스

일본 도쿄 지요다구의 국회의사당 앞에 지난달 30일 오후 12만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모여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한 안보법안의 폐기와 아베 신조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AP교도연합뉴스

전 교수는 독일 나치 건물을 연상시키기도 하는 일본 제국의회 의사당을 “신고전주의적인 기본틀에 피라미드식 지붕이 추가됨으로써 명확히 정의하기 힘든 건물”이라면서 “어떠한 뚜렷한 과거의 기억과도 연관성이 없는 공허한 형태언어를 남발하는 이 건물은 근대 일본의 분열된 정체성을 나타내는 도상”이라고 평합니다. 제국을 상징하는 중심 건축물이 절충주의적 양식을 띠면서 모방하려던 프로이센식 ‘텍토닉’(형식과 기능의 완전한 조화)의 희화가 됐다는 겁니다.

국회의사당은 어떨까요. 전 교수는 “국회라는 근대적 기관을 극도로 추상화된 서양 고전주의 양식과 한국적 문양을 가미하여 연출해낸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대한민국의 근대화 의지와 민족적 주체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도한 기념비적 연출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에는 식민지 시절의 암영이 드리워 있다. 무소불위의 국가가 무턱대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가운데 그 건립 과정이나 건축적 형태에서 텍토닉 내지는 국체의 식민주의적 희화가 야기되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돔이 도대체 뭐길래

[정리뉴스]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어쩌다 지붕에 돔을 얹었나

국회의사당 건립과정 모순의 상징처럼 된 돔은 설계과정부터 사회적 논란이 되긴 했나 봅니다. 경향신문 1969년 5월28일자 “『돔』을 언져야하나”라는 기사를 보실까요. “현대 건축가 안병의씨의 비판은 더욱 신랄하다. 그는 돔식 건축의 대표적인 것이 옛날 조선총독부이던 현 중앙청 건물임을 상기시키면서 “이런 건축 양식은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자기나라의 위세를 보이기 위해 즐겨세우던 콜로니얼스타일”이라고 전제하고 나서 “민주의 전당인 국회의사당 건물에 그것도 억지로 돔을 올린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말한다” 그는 또 “중앙청 건물이 새로 세워진 광화문에 의해 가려진 후 시민들은 이를테면 한국 문화가 일본 문화를 흡수해 버린 것 같은 안심감 같은 것을 맛보게 됐는데 서울의 입구인 여의도에 다시 돔식 의사당이 세워진다면 조선총독부의 악령이 되살아나는듯한 불안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 설계에 참여해 온 K모 건축가는 답답함을 하소연하면서 “도대체 오늘 세워지는 건축에 2세기 전의 낡은 건축방식인 돔을 만들어 넣으려는 일부 국회의원의 무교양한 횡포에 기가 막힌다”고 개탄, “2차대전 이후 새로 지어진 「브라질」「이스라엘」등의 의사당 건물엔 전혀 돔같은 것이 없다”고 말했다” 참고로 브라질 국회의사당은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인도 펀자브주 찬디가르에 주의회의사당, 루이스 칸은 방글라데시 국회의사당을 설계했네요.

건축가 김원씨도 1975년 건축전문지 ‘공간’ 10·11월호에 국회의사당의 모든 건축적 형태를 “국적 불명의 무대장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고 전진성 교수는 전합니다. 김씨는 열주와 돔이 순전한 장식용이고, 5m 높이의 난간도 옥상의 전망만 가리는 불편한 장식물이라고 지적합니다. 또한 “거대한 굴뚝을 연상시키는” 원형홀과 그 공간과는 어울리지도 않는 한국적 문양은 억지로 한국적인 것을 만들려는 “논리적 강박관념의 소산”이라며 “동양과 서양 두 세계 사이에 정신으로 승화된 다리를 놓는 대신 물리적으로 접합시켜보려는 우리 문화의 성급함”을 잘 보여준다고 밝힙니다.

돔은 권력의 상징입니다.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해 더 높은 세상,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천상을 암시합니다. 지속성, 초월성, 강력함을 상징하는 돔에 권력자들이 매료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것일까요. 국가권력을 시각화하는데 돔만큼 적절한 상징은 없었을테니까요. 돔의 모티프는 제국 일본의 권능을 가시화하는 수단으로 근대 일본 건축가들에게도 두루 활용되었다고 하네요. 한국에선 조선 총독부 외에도, 산업화의 상징인 철도의 시발점 서울역에 있었구요. 이러한 돔에 대한 환상은 최근까지 이어집니다.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 지역적, 민족적 해석을 녹인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브라질 국회의사당.  | 위키피디아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 지역적, 민족적 해석을 녹인 브라질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브라질 국회의사당. | 위키피디아

국회를 황금돔으로?

