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건 변호사(35)는 변호사가 아니다. 동료들도 의뢰인들도 변호사라 부르지만, 그의 명함엔 이름만 새겨져 있다. 사법연수원 40기인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실형을 살았다.
법무관이 받는 4주간의 군사훈련 대신 1년6개월의 감옥살이를 택한 유일한 사람이다. 그의 변호사 등록은 수감과 함께 취소됐다. 2017년 5월 출소 후, 변호사협회에 변호사자격 재등록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다. 백종건씨는 오는 29일 변호사 재등록 심사를 받으러 간다. 세 번째 도전이다. 지난해 헌법재판소의 병역법 불합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양심적 병역거부는 죄의 굴레를 벗었지만, 그는 여전히 심판대 위에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감옥이 있는 미래’를 받아들여야 했고, 출소 후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선의를 증명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는 백종건 ‘전’ 변호사를 21일 서울 서초동에서 만났다.
- 어떻게 지내십니까.
“변호사로 등록되지 않아서 재판에 출석하진 못하지만, 서면을 작성하고 의뢰인과 상담하고 사건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백씨는 검사 출신인 김경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 두 사람은 부산지검에서 검찰시보와 차장검사로 인연을 맺었다. 백씨는 “감옥에 있을 때 면회도 와주셨고, ‘양심적 병역거부와 대체복무제는 반드시 인정될 것’이라며 응원해주셨는데 일할 기회까지 주셨다”며 깊이 고마워했다.
- 변호사 재등록 심사를 또 받으러 가신다고요.
“네. 사실 지난주에 (심사위원회가 또 열린다는) 전화를 받고 잠시 멘붕에 빠졌어요.(웃음) 이번엔 집행부에서 직권으로 결정해주지 않을까 기대했었나봐요. 가서 잘해야죠.”
변호사 재등록 결정은 소속 지방변호사협회를 거쳐 대한변호사협회에서 최종 결정한다. 2017년 9월 백씨의 변호사 재등록 신청을 받은 서울지방변호사회는 ‘적격’ 의견으로 백씨의 신청을 대한변호사협회에 송부했다. 대한변협 집행부는 심사위원회를 열었고 재등록안은 3 대 5로 부결됐다. 두 번째로 신청한 2018년 8월에도 서울변회는 적격 의견을 냈다. 헌재가 병역의 종류를 한정해놓은 병역법 5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려 양심적 병역거부의 길을 연 직후라 기대감이 컸지만, 대한변협은 또 한 번 거부했다. 백씨의 표현에 따르면 “그래도 4 대 5로 조금 나아졌다”. 지난해 말 백씨는 세 번째로 등록을 신청했고 대한변협은 이번에도 심사위를 열기로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지난 21~22일 투표를 통해 이찬희 변호사가 새 대한변협 회장에 당선된 것이다. 이 당선자는 기자회견에서 “백씨의 변호사 재등록 신청을 받아줄 것이고 변호사법 개정도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러나 새 집행부의 임기는 2월 중순 이후이다. 백씨는, 곧 바뀌겠지만 여전히 자신을 심사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변호의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
- (백종건씨의 현 상태가) 현행 변호사법상 결격사유(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은 지 5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에 해당되는 것은 맞는데요. 재등록을 신청한 취지를 설명해주세요.
“변호사법의 취지는 변호사가 갖고 있는 공공성, 신뢰성,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겁니다. 그런데 양심적 병역거부는 일반 형사범죄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신청을 하게 됐어요. 양심적 병역거부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기를 들거나 해를 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에서 처벌을 받은 것이죠. 헌재 결정과 대법원 판결로 우리나라에서도 더 이상 양심적 병역거부는 범죄가 아니게 되었는데, 병역거부로 처벌을 받은 제가 변호사 등록도 못하게 되는 것은 2차 피해라고 생각해요. 변호사법에는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이 등록을 신청했을 때 등록을 거부할 수 있다’고 돼있어요. ‘등록을 거부해야 한다’가 아니죠. 저처럼 규정을 그대로 적용하기 부당한 경우 구제해 줄 수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너도 커서 감옥 가겠네” 감옥이 있는 삶
1945년 이후 양심적 병역거부로 처벌받은 이는 약 2만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해까지 해마다 500명이 넘는 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해 수감됐다. 그중 99%가 여호와의 증인이다.
- 초등학교 6학년 때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세례)를 받았죠. 그게 어떤 결정인지 이해하고 있었나요.
