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마음도 파괴’···피해자 10명 중 7명 ‘만성 울분’

선명수 기자

특조위, 피해 100가구 대상 첫 심층조사 결과 공개

14일 서울 중구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서 조사위원들이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14일 서울 중구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사무실에서 조사위원들이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된 피해자 10명 중 7명이 ‘만성적인 울분 상태’를 겪는 것으로 조사됐다. 일반인보다 자살 시도 비율이 4.5배 높게 나타나는 등 정신건강도 심각한 수준인 것으로 확인됐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는 14일 서울 중구 특조위 사무실에서 이 같은 내용의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한국역학회는 특조위 의뢰로 지난해 10월부터 약 3개월간 가습기 살균제 피해 100가구를 방문해 신체·정신·사회경제·심리적 피해를 심층 조사했다. 2002년 가습기 살균제 피해 첫 사망자가 나온 후 피해 가구 심층 조사를 진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업·정부에 대한 분노, 죄책감 등 일반인보다 2배 높아
“피해자가 증명? 다시 살균제를 흡입하란 건가요” 호소
신고자의 13%만 ‘피해 인정’…자살 시도 일반인의 4.5배

이번 조사는 피해자들의 신체·정신건강뿐만 아니라 심리·사회적 피해를 들여다봤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한 것 같아요. 피해자한테 자꾸 증명하라고 하면 저는 가습기를 다시 흡입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흡입하고 임신해서 아픈 애를 낳고 부검하는 수밖에 없어요. 도대체 저한테 뭘 어떤 식으로 증명하라는 건지 모르겠어요.”

피해자 ㄱ씨의 말이다. 조사 결과 성인 피해자의 66.6%가 ㄱ씨 같은 지속적인 ‘만성적 울분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 가운데 50%는 외상 후 울분장애(PTED) 진단 가능성이 있는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울분 상태를 보였다. 일반인과 비교했을 때 2.27배 높은 수치다.

가습기 살균제 ‘마음도 파괴’···피해자 10명 중 7명 ‘만성 울분’

연구를 진행한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이들의 울분은 현재의 피해보상 및 대응체계가 양산하는 ‘사회적 울분’”이라고 분석했다. ㄱ씨 사례처럼 피해자에게 전가하는 피해 입증의 어려움, 유해제품을 생산한 기업과 규제하지 못한 정부에 대한 분노, 자신이 구매한 제품 때문에 가족이 죽거나 아픈 데 대한 죄책감, 피해인정 과정에서의 모욕적 경험 등이 누적돼 만성적인 울분과 각종 추가 피해를 겪고 있다고 했다.

연구팀은 성 역할에 따라 피해가 ‘젠더화’된 양상을 보인다고 분석했다. 유 교수는 “생활화학제품을 구매하는 대다수는 여성으로 본인이 피해자이면서도 아이와 가족을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며 “여성은 아프면서도 아이들 앞에서 씩씩해야 하는 역할 갈등까지 겪는다”고 했다. 이날 특조위를 찾은 피해자 이모씨는 “살균제 피해자이면서도 피해 입증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10년을 버티고 싸웠다”며 “죽을 때까지 (정부와 기업을 대상으로) 싸워야 할 것이고, 몸이 아픈 제 아이도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대를 이어 싸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들은 다양한 심각한 정신건강 피해도 경험하고 있었다. 성인 피해자의 경우 가습기 살균제 노출 이후 우울과 의욕저하(57.5%), 죄책감과 자책(55.1%), 불안과 긴장(54.3%)을 경험한 수치가 높았다. 자살 생각이 27.6%, 자살 시도는 11.0%로 일반 인구에 비해 각각 1.5배, 4.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 책임자인 김동현 한림대 의대 교수는 “이는 중증도 이상의 우울고위험군, 자살고위험군으로 측정되는 수치”라며 “이들 집단에 대한 자살예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피해 질환으로 인정하는 폐질환(53.6%)뿐만 아니라 비염·비질환(63.5%), 결막염·안질환(48.8%), 위염·궤양(42.4%), 피부질환(39.2%), 심혈관계 질환(29.6%) 등 광범위한 건강 피해도 확인됐다. 김동현 교수는 “정부의 피해인정 질환과 실제 피해자들이 진단받은 질환과의 차이가 크다”며 “발견되는 각종 질환을 가칭 ‘가습기살균제증후군’으로 정의해 신체 및 정신 피해를 폭넓게 인정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가 2017년 한국환경독성보건학회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가습기 살균제 건강 피해자는 50만여명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정부에 신고된 피해자는 지난 1월 말 기준 6272명으로 정부가 예측한 전체 피해자의 0.15%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1379명은 이미 사망했다. 엄격한 판정 기준 때문에 피해 신고자 가운데 798명(12.7%)만이 정부로부터 피해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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