2000년 국회에서는 돔에 황금색을 입히자고 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돔이 시간이 흐르면서 녹슬어 회녹색이 된 것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국민일보(2000년 6월29일자 ‘국회의사당 지붕 황금색으로 바꾸자’…한심한 사무처)에 따르면 ‘황금돔’으로 개량하는데 4억9000만원의 예산이 들고, 4~5년마다 최소 4000만~5000만원을 들여 손질을 해야 했다고 합니다. 국회가 이 계획을 추진하려 했던 것은 ‘밤에 보면 의사당 돔이 너무 우중충하니 황금색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느냐’는 관계자 의견이 나왔기 때문이랍니다.

국회의사당의 거대한 돔은 부족한 정권의 정통성을 감추려는 정권의 의도로도 볼 수 있고, 국회의원들의 권위의식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 지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도 일종의 모델은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조한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가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아트뮤(ART:MU) 2014년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전합니다.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pixabay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pixabay

[정리뉴스]여의도 국회의사당은 어쩌다 지붕에 돔을 얹었나

“1999년에 리노베이션 된 독일 국회의사당은 역사적인 맥락이나 환경적인 측면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네오르네상스 스타일로 1894년에 완공된 독일 국회의사당은 독일 제국의 첫 의회 의사당으로, 1933년에는 방화로 인해 건물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고, 남아있던 부분은 2차 대전 중에 포화로 파괴되는 등, 독일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건물이다. 1990년 분단되었던 동서독이 다시 통일되면서 본격적으로 독일 민주주의 이상에 맞는 국회의사당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국회의사당을 신축하는 대신 기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영국 건축가 노만 포스터 안의 핵심은, 바로 파괴된 권위적인 중앙 돔을 투명한 유리로 복원하여 새로운 시대에 맞는 국회의사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유리 돔은 투명한 민주주의를 상징할 뿐 아니라, 건물 내부에 자연 채광을 끌어들이는 친환경적인 역할을 하며, 특히 나선형 동선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온 시민들이 투명한 유리를 통해 아래쪽의 국회의원들을 감시할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국민과 국회의원이 특히 괴리되어 있는 우리의 상황에 정말 필요한 모델이 아닐까? 그 외에도 자연 경관을 훼손하지 않고 주변 시민들이 공원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인공 구릉을 만들어 그 속에 국회의사당을 넣은 호주의 경우가 있고, 작은 건물들의 집합체인 스코트랜드 국회처럼 도심 주변 맥락을 그대로 내부로 끌어 들여 시민들이 부담 없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있다. 또한 미국 하와이주 의회 건물처럼 중앙 홀이 자체가 하늘로 열려있어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좋은 사례도 있다.”

1999년 12월14일 부동산정보사이트 ‘텐커뮤니티’는 ‘구태 정치를 거듭하던’ 국회의사당을 가상 경매에 붙여 화제가 됐다는데요. 한 달간 실시 결과 참가자 1만2000여명 가운데 2조1999억9999만원을 써낸 경남 창원의 염모씨가 1등을 했다고 합니다.(중앙일보 2000년 1월19일자 “국회 2兆에 팔려” 인터넷 가상경매) 당시 “대지 10만평과 건물 4만2천여평. 감정가가 2조원”에 달하는 매물치곤 높은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참가자 중에 1원을 써낸 사람도 200여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국회가 경매에 붙여진 한국 정치의 현실이 씁쓸한 웃음을 주는데요.

이는 15년이 지난 오늘날도 비슷합니다. 국회가 ‘민의의 전당’이 아닌 ‘정치혐오의 전당’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야당이 들고 나온 ‘의원수 확대’도 취지와는 달리 ‘밥그릇 늘리기’라는 비판만 받고 논의가 묻혔습니다. 국회의원들이 궁전같은 의사당에서 세금만 축내면서 특권을 누린다는 인식이 너무도 강한 탓이겠죠.

기왕에 세워진 국회의사당을 부수고 새로 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수십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나름의 역사성도 덧씌워졌습니다. ‘무교양’했던 시대를 증언하는 역사적 기록이기도 하구요.

결국 고민해야 할 지점은 국회의사당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곳’이 되어야 하는지 겠죠. 국회의사당이 ‘불통’이 아닌 ‘소통’ 공간이 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국회 앞에 놓인 바리케이드 사이로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있다.  | 정지윤기자

국회 앞에 놓인 바리케이드 사이로 국회의사당이 보이고 있다. | 정지윤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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