“여호와의 증인에게 침례는 하느님의 뜻대로 헌신하겠다는 서약이에요. 보통 이 서약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 침례를 받는 편이죠. 저는 나이는 어렸지만 어쩌면 지금보다 순수하게 하느님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예쁜 짓을 하고, 아내에게 칭찬받으려고 퇴근 후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남편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사실 구체적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지는 더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됐어요. 아버지나 회중(교회)의 다른 형들처럼 감옥에 갇힐 수 있다는 점은 인식하고 있었어요.”
- 아버지가 종교 때문에 수감생활을 하셨다는 걸 알고 있었군요.
“네. 제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수감되는 걸 봤어요. 기억이 파편처럼 남아있는데 어머니와 함께 헌병대에 갔던 기억이 나요. 얼음 같은 표정과 각이 잘 잡힌 군복을 입은 군인아저씨들을 보면서 그 분위기가 많이 불편하고 힘들었는지 아니면 아버지가 여기에 갇혀있다는 것을 알아서 그랬는지 먹은 것도 없이 토했어요.”
의대를 나온 백씨의 아버지 역시 여호와의 증인으로 8주간의 군사훈련과 공중보건의 생활을 거부하고 징역 2년을 살았다. 서른 살이던 어머니가 백씨와 두 남동생을 키우며 생계를 책임졌다. 당시 부장검사였던 백씨의 할아버지는 여호와의 증인이 아니었지만, 결국 아들의 선택을 받아들이고 존중했다.
- 대한민국에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살겠다는 것은, 병역문제로 감옥살이를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두렵고 불안하진 않았나요.
“제게 감옥은 익숙하면서도 두려운 대상이었어요. 여호와의 증인 집안에서 자란 남자아이는 삶에서 감옥이라는 미래를 머리에 이고 살 수밖에 없었어요. 늘 가족이든 형이든 친구든 누군가는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재판을 방청하러 가고 송별회를 하고, 형을 선고받고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여 호송차에 타는 모습을 보고, 부모와 가족들은 울고 감옥에 면회를 하러 가고, 편지를 쓰고 감옥에서 나온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제가 갇혀 있지 않더라도 늘 감옥과 가까운 삶을 살 수밖에 없었어요. 인생계획을 세울 때도 언젠가는 감옥에 간다는 것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너는 커서 감옥 가겠네’ ‘공부 잘하면 뭐해. 어차피 감옥 갈 걸’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상하지도 않았어요. 그런 말들이 차별이고 편견이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그냥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으니까요.”
- 왜 군대에 갈 수 없다고 판단한 건가요.
“침례를 받은 이후에 저도 계속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선택한 길이 옳은 길인지 의심하고 계속 확인해 보려고 했어요.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고, 심지어 적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도 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 제자들은 로마 제국하에서 군인이 되길 거부해 순교하기도 했어요. 물론 종교마다 성서의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고 이른바 ‘정당한 전쟁’ 이론이 등장했어요. 그러나 고민 끝에 제가 참여할 수 있는 정당한 전쟁이란 존재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저 스스로 전쟁과 관련을 맺지 않기로 결정했고, 단 하루도 군인이 될 수 없어서 (법무관이 받는) 4주간의 군사훈련도 거부했습니다.”
- 처벌을 피하기 위해 학교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죠.
“네. 많지는 않지만 일부에선 중학교를 중퇴하고 학력미달로 면제를 받기도 해요. 저 역시 그런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어요. 피할 수 있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얘기도 들었죠.”
백씨에게 중학교 중퇴를 권한 사람 중에는 그를 아꼈던 학교 선생님들도 있었다고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나중에 법조인의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처벌을 피하기보단 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쳐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우리의 고통은 당연하지 않다
- 어떻게 법조인을 꿈꾸게 됐나요.
“많은 사람들이 병역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그걸 당사자나 주변사람들이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면서 형언할 수 없는 당혹스러움을 느꼈어요. 이런 고통이 당연한 것인지 늘 의문이 들었습니다. 중학교 때 친한 친구에게 수학 과외를 해주던 의대 다니던 형이 집총거부로 영창에 갇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어차피 집총을 거부할 거면 왜 굳이 군에 입대해서 고생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병역법을 찾아서 읽어봤는데 ‘정당한 사유’가 있으면 처벌을 받지 않는다고 돼있더라고요. 검사셨던 할아버지께 여쭤봤더니 병역거부자들은 병역법이 아니라 군 형법상 항명죄에 해당된다고 하셨어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1990년대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은 훈련소에 강제 입소한 뒤 집총을 거부하고 영창에 갇힌 뒤 군사재판을 받았다. 군사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으면 군인으로서 불명예제대 처리된 뒤 군인 신분을 벗고 민간교도소로 이감됐다. 양형도 3년으로 지금보다 길었다. 94년 병역법이 개정돼 ‘집총거부’ 전 ‘입영거부’를 할 수 있게 됐지만, 2000년대가 돼서야 입영거부 방식이 정착됐다.
