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 "'묻지마 살인'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입니다"

이혜리 기자

“묻지마 살인의 타깃은 왜 항상 약자인 여성인가”

“여자라서 죽었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당신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동참해 주세요. 오늘은 운이 좋아 살아남았지만, 내일은 운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혐(여성혐오)는 이제 여성의 생존 문제입니다”

“그놈이 다른 데서 일했다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겠지”

“이제 몰카가 아니라 살해당할까봐 화장실을 못가겠습니다”

18일 서울 강남역에서 시민들이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8일 서울 강남역에서 시민들이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8일 오후 찾은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는 포스트잇 수십개가 붙어 있었다. 포스트잇에는 전날 새벽 강남역 인근 주점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의 여성 피해자를 추모하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범죄를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를 당하는 사회가 언젠가 사라지리라 믿습니다”

“언제까지 남자 개인의 문제로 보실 건가요”

“여자가 밤늦게까지 혼자 돌아다니면 안돼라고 말하는 남자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남자들이 밤늦게 돌아다니지 않으면 세상이 평화로워진다고”

강남역 10번 출구 앞 건물 관리자에 따르면 이날 오전 6시쯤만 해도 붙어있던 포스트잇은 네다섯개 정도였고 포스트잇 아래 놓인 국화꽃도 한다발 밖에 없었다. 그러나 트위터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소식이 확산되면서 점심부터 많은 시민들이 이곳을 방문해 포스트잇을 붙이기 시작했다. 국화꽃과 안개꽃도 수북히 쌓였다. 한숨을 쉬거나 눈시울을 붉히는 시민들도 간혹 보였다.

전날 살인 혐의로 경찰에 체포된 김모씨(34)는 경찰 조사에서 “사회생활에서 여성들에게 무시를 당해 범행을 했다”고 진술했다. 범행동기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지만 상당수 기사들은 김씨와 여성 피해자가 모르는 사이라는 이유로 이 사건을 ‘묻지마 살인’으로 규정지었다.

18일 서울 강남역에서 시민들이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8일 서울 강남역에서 시민들이 인근 건물 화장실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피해자를 추모하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그러나 이곳을 찾은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단순한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여성혐오가 드러난 범죄라고 지적했다.

외벽 아래쪽에는 해당 사건을 ‘묻지마 살인’이라고 보도한 기사와 함께 댓글을 캡쳐한 내용이 붙어 있었다. 그 댓글에는 “너네가 괜히 죽냐. 여자들이 너무 깝쳐서 가해자도 여성 혐오에 걸린 거잖아. 여자는 애 낳고 밥이나 하는 게 맞다. 그게 자연의 섭리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날 아침 포털사이트에서 포스트잇이 2~3개 붙어있는 사진을 보고 직접 포스트잇을 붙이기 위해 경기도 수원에서 왔다는 ㄱ씨(27)를 만났다. 그는 “여성들을 겨냥한 범죄가 만연한데 계속 ‘묻지마 살인’으로 포장되는 것에 반대해서 나왔다”고 말했다. ㄱ씨는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라는 문구를 포스트잇에 써붙였다. ㄱ씨는 “단순히 정신병자가 ‘묻지마 살인’을 한 게 아니라 한국의 구조적인 문제가 드러난 것”이라며 “어렸을 때부터 양성평등에 대한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ㄴ씨(25)는 “사건을 접했을 때 너무 슬프고 충격적이었다”며 “희생자는 항상 노약자, 여자, 어린아이가 되는 한국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고민된다.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많이 알려져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ㄷ씨(25·대학생)는 “그 동안 여성 인권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나왔고 그에 대한 분노가 쌓여있다보니 이 사건까지 터졌다고 본다”며 “여성 인권 발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자발적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어 있는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글. 이혜리 기자 촬영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어 있는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글. 이혜리 기자 촬영

간혹 남성들도 눈에 띄였다. 근처 학원을 왔다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한모씨(25)는 “(범인과) 같은 남자라는 게 싫고 미안하다”며 “사건이 벌어진 곳이 남녀공용 화장실이라고 하는데 공용화장실이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 마음만 먹으면 여자화장실에 들어가서 할 수도 있었던 상황 아니냐. 약자인 여성이 당했다는 게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했다. 현장을 지켜보던 또 다른 남성은 “다시는 남성의 여성혐오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포스트잇을 써붙였다.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어 있는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글. 이혜리 기자 촬영

서울 서초구 강남역 10번 출구 외벽에 붙어 있는 공용화장실 여성 살인사건에 대한 추모글. 이혜리 기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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