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내 근처 낯선 이가 전송한 사진 한 장···‘에어드롭’에 웃고 울다

김지혜 기자

지난 12일 오전 7시30분, 회사원 정진우씨(23)는 출근을 위해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습니다. 늘 그랬듯 열차는 벌써 만원. 정씨는 인파 속에 겨우 몸을 끼워넣었습니다.

여느때처럼 다른 승객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던 정씨는 자연스레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웹툰 제목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다 문득 진동이 온 스마트폰 화면을 확인하고서 그만 ‘빵’ 터지고 말았는데요.

정진우씨가 지난 12일 지하철 2호선 탑승 중 에어드롭으로 전송받은 사진

정진우씨가 지난 12일 지하철 2호선 탑승 중 에어드롭으로 전송받은 사진

“야 진짜 피곤하지 않냐 오늘? 대박이다, 정말!”

스마트폰으로 전송된 사진 속에서 방송인 광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까랑까랑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죠. 이 사진은 애플 아이폰의 ‘에어드롭’ 기능을 이용해 정씨의 근처에서 함께 ‘지옥철’을 타고 있는 누군가가 보낸 것입니다. 에어드롭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이폰 등 애플 기기 사용자끼리 사진 등을 편리하게 공유할 수 있는 기능입니다. 지옥처럼 느껴지던,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이 호소하는 ‘진짜 피곤함’에 정씨는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에어드롭 ‘희망편’

애초에 에어드롭은 애플 기기 간 사진·동영상·연락처·파일 등을 복잡한 절차 없이 전송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에어드롭 기능만 켜면 반경 9m 안의 발신인과 수신인은 신원·연락처를 따로 밝힐 필요없이 콘텐츠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다. 발신인이 콘텐츠를 공유하면 수신인은 ‘수락’ 또는 ‘거절’을 선택해 이를 받아볼 결정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 기능에는 맹점이 있습니다. 공유 여부를 선택하기에 앞서 콘텐츠 미리보기 화면이 먼저 떠버린다는 것입니다. 에어드롭 수신인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 공유한 사진을 일단 확인해야 합니다.

최근 이러한 맹점을 이용, 근처의 불특정 다수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고 다양한 사진을 전송하는 에어드롭 놀이가 번지고 있습니다. 신원을 모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광희와 같은 연예인 사진을 비롯, 강아지나 고양이 등 귀여운 이미지,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유머 ‘짤’을 공유하는 유희 문화가 생겨나고 있는 것입니다.

일전에 친구에게 사진을 받기 위해 아이폰에서 해당 기능을 켜둔 상태였다는 정씨는 “모르는 사람에게 받은 건 처음”이라면서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이 내게 사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당혹스럽긴 했지만, 유해한 내용은 아니라서 웃었다”고 말합니다. 다음날인 13일 정씨는 아침 출근길 지하철에서 또다시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에어드롭으로 공유받습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죠.

정진우씨가 지난 13일 지하철 2호선 탑승 중 에어드롭으로 전송받은 사진

정진우씨가 지난 13일 지하철 2호선 탑승 중 에어드롭으로 전송받은 사진

동물의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은 지친 일상에 웃음을 주는 ‘힐링’의 역할을 합니다. 어떤 이는 깜찍한 고슴도치 사진을 공유하면서 “당신의 모든 일이 신기하게도 잘 풀릴거예요. 이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달하세요!”라는 따뜻한 메시지를 첨부하기도 하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우리집 고양이’라면서 자랑 폭격을 날리기도 합니다.

최근 에어드롭을 통해 이러한 사진을 받았다는 ‘인증샷’이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확산되면서 “나도 받고 싶다” “오늘부터 에어드롭 기능 켜야겠다”는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많이 나왔습니다.

트위터 계정  @MOONLIGHT_WZ__ 갈무리. 이 트위터 이용자는 에어드롭을 통해 고슴도치 사진을 공유받았다.

트위터 계정 @MOONLIGHT_WZ__ 갈무리. 이 트위터 이용자는 에어드롭을 통해 고슴도치 사진을 공유받았다.

트위터 계정  @igotnomercy 갈무리. 이 트위터 이용자는 에어드롭을 통해 누군가가 키우는 고양이 사진을 공유받았다.

트위터 계정 @igotnomercy 갈무리. 이 트위터 이용자는 에어드롭을 통해 누군가가 키우는 고양이 사진을 공유받았다.

관심사가 같은 이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공간에서 에어드롭은 유용해집니다. 예컨대 같은 연예인을 좋아하는 팬들이 잔뜩 모여있는 팬사인회나 콘서트장에서 연예인의 잘 나온 사진들을 주변 팬들에게 공유하며 유대감과 흥미를 나누는 일이 빈번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24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서도 에어드롭 대란이 벌어졌습니다. 이날 이곳은 <2018 SBS 가요대전> 사전녹화에 참석하려는 아이돌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는데요. 날씨는 춥고, 기다림은 길어지자 팬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에어드롭 놀이가 시작됐습니다. 아이돌 사진이 공유되기도 했지만, 온종일 기다리고만 있는 서로의 처지를 빗댄 ‘짤’들이 주로 퍼져나갔습니다. 추위에 콧수염이 얼어버린 남자의 사진이나, “집에 가고 싶다”고 적는 붓글씨 사진 등 힘들고 지쳐보이는 이미지들이 계속해서 공유됐고 곳곳에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24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 모인 아이돌 가수 팬들이 에어드롭으로 공유한 사진들. 트위터 갈무리