- 법조인이 돼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었던 건가요.
“공정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 저항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던 것 같아요. 법조인이 돼서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고 싶었어요. 보통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과문제로 법조인의 꿈을 꾸는 경우가 없는데 저는 어릴 때부터 법조인들을 많이 봐서 비교적 친숙한 편이었어요. 검사셨던 할아버지와 같이 살았는데 저희 집이 부산고등법원 바로 앞이었어요. 초등학교를 갈 때 부산고법 정문으로 들어가서 부산지법 정문으로 나와 부산지검 옆을 지나다녔죠. 법조인으로 확실히 진로를 정한 건 2000년이 지나서였어요. 2002년에 박시환 판사님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허용하지 않는 병역법에 대해 처음으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했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언론 등에서 문제제기가 쏟아지면서 해결될 수 있겠다는 희망을 느꼈어요.”
-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게 쉽진 않았죠.
“2002년에 부산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제가 머리가 좋지 않아서(웃음) 정말 어렵게 붙었어요. 2차 시험만 3번 떨어졌어요. 지금 생각해도 부산과 서울 신림동을 오가며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시간이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어차피 감옥 갈 건데 사시는 봐서 뭐하냐는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저에게 불합격은 바로 감옥행을 뜻했기 때문에 조금 더 절박하게 공부했던 것 같아요. 사시를 다시 보는 꿈을 꿨는데 괴로워하다 깨어보니 교도소더라고요. 감옥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제일 힘든 꿈이 군대에 다시 가는 꿈, 감옥에 다시 가는 꿈이라던데 저는 사시를 다시 보는 악몽을 많이 꿨어요.”
백씨는 사법연수생 시절부터 본인이 수감되기 직전까지 200명이 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을 무료로 변론했다. 지난해 대법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첫 무죄판결 사례로 기록된 오승헌씨 역시 그가 변론을 맡았었다.
- 여러 병역거부자들을 변론했는데, 문제의 당사자로서 또 변호인으로서 사건을 대하는 마음이 복잡했을 것 같습니다.
“변호인이지만 마음은 피고인이었다고 할까요.(웃음) 변호인으로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재소자들을 보면 마음이 이상했어요. 저 모습이 나의 미래겠구나 싶었죠. 모든 사건을 온 마음을 다해 변호했지만 제가 처음 변론을 시작한 2011년은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어요. 노무현 정부 때 추진됐던 대체복무제 도입이 2008년에 무산됐고 2011년엔 헌재에서 병역법에 두 번째로 합헌결정을 내렸거든요. 무죄를 주장하고 헌법소원을 내고 항소하고 상고를 해서 싸워보자는 권유를 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어요. 지금처럼 항소하려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명씩 찾아가서 권유하고 설득하기도 했어요. 일반적으로 군대에 빨리 다녀오는 게 좋듯이 오히려 빨리 수감되고 빨리 석방되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선) 삶의 지혜처럼 여겨지곤 했어요. 형과 동생을 모두 변호하기도 했고, 막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홀로 계신 데 쌍둥이 형제가 비슷한 시기에 어려움을 겪은 경우도 있었고, 아들만 여섯인 집에서 줄줄이 감옥에 간 사례도 있었습니다. 사실 병역거부자 판결은 붕어빵 찍듯이 똑같이 나왔어요. 저는 변론할 때 병역거부자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병역을 거부하게 됐는지 소명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때 저와 함께한 분들 중에는 지금까지도 재판 결과를 기다린 분들도 있어요. 그분들은 이제 대체복무를 앞두고 있죠. 그 결과를 위해 그분들이 견딘 불확실성과 수고를 누군가는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백종건씨는 사시합격자 중 병역을 거부하고 징역살이를 선택한 최초이자 최후의 사례로 기록됐다. 그를 병역법 위반으로 고발한 병무청 직원도, 기소한 검사도, 유죄판결을 내린 1심 판사도 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 괜찮으시다면 징역 생활에 대해 여쭤보고 싶습니다. 오랫동안 감옥을 염두에 두고 살았지만 실제 겪는 것은 많이 달랐겠지요.
“30년 가까이 들어온 감옥생활이었지만 실제로 수감되는 느낌은 많이 달랐어요. 전날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고 집정리를 하다가 수사관에게 전화를 받았어요. 보통 며칠은 신변 정리할 시간을 주는데 저는 그날 저녁에 바로 가겠다고 했어요.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아내가 직접 운전을 해서 교도소까지 태워다 줬어요. 저는 재판을 받던 중에 결혼했고 언젠가 수감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혼 이후 하루하루를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헤어질 때가 돼서는 서로 이것저것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아내한테는 많이 미안했어요.”
- 수감생활은 어땠습니까.
“처음엔 4인실에서 5명이 같이 잤는데 일반수용자들과 함께 방을 썼어요.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하니까 다들 잘해주셨어요. 어떤 덩치 크신 분께서 이어플러그(귀마개)를 주셨는데, 나중에 그분 옆에서 잤거든요. 왜 그걸 주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옆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줄 알았어요.(웃음) 음식도 안 들어가고 화장실도 못 가고 낯섦과 불편함과 두려움 속에서 지냈죠.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다시 읽었는데 마음에 많이 와닿았어요. 특히 여름이 겨울보다 더 힘들다는 말씀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 감옥에서 상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면 모든 재소자들이 인성교육을 받는데요. 절 담당했던 교도관이 ‘인성교육 해야 될 양반이 왜 교육을 받냐’고 하셨어요.(웃음) 저를 잘 봐주셨는지 나중에 최우수상을 받았어요. 첫 한 달 동안 수용심사과정을 거친 후에는 병역거부자분들과 함께 수감됐어요. 간병, 영치(창고정리) 업무 등을 맡아서 했어요. 감옥 안에서는 병역거부자를 죄수라기보다는 대체복무를 하러 들어온 착한 일꾼으로 대하기 때문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어렵지 않게 지냈어요. ”
백씨는 “괜찮았다” “잘 지냈다”고 했지만, 징역생활을 말하는 도중 여러 번 마른 침을 삼켰다. ‘영광의 상처’라고 추억하기엔 여전히 너무 아픈 기억 같았다. 수번(수형자칭호번호)을 기억하냐고 묻자,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983번”이라고 답했다. 감옥 내 인권이 개선돼서 번호 대신 이름으로 불렸다고 했다. 백씨는 감옥 안에서 전국 법원의 판사, 검사, 변호사들에게 양심적 병역거부의 취지를 알리는 손편지를 썼다. 그가 보낸 편지는 1000통에 가깝다.
■ 수많은 사람들의 용기와 인내가 바꾼 ‘악법’
헌재는 2018년 6월 병역의 종류를 제한한 병역법 5조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과거 헌법소원 대상은 입영을 기피한 경우 처벌규정을 담은 병역법 88조였다. 병역법 5조에 대해 처음으로 제기하자고 생각해낸 것이 백씨였다. 백씨는 헌재의 과거 합헌 결정문 중 소수의견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했다.
- 헌재의 헌법불합치 결정과 대법원의 무죄판결을 들었을 땐 어땠나요.
“소름이 돋았어요. 정말 감동적이었고… 깊이 감사할 따름입니다. 보수적인 사법부 내에서 대법원과 헌재의 선례를 따르지 않은 판결이 줄지어 나온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가 최초였어요. 그동안 하급심에서 나온 100건이 넘는 무죄판결을 통해 대법원과 헌재가 입장을 변경하게 된 거죠. 법관의 독립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수자 인권보호에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인사상 불이익을 감수하고 무죄판결을 위해 깊이 고민하고 용기를 보여주신 판사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백씨는 헌재 불합치 결정에 대해 당일 경향신문이 쓴 기사의 제목 “양심적 병역거부, 죄를 벗다”를 기억하고 있었다. “죄를 벗다”라는 문장이 그날 헌재 결정을 지켜본 병역거부자들의 가장 정확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백씨는 “온라인 검색사이트인 위키, 나무위키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검색하면 빨간 글씨로 ‘이 문서는 대한민국에서 불법인 내용을 다룹니다’라는 경고문이 떠 있었지만, 이제 사라졌다”고 아이처럼 웃었다.