24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 모인 아이돌 가수 팬들이 에어드롭으로 공유한 사진들. 트위터 갈무리

24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 모인 아이돌 가수 팬들이 에어드롭으로 공유한 사진. 트위터 갈무리

24일 서울 구로구 고척 스카이돔에 모인 아이돌 가수 팬들이 에어드롭으로 공유한 사진. 트위터 갈무리

■에어드롭 ‘절망편’

그러나 이 기능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에어드롭을 이용한 성희롱 피해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 에어드롭은 수신인이 사진을 받을지 말지 결정하기도 전에 미리보기로 그 내용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맹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를 악용해 자신의 성기 등을 찍은 음란한 사진을 근처의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잡이로 전송하는 성희롱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회사원 이선혜씨(가명·31)는 지난달 29일 밤 11시쯤 집으로 돌아가는 5호선 지하철에서 이 같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고 있던 이씨는 갑자기 스마트폰 화면에 어떤 남자의 나체사진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에어드롭으로 공유된 것이었죠. 이씨는 황급히 사진을 받지 않겠다는 의미의 ‘거절’을 누르고 주위를 둘러봤습니다. 가까이에서만 보낼 수 있는 에어드롭의 특성상 이 나체 사진의 발신자 역시 같은 칸 안에 타고 있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열차 안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2명 정도가 서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자리에 앉아있었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씨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갑자기 발신자와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입니다. 이씨는 “이런 수단까지 사용해 타인을 불쾌하게 하려고 작정한 사람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 기분 나빴다”고 말합니다.

지난 5월 21일 트위터에서도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에어드롭을 통해 남성 성기 사진 여러 장을 전송받았다는 내용의 트윗이 게재됐습니다. 해당 이용자는 자신의 여동생이 피해를 입었다며 “동생이 에어드롭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기능을 아예 몰랐다”고 밝혔습니다.

경찰은 이러한 행위는 음란물 유포 행위로 정보통신망법 위반에 해당하며, 특정인에게 반복적으로 보낼 경우에는 성폭력처벌법상 통신매체이용음란죄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합니다.

에어드롭으로 전송된 남성의 성기 사진. 트위터 갈무리

에어드롭으로 전송된 남성의 성기 사진. 트위터 갈무리

에어드롭으로 전송된 콘돔 사진. 트위터 갈무리

에어드롭으로 전송된 콘돔 사진. 트위터 갈무리

에어드롭 기능이 처음 공개된 2011년 이후 해외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성희롱 사례가 줄이었습니다. 영국 BBC는 2015년 영국 여성 로레인 크라이튼 스미스가 기차 안에서 남성 성기 사진 2장을 받았다고 보도했으며, 지난 10월 일본 요미우리 신문은 에어드롭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낯 뜨거운 이미지를 보내는 치한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이러한 범죄 행위를 사이버 플래시(Cyber Flash)라고 부릅니다. 에어드롭을 이용한 성희롱 피해가 계속 이어지자 지난달 뉴욕 시의회 의원 2명은 사이버 플래시를 저지른 이에 대해 최대 1년의 징역 또는 100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그러나 발의 이후 이 법이 과연 실효성이 있냐는 비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데요. 기술적으로 에어드롭의 발신인을 추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에어드롭, 누가 보냈는지 알아낼 수 있을까?

이선혜씨는 에어드롭 성희롱 피해를 당한 직후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분명 현행법상 위법 행위인데도 말입니다. 그 이유를 묻자 이씨는 “이미 사진 공유 거절을 눌렀기 때문에 사진을 보낸 사람을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했습니다. 실제 애플은 지난해 1월 공식 사이트에 올라온 “에어드롭으로 받은 사진을 공유 거절했을 때 그 발신인을 추적할 수 있는 방법은 없냐”는 질문에 대해 “에어드롭 로그를 재검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을 잡기 위해 성희롱성 사진의 공유를 수락한다면 발신인 추적이 가능할까요? 안타깝게도 이 역시 회의적입니다.

영국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전문가들은 에어드롭 ID가 쉽게 변경되고 특정 장치에 고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성희롱성 사진을 보내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애플 기기 관련 블로그 Mac4n6에서도 에어드롭 발신자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을 기술적으로 검토해 보았으나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성희롱성 사진을 보낸 발신자가 에어드롭 ID를 실명으로 설정한 경우에나 겨우 추적이 가능하다는 냉소와 함께 말입니다.

아이폰 제어센터에서 에어드롭 수신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

아이폰 제어센터에서 에어드롭 수신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

결국 에어드롭을 통한 성희롱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예방 조치만이 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어드롭 기능을 아예 끄거나 연락처가 있는 이들에게만 공유할 수 있도록 설정을 바꾸는 것입니다. 아이폰 제어센터에서 에어드롭 수신 설정을 변경하면 됩니다. 다만 이러한 조치 후에는, “당신을 응원한다” “오늘 진짜 피곤하지 않냐” 등 지친 일상에 웃음을 주는 따뜻한 ‘짤’을 어느날 갑자기 공유받는 기쁨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소수가 벌인 악행이, 다수가 누리는 즐거움에 위협을 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에어드롭의 기능뿐만 아니라 재미의 업그레이드를 위해서, 위법의 소지가 있는 콘텐츠의 공유에 한해 발신인의 추적이 가능한 시스템이 갖춰져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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