- 정부는 대체복무로 ‘교도소 36개월 복무’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징벌적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어떤 것이 징벌적인가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군복무와 형평성에 맞으면서도 징벌적 성격이 아닌 군과 무관한 대체복무가 도입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정시설 내 복무보다는 대만처럼 24시간 중증장애인, 치매노인을 돕는 일을 한다든지, 소방관들을 보조해 화재와 지진 등 재난상황에서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국민들께서 대체복무자의 봉사와 희생을 지켜보면서 대체복무제가 정말 국익에 도움이 되는 제도라는 생각을 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국방부에서 대체복무 장소로 교도소를 정한 이유가 군대와 가장 비슷한 환경이라고 설명하기도 했죠.
“사실 놀랍진 않았어요. 2004년과 2011년에 합헌결정이 난 주된 이유가 군복무가 너무 열악하기 때문에 형평성 있는 대체복무제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었거든요. 저는 군복무를 성실하게 마치신 분들에게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하향평준화로 갈 것이 아니라, 군복무 처우도 개선해서 모두가 인간답게 대접받고 공존하는 사회로 가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용어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군대 간 사람은 비양심적이냐는 비판인데요.
“개인적으로 용어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적’이라는 용어 때문에 불거진 불필요한 논쟁과 그 논쟁을 악용한 사람들 때문에 오해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그것을 종식시키기 위한 대안이라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런 대안을 내놓은 시기는 좀 아쉽습니다.”
- 대체복무제 도입 결정 후 이것이 특정 종교에 대한 특혜라는 비판도 있고, 여성도 대체복무를 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여호와의 증인들만 군대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외국에선 천주교, 개신교, 불교 등 다양한 종교에서 병역을 거부하고 있어요. 2001년에 오태양씨가 불교 신자로선 처음으로 병역거부를 선언했고요.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학교 선생님을 하던 분 중에서도 병역거부를 하신 분이 있어요. 여성대체복무 문제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글쎄요, 그 주장의 근본적인 목적이 정말 대체복무를 통해 기여시키고자 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 검찰에서 병역거부자의 진실성을 가려내는 방법 중 하나로 온라인 총 쏘기 게임(FPS·First-Person Shooter) 가입 여부를 얘기했는데요.
“저희의 종교적 신념 중에 총 쏘기 게임을 하지 않는 것도 있긴 해요.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재판을 받으면서 전날까진 총 쏘기를 즐기다가 병역을 거부한다면 과연 신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죠. 그런데 그것 자체를 주요 기준으로 보기보단 간접사실 중 하나로 봤으면 좋겠어요. 그리스의 경우 총기 소유 허가를 낸 적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소명할 기회를 주고, 대체복무가 널리 퍼진 독일도 폭력전과가 있다면 위원회에 출석해서 소명을 하거든요. FPS를 단 한 차례 했다거나 어렸을 때 했다고 그것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순 없겠죠.”
그는 인터뷰 내내 “기쁘다” “행복하다”와 같은 표현을 쓰지 않았다. “괴로웠다” “힘들었다” 같은 말도 잘 쓰지 않았다. 대신 “놀라웠다” “감동했다” “감사했다”는 표현을 거듭해서 썼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향해 여전히 부정적인 시선을 충분히 이해하고 의식하는 것 같았다. 가벼운 질문에도 단어 하나까지 고르고 또 골라 대답했다. 어릴 적부터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이해받아야 하는 것이 훈련된 사람처럼 보였다.
- 백종건씨의 삶 자체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위한 투쟁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저 혼자가 아니어서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견딜 수 있었어요. 제가 감옥에 있을 때 수감 중이던 한 병역거부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출소복을 넣어주면서 담당교도관에게 ‘우리 아들 잘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근데 둘째가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여기로 올 텐데 그때도 잘 부탁합니다’라고 당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감옥인데 마치 학교에 아이를 맡기듯 부탁하는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병역거부로 수감되는 청년은 홀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니었어요. 가족이 함께 옥살이를 하고 오히려 더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대법원이 판결문에서 ‘공동체에서 다를 자유’를 언급했어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 한 명 한 명을 존중하기보단 새로운 무엇인가가 발견되면 ‘튀어나온 못’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희가 병역거부를 한다고 군대 가는 사람을 비양심으로 매도하고 가치를 무시했다고 오해하는 분들도 있어요. 병역을 이행하는 사람도 거부하는 사람도 틀린 것이 아니고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요.”
- 변호사 등록이 회복되면 어떤 활동을 하고 싶습니까.
“정말 많은 분들께서 도와주셔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판례변경과 대체복무제 도입이 가능해졌어요.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도 그분들처럼 누군가에겐 절실한 도움이 되도록 살고 싶어요. 병역거부 사건을 다뤄본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소외된 약자들, 어려운 이웃을 돕는 법조인으로 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